하이든의 애인 루이지아 폴첼리(Luigia Polzelli)
이탈리아의 메조소프라노
부인 마리아 안나와는 억지로 결혼
영국의 레베타 슈뢰터. 혹자는 이 초상화가 루이지아 폴첼리라고 주장했음.
일반적으로 악처는 크산티페(Xanthippe)라고 부른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 부인의 이름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하도 못되게 굴어서 크산티페라는 이름이 아예 악처의 대명사가 되었다. 악처를 Femme fatale 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지만 Femme fatale 는 요부를 말한다. 하기야 요부도 악처에 속하기는 한다. 위대한 작곡가의 악처로서 세명을 꼽는다면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 그리고 하이든의 부인 마리아 안나도 어쩐 일인지 악처 열전에 포함된다. 하지만 하이든의 부인 마리아 안나는 못된 악처라기 보다는 미련한 부인, 즉 우처(愚妻)에 속한다. 하이든의 부인으로서 조순하게 살림도 잘하고 아이도 잘 낳아 길렀으면 세간으로부터 위대한 '파파 하이든'의 부인으로서 대우를 받았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다. 주책없는 일만 골라서 했기 때문에 하이든이 싫어하지 않을수 없었다. 마리아 안나의 풀 네임은 마리아 안나 알로이지아 아폴로니아 하이든(Maria Anna Aloysia Apollonia Haydn)이고 결혼 전의 성은 켈러(Keller)이다. 성모 마리아의 이름과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안나의 이름까지 인용한 이름이어서 이름으로 보면 그럴듯 한데 위대한 하이든의 부인으로서는 도무지 '아니올시다'였다. 하이든의 부인이 되기에는 너무너 격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마리아 안나가 얼마나 미련하고 무식했는가 하면, 하이든이 애써서 작곡해 놓은 오선지를 머리 컬을 하는 종이로 사용하는가 하면 케이크를 만드는 받침 종이로 사용해서 못쓰게 만든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떤 때는 귀중한 신작 악보를 불쏘시개로 사용해서 없앴다고 하니 정말 못말릴 여자였다. 하이든의 부인이라고 하면 '음악'의 '음'자라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도저히 사랑할래야 사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여인이었다. 하이든은 신앙심이 어느 누구보다도 깊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 때문인지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는 성품이었지만 마누라인 마리아 안나만은 어쩔수 없이 미워했다. 아무튼 하이든은 훌륭한 인품과 신앙심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성인군자는 아니었다. 부인이 싫다보니 자연히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수 없었다. 반반하게 생기고 애교가 있는 루이지아 폴첼리가 대상자였다. 하이든이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에서 일을 할 때에 처음 만났다. 하이든은 루이지아 폴첼리를 사랑하여서 아예 결혼할 생각도 했다. 더구나 루이지아 폴첼리는 명색이 메조소프라노였다. 그러나 당시 로마 가톨릭의 규범에 의하면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거나 정신병과 같은 불치의 병에 걸려서 시설에 수용되어 있지 않는 한 이혼은 꿈도 못 꾸는 것이었다. 하이든은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마누라인 마리아 안나가 어서 죽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마리아 안나는 71세까지 살았다. 결국 하이든과 루이지아 폴첼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내연의 관계로서 무려 10년 이상을 지냈다. 이탈리아 출신의 루이지아 폴첼리가 에스터하지에 와서 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두살 짜리 아들이 있었다. 말하자면 유부녀였고 한 아이의 엄마였다. 루이지아 폴첼리는 에스터하지에 있으면서 두째 아이인 안토니오를 낳았다. 루이지아 폴첼리의 남편의 이름도 안토니오였으며 에스터하지에서 낳은 둘째 아들의 이름도 안토니오였다. 루이지아 폴첼리는 아들 안토니오가 하이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으며 루이지아 폴첼리의 남편인 안토니오도 그 아이의 아버지는 하이든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하이든은 어찌된 셈인지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이든은 여러 사람에게 편지를 많이 쓴 사람이었지만 그 편지 중에 안토니오라는 아이를 본인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은 한군데도 없었다.
루이지아 폴첼리라고 생각되는 여인의 초상화
돌이켜보면, 하이든과 마리아 안나의 결혼은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소년시절에 슈테판성당의 합창단원으로 비엔나 온 하이든은 몇년을 성당에서 노래를 부르며 그럭저럭 지내다가 나이가 들어 변성이 되자 더 이상 합창단원으로 활동할수 없어서 차제에 작곡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했다. 작곡가로서 청년 하이든의 명성은 차츰 높아갔다. 그러나 비엔나에서 제대로 이름을 날리고 활동하자면, 다시 말해서 먹고 살자면 돈많은 귀족 후원자가 있어야 했다. 참으로 다행하게도 툰 백작부인(Countess Thun)이라는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툰 백작부인은 하이든의 작품을 듣고나서 하이든을 불러 자기의 노래 및 키보드 선생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비엔나에서 집도 절도 없이 지내야 했던 하이든은 일단 후원자(파트론)를 얻게 되어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할수 있었다. 얼마후인 1756년, 24세의 하이든은 봐인치에를(Weinzierl)이란 곳에 있는 칼 요제프 휘른버그(Carl Josef Fürnberg) 남작의 저택에 음악책임자로서 고용되었다. 하이든은 이곳에서 첫 현악4중주곡을 완성했다. 몇달후 휘른버그 남작은 하이든을 모르친(Morzin) 백작에게 소개해 주었다. 하이든이 25세 때였다. 모르친 백작은 하이든을 정식으로 고용했다. 모르친 백작 저택에서 하이든의 직책은 카펠마이스터였다. 말하자면 음악감독이었다. 하이든은 백작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작곡을 했다. 오케스트라는 규모가 작기 때문에 앙상블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었다. 하이든의 첫 교향곡은 이 때 작곡된 것이다.
하이든은 카펠마이스터라는 안정된 직업이 있었기 때문에 기왕에 결혼을 생각했다. 하이든은 테레제(Therese)라는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하이든보다 한살 아래의 여자였다. 그런데 테레제의 아버지가 죽어라고 결혼을 반대했다. 언니인 큰 딸이 있는데 동생인 둘째 딸 테레제가 먼저 결혼하는 것은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하이든에게 정말로 결혼할 생각이면 큰 딸과 결혼하라고 종용했다. 말이 종용이지 거의 협박이나 다름 없었다고 한다. 얘기에 의하면 당시 마리아 안나는 어떤 유부남을 좋아해서 죽자사자 했는데 마리아 안나의 아버지가 도저히 그 꼴을 볼수 없어서 다른 남자한테 어서 시집보내고자 벼르고 있었던 터에 마침 하이든이 나타나서 둘째 딸과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시집 못간 큰 딸 문제를 착한 하이든에게 넘기고자 그렇게 강요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남한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마음씨 착한 하이든은 결국 큰 딸인 마리아 안나와 결혼했다. 마리아 안나는 하이든보다 세살이나 연상이었다. 그러니 하이든과 마리아 안나의 결혼생활이 행복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했지만 당시의 법으로는 이혼도 마음대로 할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톨릭의 규례가 그러했다. 하이든과 마리아 안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사랑이 없는데 아이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하이든은 하이든대로, 마리아 안나는 그 나름대로 애인을 두며 지냈다. 실은 서로 알면서도 모른체 했다고 한다.
하이든과 결혼한 마리아 안나. 루드비히 구텐브룬이란 화가가 그린 것으로 그는 하이든의 초상화도 그렸다.
이제 하이든이 부인인 마리아 안나는 제쳐두고 10년 이상이나 사랑했던 루이지아 폴첼리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소개코자 한다. 루이지아 폴첼리는 1760년 나폴리에서 태어난 메조소프라노였다. 하이든보다 무려 28세 연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사랑에는 나이 차이가 소용이 없는 법이 아니던가. 루이지아 폴첼리는 17세 쯤 되었을 때 볼로냐에서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토니오를 알게 되어 결혼했다. 안토니오는 일자리를 위해 부인과 함께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에스터하지 공자의 궁전을 찾아왔고 하이든이 이들의 고용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까 하이든이 루이지아 폴첼리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때 루이지아 폴첼리와 안토니오는 이미 두살된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도 하이든은 노인네가 주책이지 유부녀에 아이까지 있는 젊은 여자를 사랑한 것이다. 아무튼 에스터하지 공자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바이올리니스트와 메조소프라노라고 하니까 실력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하이든의 권고에 따라 두 사람을 우선 고용했다. 그래서 폴첼리와 남편인 안토니오는 2년 계약으로 에스터하지 궁전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지아 폴첼리가 별로 실력이 없는 성악가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얼굴만 반반하고 눈웃음이나 살살 치는 여자였지 정작 노래는 한심할 정도였다. 게다가 남편 안토니오는 한 술 더 떴다. 우선 오자마자 폐렴에 걸려 한동안 연주회에 참석하지 않고 월급만 받아 먹었으니 완전히 미운오리새끼였다.
고용주인 니콜라우스 에스터허지 공자는 대단한 오페라 애호가였다. 그는 어떻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 잘 부르는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루이지아 폴첼리의 노래를 듣고 나서 당장 '아니올시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루이자의 남편이라는 안토니오는 성실치 못한데다가 실력도 뛰어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에스터하지 공자는 당장 두 사람을 해고하기로 생각했다. 계약 기간이 남았지만 미리 돈을 다 주는 한이 있더라도 내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시기에 루이지아 폴첼리는 하이든과 대단히 좋아지내는 사이였다. 그때 하이든은 48세의 중년이 지난 입장이었고 루이지아 폴첼리는 고작 20세의 젊은 여인이었지만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두말하면 잔소리이겠지만 하이든과 부인 마리아 안나의 사이가 마치 남남처럼 냉냉했던 것이 이유였다. 하이든은 에스터하지 공자가 루이지아 폴첼리와 안토니오를 해고할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에스터하지 공자를 찾아가서 '제발 다시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다. 물론 하이든도 루이지아 폴첼리가 실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이든을 무척 존경하고 있는 에스터하지 공자는 하이든의 부탁을 듣고 루이지아 폴첼리를 해고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하이든과 루이지아 폴첼리의 관계는 10년 이상이나 계속될수 있었다.
하이든의 고용주인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자
루이지아 폴첼리와 남편 안토니오는 1790년에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일자리를 잃었다.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의 후계자인 안톤 에스터하지는 사실상 모든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해임하였다. 그래서 루이지아 폴첼리와 안토니오는 비엔나로 왔다. 그리고 안토니오는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하이든이 영국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떠날 때에 루이지아 폴첼리는 함께 가지 못했다. 아무튼 하이든은 언젠가 루이지아 폴첼리와 결혼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이든은 런던에서 루이지아 폴첼리의 남편인 안토니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루이지아 폴첼리에게 상당히 기대에 부푼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 두 해가 지나면서 루이지아 폴첼리에 대한 하이든의 감정은 식기 시작했다. 비엔나에서 런던의 하이든에게 도착하는 소식에 의하면 루이지아 폴첼리가 사람들을 만나서 하이든을 나쁘게 얘기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이든이 루이지아 폴첼리에게 큰 맘 먹고 선물한 피아노도 당장 팔아버렸다는 소식이 있었다. 하이든은 루이지아 폴첼리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얼마후 루이지아 폴첼리는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피아첸차(Piacenza)의 어떤 작은 극장에 일자리를 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이든은 런던에서 레베카 슈뢰터(Rebecca Schroeter)라는 미망인과 로맨틱한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
루이지아 폴첼리는 하이든의 작곡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미안한 말이지만 긍정적인 뜻으로가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 영향을 끼쳤다. 하이든은 기회만 있으면 루이지아 폴첼리에게 성악 레슨을 해주었다. 하기야 하이든 자신도 소년 시절에 비엔나의 슈테판성당에서 소년합창단원으로 있었으므로 노래에 대하여는 일가견이 있었다. 하이든의 성악 레슨에도 불구하고 명색이 이탈리아 출신의 메조소프라노인 루이지아 폴첼리의 실력은 향상되지를 않았다. 그냥 부르는 노래는 그런대로 관찮았지만 조금 어려운 곡은 힘들어했다. 특히 스케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에스터하지 궁전에서는 하이든의 오페라도 공연되었지만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도 자주 공연되었다. 그럴 경우, 루이지아 폴첼리가 불러야 하는 아리아가 너무 이려울 것 같으면 하이든이 이른바 Insertion airas(삽입 아리아)를 만들어서 부르기 어려운 오리지널 아리아를 쉬운 아리아로 대체하였다. 하이든이 루이지아 폴첼리를 위해 그렇게 만든 삽입 아리아가 최대 10개는 된다고 한다. 하이든은 거의 15편에 이르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한 루이지아 폴첼리에게 역할을 준 경우는 두번 밖에 없다. L'isola disabitata(무인도)에서 실비아와 La vera costanza(변치 않는 진실)에서 리제타라는 역할이었다. 노래를 별로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이든으로서도 어쩔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루이지아 폴첼리는 에스터하지에 왔을 때 이미 두살 짜리 아들 피에트로가 있었다. 루이지아 폴첼리는 아이젠슈타트에서 3년째 살던 때에 둘째 아들 안토니오(1783-1855)를 낳았다. 루이지아 폴첼리와 남편 안토니오는 아이젠슈타트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 하이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하이든은 인정하지 않았다. 하이든은 마리아 안나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하이든은 루이지아 폴첼리의 두 아들인 피에트로와 안토니오를 무척 귀여워했다. 하이든은 두 아이에게 음악을 가르쳤으며 아이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두 아이의 후견인이 되었다. 하이든은 1792년에 루이지아 폴첼리의 큰 아들인 피에트로를 비엔나의 집으로 데려와 피아노를 가르쳤다. 이어 피에트로를 어떤 귀족 집의 피아노 교사로 취직시켜 주기도 했다. 피에트로는 19세 때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 안토니오는 에스터하지 궁정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가 되었다.
하이든을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간 루이지아 폴첼리는 처음에 피아첸차의 작은 극장에서 일을 했으나 얼마 후에는 볼로냐로 가서 역시 어떤 작은 극장에서 역할을 맡으며 지냈다. 하이든은 루이지아 폴첼리와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다. 하이든은 가끔씩 돈을 보내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1800년에 하이든의 부인인 마리아 안나가 드디어 세상을 떠나자 루이지아 폴첼리는 하이든에게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다음과 같은 문서를 적어 달라고 요청했다. 내용인즉, "아래에 서명한 본인은 로이사 폴첼리에게 약속하노니 만일 내가 재혼을 생각한다면 로이사 폰첼리 이외의 다른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재혼을 하지 않고 그대로 지낸다면 내가 죽은 후에 3백 굴덴의 연금을 폴첼리에게 남길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하이든은 루이지아 폴첼리와의 약속을 지켜서 재혼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지아 폴첼리는 루이지 프란키(Luigi Franchi)라는 테너와 재혼하였다. 두 사람은 크레모나를 여행하고 이어 헝가리로 갔다. 루이지아 폴첼리는 헝가리에서 1830년에 세상을 떠났다. 무일푼의 상태였다고 한다.
신앙심이 깊고 점잖게 생기신 이 분이 부인이 있으면서도 10년 이상이나 루이지아 폴첼리라고 하는 젊은 여성을 사랑하여서 관계를 가지며 살았다. 심지어는 두 사람 사이에 아들도 하나 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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