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모차르트 해석에 뛰어난 에다 모저(Edda Moser)

정준극 2011. 8. 16. 22:32

에다 모저(Edda Moser)

 

전성기의 소프라노 에다 모저

 

소프라노 에다 모저(Edda Moser: 1938-)는 지금은 무대에서 은퇴하였지만 1970년대에 모차르트 성악곡의 해석에 뛰어나다는 찬사를 들었던 독일의 성악가이다. 그가 1973년에 취입한 '모차르트 비르투오소 아리아집'(Virtuoso Arias by W. A. Mozart)는 프랑스가 주관하는 최우수 음반상(Grand Prix du Disque)를 받았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해인 1938년에 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는 저명한 음악학자인 한스 요아힘 모저(Hans Joachim Moser)의 딸이다. 베를린음악원에서 헤르만 봐이쎈보른(Hermann Weissenborn)과 게트리 쾨니히(Gerty König)에게 사사한 에다 모저는 1962년 푸치니의 '나비부인'에서 단역인 케이트 핀커튼 역으로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몇년후 뉴욕으로 간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에서 라인의 세처녀 중의 하나인 벨군데(Wellgunde)를 맡아 미국의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였다. 그는 메트에 9년 동안 있으면서 점차 주연급 역할을 맡기 시작하여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메트에서 맡은 역할 중에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중에서 돈나 안나, 역시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에서 '밤의 여왕' 등이었다. 그로부터 에다 모저는 모차르트 음악을 가장 정확히 해석하는 성악가라는 평을 받았다. 에다 모저는 드라마틱 콜로라투라이지만 리리코 스핀토(Lirico spinto)의 역할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에다 모저가 맡은 수많은 역할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1968년 한스 베르너 헨체의 오라토리오 Das Floss der Medusa(메두사호의 표류)이었다. 이 오라토리오는 함부르크에서 초연될 예정이었으나 공연 당일, 연주회장에서의 소동으로 취소된바 있다. 하지만 무대에서의 초연이 있기 며칠 전에 헨체 자신의 지휘로 도이치 그라마폰(DDG)에서 음반으로 취입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초연으로 간주할수 있으므로 에다 모저는 '메두사호의 표류'에서 소프라노의 역할을 창조한 셈이다. DDG에서의 취입에서는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함께 연주하였으며 오케스트라는 북독일방송교향악단이 맡았다.

 

'마술 피리'에서 '밤의 여왕'을 맡은 에다 모저

 

에다 모저는 오페라에도 자주 출연하였지만 사실상 오페라의 음반취입에 더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가 맡았던 대표적인 역할들은 다음과 같다. 베토벤의 '휘델리오'에서 레오노레, 달베르의 '아브라이제'에서 루이제, 글룩의 '오르페오와 유리디체'에서 아모르(Amor), 구노의 '파우스트'에서 마르게리트(마르가레테),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에서 캔디 마녀(Knusperhexe), 칼만의 '마리차 백작부인'에서 만야(Manja), 레하르의 '주디타'에서 주디타(Giuditta),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에서 네다(Nedda), 모차르트의 '아폴로와 하이친투스'에서 히아친투스(Hyacintus),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에서 돈나 안나,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에서 엘레트라(Elettra), 모차르트의 음악감독에서 마드무아젤 질버클랑(Mlle Silberklang),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에서 밤의 여왕, 칼 오르프의 '프로메테우스'에서 합창단원, 라모의 '이폴리트와 아리시'에서 신전의 제녀, 슈베르트의 '모반자'(Verschworenen)에서 루드밀라 백작부인, 슈만의 '제노베바'에서 제노베바, 오스카 슈트라우스의 '왈츠의 꿈'에서 프란치, 주페의 '보카치오'에서 베아트리스, 베르디의 '돈 카를로'에서 엘리자베타,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에서 라인의 님프 세명 중 하나인 벨군데(Wellgunde), 베버의 '아부 하싼'에서 파티마(Fatima) 등이다.

 

에다 모저는 1990년대 초반에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하지만 콘서트 성악가로서는 계속 활동하였다. 현재 에다 모저는 올바른 독일어 문화의 창달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오페라와 연극에서 독일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정체불명의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를 순화하자는 생각에서이다. 이와 관련하여 에다 모저는 2006년에 Festspiel der Deutschen Sprache 라는 행사를 창설하였다. 에다 모저는 최근까지 쾰른 음악대학에서 교수로 있었다.

 

근년의 에다 모저

   

['메두사호의 표류' 이야기]

한스 베르너 헨체의 오라토리오 Das Floss der Medusa 를 '메두사의 뗏목'(The Raft of the Medusa)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Medusa 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가 아니라 메두사라는 이름의 선박(뗏목 포함)을 말한다. 그리고 독일어의 Das Floss 는 뗏목이라는 의미보다는 표류라는 뜻이 더 강하다. 게다가 Das Floss der Medusa는 오라토리오이지만 그렇다고 종교적인 내용의 오라토리오는 아니다. 실제로 오라토리오라기 보다는 레퀴엠(진혼곡)이라고 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이다. 헨체는 '메두사호의 표류'를 체 게바라(Che Guevara)를 추모하기 위한 진혼곡으로 작곡했기 때문이다. 잘 아는 대로 한스 베르너 헨체는 독일에서 공산주의 좌익 사상을 가진 작곡가로서 알려져 있다. '메두사호의 표류'는 그의 좌익사상을 나타내 보이는기둥 작품이다.  '메두사호의 표류'의 스토리는 1816년 프랑스 구축함인 Meduse 호가 아프리카 서해안에 좌초한 사건을 다룬 것이다. 프랑스의 테오도르 제리꼬(Théodore Géricault)라는 화가가 이 사건을 '메두사호의 표류'라는 타이틀로 그린 작품은 유명하다.

 

테오도르 제리꼬(Théodore Géricault)의 '메두사의 뗏목'을 바탕으로 올리버 라우슈(Oliver Rausch)가 그린 콘셉트 아트 
     

'메두사호의 표류'는 1968년 12월 9일 함부르크의 플란텐 운 블로멘(Planten un Blomen) 공원의 연주회장에서 초연될 예정이었다. 연주회를 시작하려는 때에 어떤 학생이 체 게바라의 대형 초상화를 무대 앞의 난간에 내 걸었다. 주최측인 북독일방송국 사람들이 얼른 걷어냈다. 그러자 2층의 객석에 있던 일단의 학생들이 공산주의를 뜻하는 붉은 기와 또 다른 체 게바라 초상화를 내걸었다. 또 다른 학생들은 무정부주의를 의미하는 검은 기를 내걸었다. 사태가 이렇게 확산되고 있을 때에 헨체와 솔리스트들이 무대에 나타났다. 솔리스트는 에다 모저와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였다. 그러자 무대에 있던 합창단원들은 '붉은 깃발 아래에서는 노래를 부를수 없다'면서 퇴장할 기미를 보였다. 헨체는 그대로 진행하자는 주장이었다. 옥신각신하는 고함소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마침내 경찰이 출동하여 소란을 핀 학생들을 객석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 시작했다. 그 중에는 '메두사호의 표류'의 대본을 쓴 에른스트 슈나벨(Ernst Schnabel)도 포함되었다. 슈나벨은 헨체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좌익사상에 물들어 있던 사람이었다.

 

경찰이 소란을 핀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자 헨체가 다시 무대에 올라섰다. 헨체는 '경찰이 간섭하여 연주회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객석의 일부 사람들이 '호 호 호치민'이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헨체는 팔을 흔들며 이들의 구호를 리드하였다. 경찰이 다시 나타나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다. 이렇게 하여 '메두사호의 표류'의 초연은 취소되었다. '메두사호의 표류'가 무대에서 처음으로 연주된 것은 1971년 1월 29일 비엔나에서 였다. 이어 1972년 4월 15일에는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공연되었다. 그리고 베를린에서 공연된 것은 2006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