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슈트라우스 는 과연 나치 협조자였나?
그렇지 않으면 반나치주의자인가?
오로지 독일음악의 발전과 가족을 위해 나치 정권에 참여
종전후 독일 정부가 발행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기념 우표
나치 치하의 지식인들은 마치 우리네 지식인들이 일제치하에서 일제에 협력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놓고 논란의 대상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나치에게 협력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놓고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하여도 말들이 많았다. 나치에 협조했던 사람이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는 진정한 반나치주의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체적으로는 나치를 반대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 결론이다. 슈트라우스가 1938년에 첫 공연을 가진 오페라 '평화의 날'(Friedenstag)만 보더라도 그가 실은 나치를 반대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나치 독일에서 슈트라우스가 어떻게 지냈는지를 살펴보아서 나치협조자라고 하는 일각의 주장이 그릇된 것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발행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기념 우표
슈트라우스가 68세의 고령인 1933년에 히틀러와 나치당이 정권을 잡았다. 슈트라우스는 결코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나치당이 집회에 참석하라고 해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슈트라우스는 나치의 초기에 히틀러가 독일 문화예술을 진흥시킬 것이라는 희망으로 나치가 하는 일에 협조했었다. 히틀러는 바그너 음악의 열렬 팬이었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존경했다. 때문에 그런 사람이라면 비록 나치이지만 음악예술을 충분히 후원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슈트라우스의 며느리는 유태인이었다. 아들 프란츠가 알리스라고 하는 유태여인과 결혼하였다. 그러므로 손자들도 유태계였다. 슈트라우스는 나치 치하에서 며느리와 손주들을 보호해야 했다. 그러자면 나치에게 밉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또 하나 그가 나치에 협조적이었던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나치가 유태계라고 해서, 또는 퇴폐음악이라고 해서 금지한 말러, 멘델스존, 마이에르베르, 드빗시 등의 음악을 독일에서 보존하고 연주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나치에 협조적이어야 했다는 것이다.
타임지는 1927년과 1938년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표지에 게재하였다.
슈트라우스는 1933년에 "나는 슈트라이히(Streich)와 괴벨스(Goebbels)가 유태인들을 괴롭히고 사냥하는 것을 독일의 명예에 먹칠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능하고 게으르며 평범한 인간들이 고도로 지성적이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시기하여 저지르는 행동이다. 그런 행동은 재능이 없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무기이다." 라고 노트에 썼다. 요제프 괴벨스는 히틀러처럼 슈트라우스의 팬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슈트라우스에게 한동안 예의를 갖추고 공손히 대한 일이 있다. 나치의 최장수 선전장관이었던 괴벨스가 한동안만 슈트라우스를 존경하는 척 했던 것은 그의 일기를 보면 알수 있다. 괴벨스는 "우리가 그(슈트라우스)를 아직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 자신의 음악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와 같은 퇴폐적인 정신병 환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것이다."라면서 슈트라우스를 은근히 비난했다. 괴벨스로 대표되는 나치의 음악정책은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퇴폐적이라고 보았으며 그런 음악을 작곡한 슈트라우스를 정신병 자로 보았던 것이다. [괴벨스는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은 때부터 1945년 패전할 때까지 독일 제3제국의 선전장관이었다. 독일의 모든 예술활동은 선전장관의 산하에 있었다.]
지휘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그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1933년에 정권을 잡자 마자 선전장관 괴벨스를 통해 슈트라우스를 제국음악협회(Reichsmusikkammer)의 회장으로 임명했다. 국가의 음악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과거에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 살아왔던 슈트라우스는 정치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였지만 제국음악협회장의 직위는 받아 들였다. 결국 슈트라우스는 그것 때문에 나치에 협조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렇지만 슈트라우스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슈트라우스는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카이저 시대에도, 에버트(Ebert) 시대에도 음악을 만들며 지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도 아무 일 없이 견디어 나갈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이어 슈트라우스는 1935년에 어떤 음악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1933년 11월에 선전장관인 괴벨스는 나에게 어떤 사전 양해도 없이 나를 제국음악협회의 회장으로 임명했다. 정말이지 나와는 아무런 협의도 없었다. 나는 그 명예로운 직위를 수락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독일 음악을 아마추어 또는 명예욕에 들떠 있는 무식한 사람이 맡는다면 독일 음악이 더욱 악화되는 불행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미력하나마 그같은 불행을 방지하고 독일 음악의 발전을 위해서 무언가 좋은 일을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썼다. 슈트라우스의 진심을 읽을수 있는 구절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 1930년대초 베를린.
슈트라우스는 비록 괴벨스가 상관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괴벨스를 멸시하고 그를 '벼락출세자'(a pipsqueak)라고 불렀다.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슈트라우스는 1933년에 Das Bächlein(시냇물)이라는 오케스트라 반주의 노래를 괴벨스에게 헌정했다. 괴벨스로부터 독일 음악저작권 기간을 30년에서 50년으로 연장하는 협조를 받기 위해서였다. 슈트라우스는 나치가 드비시, 말러, 멘델스존 등의 음악을 금지하자 그같은 조치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리고 코믹 오페라인 '말 없는 부인'(Die schweigsame Frau)을 그의 유태인 친구인 슈테판 츠봐이크의 대본으로 작곡을 진행하였다. 1935년에 '말 없는 부인'이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었을 때 극장당국은 프로그램에 대본가 슈테판 츠봐이크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 유태인이기 때문이었다. 화가 난 슈트라우스는 츠봐이크의 이름이 반드시 프로그램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츠봐이크의 이름은 기재되었지만 그로 인하여 나치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이 오페라의 초연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츠봐이크 소동이 있자 무슨 이유를 대고 참석하지 않았다. '말 없는 부인'은 단 3회의 공연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제3제국에서 공식적으로 공연금지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유치한 일이었지만 나치로서는 별별 짓을 다했다. 1935년 6월 17일에 슈트라우스는 슈테판 츠봐이크에게 편지를 보내어 '당신은 내가 지금까지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행동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차르트가 '아리안인'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작곡을 했는가? 나는 사람에게는 다만 두 종류만 있다고 생각한다. 재능이 있는 사람과 재능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썼다. 그런데 나치의 게슈타포가 이 편지를 가로채어 히틀러에게 전달했다. 슈트라우스는 당장 제국음악가협회의 회장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36년의 베를린 하계 올림픽에서는 슈트라우스의 '올림픽 찬가'(Olympische Hymne)가 울려퍼졌다. 슈트라우스가 1934년에 작곡한 것이었다.
슈트라우스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위한 '올림픽 찬가'를 작곡하였다. 1934년에 작곡한 것이다.
1930년대에 슈트라우스가 나치에 협조적이었다고 비난하는 저명 음악가들이 더러 있었다. 예를 들면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였다. 토스카니니는 슈트라우스가 제국음악협회의 회장직을 수락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는 작곡가 슈트라우스 앞에서 모자를 벗는다. 하지만 슈트라우스라는 사람의 앞에서는 모자를 다시 쓴다'고 말했다. 잘 아는대로 슈트라우스가 제국음악협회의 회장직을 맡은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유태인 며느리인 알리스와 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슈트라우스의 손자 두명은 학교에서 어머니가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핍박을 받으며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슈트라우스는 관계 당국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며느리와 손자들을 강제수용로로 끌려가지 않게 했다. 그러나 나치는 집요하였다. 며느리인 알리스는 1938년부터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Garmisch-Parkenkirchen) 마을에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나마 슈트라우스가 베를린의 고관들에게 사정을 하여 며느리의 안전을 보장받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베를린의 도이체 오퍼의 감독을 지냈고 프러시아 국립극장 예술 감독을 지냈으며 바이로이트 축제의 예술감독을 맡았던 하인츠 티트옌(Heinz Tietjen)이 슈트라우스의 부탁을 성의껏 들어주어서 며느리 알리스 문제는 그나마 가택연금으로 마무리 될수 있었다. 그러나 알리스의 친정 어머니인 마리 폰 그라브(Marie von Grab)는 테레지엔슈타트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슈트라우스는 사부인인 마리 폰 그라브를 석방하기 위해서 테레지엔슈타트까지 혼자 자동차를 몰고 가서 당국자들과 논란을 벌였지만 불행하게도 데려나오지는 못했다. 알리스의 친정 어머니인 마리 폰 그라브 뿐만 아니라 친정 형제들도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슈트라우스는 이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SS에게 여러번에 걸쳐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번번히 무시당했다.
오스트리아 서쪽, 뮌헨의 동쪽에 있는 알프스 산록의 가르미슈 파르켄키르헨 마을. 1936년 동계 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다. 슈트라우스와 그의 가족들이 이곳에서 나치의 감시를 받으며 지냈다.
1942년에 슈트라우스는 가족을 데리고 비엔나로 왔다. 다행히 유태인 며느리인 알리스와 손자들은 당시 비엔나 총독인 발두르 폰 쉬라흐(Baldur von Schirach)의 배려로 보호를 받을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유태인 친척들은 어떻게 할수 없었다. 그런데 1944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슈트라우스가 70세의 노령일 때에 잠시 비엔나를 떠나 출장을 간 일이 있었다. 게슈타포는 그 때를 노렸는지 아들 프란츠와 며느리 알리스를 강제로 연행하여 이틀 밤에 걸쳐 꼬박 취조를 했다. 출장에서 급히 돌아온 슈트라우스는 이번에도 아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겨우 아들과 며느리를 집으로 데려 올수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두 사람 모두 아우슈비츠로 갔을 지도 모른다. 슈트라우스는 비엔나가 안심할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식구들을 데리고 다시 가르미슈로 돌아갔다. 슈트라우스의 가족들은 이곳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연금상태로 지냈다. 이상과 같이 이런 저런 사건들을 종합해 보면 슈트라우스가 한때 나치에 협조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나치에 적극 동조하여 북치고 장구치고 했다는 것은 아니다. 70 고령의 슈트라우스는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독일의 음악을 위해서 억지로나마 나치에 협조하는 척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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