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 작곡가 일화

불행하게 생애를 마친 비발디

정준극 2011. 9. 7. 00:29

불행하게 생애를 마친 비발디

비발디의 서거 약 200년후 실종된 악보 대량 발견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

 

보석과 같은 수많은 현악곡과 오페라, 종교음악을 남긴 비발디는 1741년 7월 28일 비엔나에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가운데 쓸쓸한 생애를 마감했다. 향년 63세였다. 비엔나에서 말안장을 만들어 팔던 어떤 사람의 미망인의 집에 세들어 살고 있을 때였다. 그 집은 현재 칼스키르헤 옆에 있는 비엔나공과대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비발디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그의 제자로서 그를 돌보아주었던 프리마 돈나 안나 지로(Anna Giraud)와 몇몇 사람만이었다고 한다. 거장의 마지막 길은 이처럼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었다. 비발디에 대한 영결미사는 슈테판성당에서 있었다. 당시 소년 하이든은 슈테판성당의 성가대원이었다. 그렇다고 하이든이 비발디의 장례미사에 참여했다는 것은 아니다. 비발디의 장례식은 50년 후인 1791년에 있었던 모차르트의 장례식과 같은 것이었다. 그저 몇 사람만이 장례행렬을 따르는 간소한 것이었으며 그보다도 어디에 매장하였는지 모르는 쓸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직까지도 비엔나에서 비발디의 묘소는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추측컨대 칼스키르헤(칼교회)의 옆에 있는 공터에 묻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칼교회 옆의 공터는 당시 병원에서 사망한 환자들을 매장하는 장소였다. 비발디의 사인은 장염이었다고 한다. 생각컨대 영양실조로 장염에 걸렸다고 보고 있다. 비발디의 매장을 기억하게 하는 유일한 표지는 비엔나공과대학교의 한쪽 벽에 '비발디가 이 장소에 매장되었다고 한다'는 내용의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이 장소에 비발디가 1741년 7월 28일에 매장되었다고 하는 명판. 이 장소에는 1789년까지 시립병원이 있었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비엔나공과대학교 건물 한쪽에 비발디가 살았었다는 내용의 기념 명판이 붙어 있다.

 

비발디가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자 그와 함께 음악활동을 했던 당시의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바뻤는지 비발디의 이름과 그의 작품과 그에 대한 추억까지 거의 모두 잊기 시작했다. 비발디가 고향 베니스를 떠나 비엔나로 온 것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었던 샤를르 6세가 특별 초청하여서였다. 비발디는 합스부르크 궁정작곡가로서 임명되어 활동했다. 그런 그가 말년에는 병마와 힘든 싸움을 벌이다가 이기지 못하여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가 힘든 장면이 아닐수 없다. 유럽의 음악계를 거의 40년이나 찬란하게 지배하였던 거장 비발디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를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대우하였는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오늘날 비엔나에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하이든 등 수많은 거장 작곡가들의 기념상이 있지만 비발디의 기념상은 하나도 없다. 그것도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기껏 있다는 것이 비엔나공과대학교 건물 한쪽에 자그마한 명판이 붙어 있는 것이고 9구 알저그룬트의 루즈벨트플라츠에 비발디의 '사계'를 형상화한 조각 작품이 하나 있는 것 뿐이다. 그리고 10구 화보리텐에 비발디를 기념하는 비발디가쎄(Vivaldigasse)라는 거리가 있다. 비발디가 처음 비엔나에 와서 지냈던 집은 현재 자허(Sacher) 호텔이 있는 자리에 있었던 건물이었다고 한다.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 바로 뒤편에 있는 유명한 호텔이다. 비발디가 살았었다고 하는 집은 진작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허호텔을 세운 것이다. 자허호텔에는 '이곳이 비발디가 살았던 집이 있었던 장소'라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알베르티나미술관에서 바라본 자허 호텔. 비발디가 비엔나에 와서 거처했던 집이 있었던 장소이다.

  

한 때는 유럽에서 비발디의 오페라가 공연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비발디의 종교음악이 성당마다 연주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자 사람들은 비발디의 음악을 이탈리아 음악이라는 드넓은 하늘에 나타난 어떤 혜성의 꼬리 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멘델스존은 바하의 음악을 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리바이벌 붐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발디의 음악에 대하여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비발디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사계'마저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는 비발디의 '사계'라는 작품이 있었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프릿츠 크라이슬러는 비발디의 음악을 사용하여 파스티셰(Pastiche)를 만들었다. 비발디 스타일의 협주곡이었다. 그러면서도 비발디의 음악에서 가져 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언급하였다. 그것이 그나마 오늘날 비발디의 이름을 부활시킨 계기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그나마 비발디의 이름을 기억나게 해준 프릿츠 크라이슬러(1875-1962)

 

이 위대한 이탈리아의 작곡가에 대한 전설은 독특하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비발디의 작품들은 대부분 분실되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다가 1926년, 일단의 형사와 같은 수사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이탈리아 피에드몽(Piedmont)에 있는 어떤 수도원의 도서실에서 지금까지 알져지지 않았던 비발디의 종교음악 악보를 상당량 발견하였다. 비발디의 미공개 악보들을 작품번호별로 정리하면서 보니까 중간에 있어야 할 악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도대체 사라진 악보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조사단의 수사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0년 10월 두라쪼(Durazzo) 대공의 후손이 중간에 빠진 악보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두라쪼 대공은 18세기 초반에 비발디로부터 직접 악보들을 획득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햇빛을 보게된 비발디의 작품들은 제발 놀라지 마시라! 각종 기악곡 300 곡, 오페라 18편, 그리고 100 곡 이상의 기악반주에 의한 성악곡이었다. 여기에는 콘서트에서도 연주될수 있는 별도의 오페라 아리아들은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만한 분량의 악보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사장되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과연! 세계의 음악계는 비발디의 미공개 악보들이 대거 발견되자 깜짝 놀라고 이어 비발디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소리를 높이 내었다. 비발디의 음악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소리가 높이 울려퍼지게 되었다. 비발디가 비엔나의 어느 허룸한 셋방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약 200 년이 지난 때의 일이다.

 

비발디의 작품들이 대량으로 발견된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피에드몽 수도원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악보가 잊혀져 있었던 것인가? 말년의 비발디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를 후원하던 샤를르 6세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의 음악적 취향은 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비발디의 작품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다. 가난을 이기지 못한 비발디는 가지고 있던 악보들을 헐값에 팔기 시작했다. 두라쪼 대공이 비발디의 악보를 가지고 있게 된 사연은 그래서였다. 새로 발견한 악보들을 정리해보니 모두 27권에 이르렀다. 이 악보들은 토리노 국립대학교도서관으로 이관되어 철저 조사연구에 사용되도록 했다. 이후 20세기에 이르러 비발디 재발견 프로그램에 기여한 사람들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비롯하여 마르크 핀체를레(Marc Pincherle), 마리오 리날디(Mario Rinaldi), 알프레도 카셀라(Alfredo Casella), 올가 루드게(Olga Rudge), 루이스 카우프만(Louis Kaufman) 등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노고가 컸던 사람은 아무래도 알프레도 카셀라일 것이다. 그는 1939년에 이제는 역사적 행사가 된 '비발디 주간'(Vivaldi Week)를 처음으로 추진하였다. 처음 연주회에서는 글로리아(Gloria)와 올림피아드(l'Olimpiade)가 역사상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아무튼 그로 인하여 2차 대전 이후부터는 전세계적으로 비발디 재발견 붐이 일어나 비발디의 작품들이 하나하나 다시 연주되어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하여 1947년에는 베니스의 기업인인 안토니오 환나(Antonio Fanna)라는 사람이 '안토니오 비발디 이탈리아 연구소'(Instituto Intaliano Antonio Vivaldi)를 설립하여 작곡가인 지안 프란체스코 말리피에로(Gian Francesco Malipiero)를 예술감독으로 영입하고 비발디의 음악을 진흥하고 새로운 악보들을 출판하는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비발디의 '사계'를 기념한 조각작품. 비엔나의 8구 알저그룬트 루즈벨트플라츠에 있다. 레기나(Regina) 호텔의 앞이다.

 

새로 발견된 비발디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모테추마'(Motezuma)이다. 이 오페라의 대본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지만 음악은 없었는데 1930년에 피에드몽 수도원에서 음악을 발견한 것이다. 1974년 알레호 카펜티어(Alejo Carpentier)가 쓴 '바로크 콘서트'(Baroque Concert)는 바로 비발디의 오페라 '몬테추마'로부터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만큼 유명해진 오페라이다. 얘기로만 전해오던 오페라 '모테추마'가 부활하게 된 데에는 독일의 음악학자인 슈테펜 보쓰(Steffen Voss)의 헌신적인 노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2002년 2월, 보쓰는 베를린 징아카데미(Singakademie)의 장서 중에서 헨델의 칸타타를 찾다가 우연히도 비발디의 오페라 악보를 발견했다. 그것이 대본만 남아 있었던 '모테추마'였다. 돌이켜 보면, 베를린 징아카데미의 장서들은 전쟁과 함께 온갖 수난을 다 겪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소련 적군의 '전승물자 관리 여단'(Trophy Brigade)은 1945년에 스탈린이 내린 명령에 따라 독일의 문화재를 전쟁보상이라는 차원에서 가져가기 시작했고 그 중에 베를린 징아카데미의 장서도 포함되었다. 징아카데미의 장서는 키에프(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수도)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잠들어 있다가 1999년에야 발견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연맹에 가입하려는 제스추어로서 베를린 징아카데미의 장서들을 원래 소유자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비발디의 '모테추마' 악보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이 가져갔던 징아카데미의 장서 중에서 약 10%는 바하 가족의 자료들이었다.

 

비발디의 오페라 '모테추마'의 현대적 연출 장면

 

[비발디의 작품 번호]

비발디가 남긴 작품은 전부 얼마나 될까?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협주곡만 약 5백곡이며 오페라가 46편, 소나타 90편, 기타 실내악, 소나타 등이 있다. 그러므로 대략 7백여편의 작품을 남겼다고 보면 된다. 5백곡에 이르는 협주곡 중에서 바이올린을 위한 곡은 230곡이나 된다. 기타는 플륫, 바순, 첼로, 오보에, 비올라, 리코더, 류트, 만돌린 등을 위한 협주곡이다.

 

비발디의 작품번호를 말해주는 표식은 여러가지가 있다. 오푸스 넘버(Opus Number)는 비발디의 생전에 정식으로 출판된 작품들을 말한다. 그후 여러 학자들이 비발디의 작품을 정리하면서 나름대로 작품번호를 매겼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덴마크의 페터 룜(Peter Ryom: 1937-)이 정리한 것으로 RV 라고 표시한다. RV 는 Ryom-Verzeichnis(룜 페아차이히니스)라는 말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Répertoire des oeuvres d'Antonio Vivaldi 라고 한다. 혹시 RV를 Repertory Vivaldi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잘못된 표현이다. FX 라는 작품번호 표기도 있다. Istituto Italiano Antonio Vivaldi 를 설립한 안토니오 환나(Antonio Fanna)에 의한 넘버링이다. PS 라는 표기도 있다. 프랑스의 비발디 음악학자인 마르크 핀셸레(Marc Pincherle)에 의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이탈리아의 악보출판사인 리코르디(Ricordi)가 매긴 R 넘버링도 있다.

 

네덜랜드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야닌 얀센이 취입한 비발디의 '사계' 음반 커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