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에 대한 에피소드
(아놀드 쇤버그)
쇤베르크가 독일을 떠나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다. 그로부터 9일후, 베를린국립음대에서 학생작곡발표회가 있었다. 작곡가 파울 그래너(Paul Graener)가 어떤 현악4중주곡에 대하여 문제를 삼았다. 상당히 진보적이고 불협화음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전통적인 방식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래너는 연주회장에 가득찬 학생들이 박수를 치는 중에 큰 소리로 '이것은 독일 예술에 대한 통탄할 작품이다'라고 선언하고 '독일 작곡가로서 수치심을 느낀다'고 까지 말했다. 그리고 연주회장을 박차고 나갔다. 몇명의 보수적인 사람들도 함께 따라나갔다. 이런 일이 있은지 며칠 후, 프러시아예술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토의가 있었다. 쇤베르크를 비롯한 몇명의 젊은 작곡가들은 예술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시도였음을 해명하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예술원장인 막스 쉴링스(Max Schillings)는 그러한 작풍이 유태인의 영향을 받아서였다고 주장했다. 쇤베르크는 회의장을 떠나면서 막스 쉴링스에게 '그런 얘기를 나에게 두번씩이나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항의하였다. 두달후, 쇤베르크는 아내 게르트루트와 어린 딸 누리아와 함께 파리에 있었다. 쇤베르크는 파울 그래너와 막스 쉴링스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가톨릭에서 유태교로 다시 개종하였다. 그해 할로윈 데이에 즈음해서 쇤베르크와 가족들은 미국에 있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
쇤베르크의 첫번째 서명
1940년에 챠우타우콰에서 여름을 보내던 쇤베르크는 어느날 딸 게르트루트와 함께 길을 산책하고 있었다. 어떤 꼬마가 다가오더니 종이를 내밀며 사인을 해 달라고 말했다. 쇤베르크는 '아, 이젠 나도 그 동안의 고생을 끝내고 유명인사가 되는가 보다'라며 기쁜 마음으로 펜을 꺼내어 사인을 하려고 했다. 그랬더니 꼬마가 '아니예요. 아저씨가 아니라 저 아줌마 말예요'라고 말하더니 게르트루트에게 사인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게르트루트는 바로 그전날 마을 탁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바 있었다. 게르트루트(거트루트)는 알렉산더 쳄린스키의 여동생인 마틸데의 딸이다.
게르트루트 쇤베르크
어렵지만 재미있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어렵다. 그런데 어떤 작품은 대단히 멜로디적이다. 브람스의 멜로디를 사용한 것이다. 브람스의 G 단조 피아노 4중주곡을 변형한 것으로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의 제안에 의해 작곡한 것이다. 클렘페러는 이 곡을 1938년 로스 안젤레스 필하모닉과 함께 초연하였다. 연주회가 끝난후, 오케스트라 매니저는 클렘페러에게 '사람들이 쇤베르크의 음악에는 멜로디가 없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이 음악은 아주 멜로디적이잖아요'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어렵다고 하지만 실은 재미있었다는 얘기였다.
오토 클렘페러
쉬르머가 천국에 가다
마틸데 쇤버그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인 쇤베르크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특히 음악출판가들이 그러했다. 쇤베르크가 세상을 떠난 후 미망인인 마틸데는 쇤베르크에 대한 관리를 하느라고 바뻤다. 특히 '모세아 아론'을 출판한 독일의 어떤 출판사와의 관계가 그러했다. '모세와 아론'은 너무 난해하여서 출판사에서 악보가 나온지 20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공연된 일이 없었다. 1954년에 함부르크 방송국이 콘서트 형식의 연주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마틸데가 너무 많은 액수의 사용료를 요구하는 바람에 난항을 겪게 되었다. 너무 어려운 작품이므로 연주하지 말자는 주장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 함부르크 방송국은 게르트루트에게 돈을 치루었다.
마틸데가 쉬르머(Gustav Schirmer: 1829-1893)를 알고 지낸 것은 그로서 잊지 못할 일이었다. 세계적인 음악출판가인 쉬르머는 쇤베르크가 미국에 온 후 그의 작품을 도맡아서 출판해 온 사람이었다. 1951년 어느날, 마틸데가 쉬르머의 뉴욕 사무실에 나타나서 쉬르머 출판사가 남편의 음악을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틸데는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쇤베르크의 어떤 음악들이 쉬르머의 로스안젤레스 판매소에 진열되어 있단 말입니까? 없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이 헬싱키에서 연주될 때에 쉬르머는 오케스트라 파트의 악보를 제시간에 맞추어 보냈나요? 그런 일이 없습니다. 뉴욕에 있는 쉬르머의 본사 윈도우에는 어떤 포스터가 걸려 있는가요? 쇤베르크입니까? 아니올시다. 20세기 최고의 작곡가인 쇤베르크의 악보는 단 한번이라도 쉬르머 회사의 진열장에 전시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음악이 선전되었을까요? 뮤지컬 '왕과 나'의 스코어가 선전되었을 뿐입니다. 도대체 쉬르머씨는 이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수 있다는 말입니까?" 마틸데의 언성은 높아만 갔다.
쉬르머도 할 말은 있었다. 쉬르머는 예전부터 쇤베르크의 부인인 마틸데에 대하여 별로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말이 많고 성질이 급하고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쉬르머는 특히 마틸데가 남편의 업적을 앞세워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 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마담! 우리도 당신의 남편을 위해서 할만큼 다 했습니다. 하나하나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장부에는 빨간 잉크만 적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실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틸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보세요. 쉬르머씨.언젠가 당신도 죽을 겁니다. 천국에 올라가서 문을 두드리겠지요. 베드로가 나와서 당신은 누구이며 무얼 원하는지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서 게르트루트는 마치 회사의 사장이나 된 듯한 자세로 '아마 당신은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나로 말하자면 위대한 쉬르머올시다. 나는 음악출판사 사장으로서 여러 곳에 상점을 가지고 있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면 베드로가 당신을 바라보고 '저 아래 지옥으로 가시오'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면 당신은 '아니, 저는 쇤베르크의 음악을 출판하느라고 손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하겠지요." 이렇게 말한 마틸데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 베드로께서 '아니, 쇤베르크의 음악을 출판하느라고 손해를 보셨다구요?'라고 확인한 후에 옆으로 비켜 서면서 당신을 위해 천국문을 여시겠지요."라고 말하고 마치 베드로가 쉬르머를 천국으로 안내하듯이 손을 내저었다. 이 말을 들은 쉬르머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정말로 죽을상이 되어 있었다.
마틸데 쇤버그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 오페라 작곡가 일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행하게 생애를 마친 비발디 (0) | 2011.09.07 |
---|---|
로시니는 왜 한창 때에 작곡을 그만두었는가? (0) | 2011.08.31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 2 (0) | 2010.10.26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 1 (0) | 2010.10.25 |
자코모 푸치니 (0) | 2010.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