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 작곡가 일화

로시니는 왜 한창 때에 작곡을 그만두었는가?

정준극 2011. 8. 31. 20:49

로시니는 왜 한창 때에 작곡을 그만두었는가?

 

청년시절의 로시니

 

로시니는 거의 80세까지 장수하였다. 정확히는 7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40세도 안된 한창 나이에 작곡에서 손을 떼고 두문불출하였다. 정확히는 37세에 작곡에서 손을 놓았다. 왜 그랬을까? 여러 이론이 있다. 심신이 피곤해서 그랬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가하면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작곡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과식을 하여 건강이 나빠져서 그랬다는 주장도 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로시니 반대주의자들은 로시니가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작곡으로 돈을 벌 필요가 없어서 작곡을 중단했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순전히 그가 게을러서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주장을 폈다. 잘 알다시피 로시니는 1829년 그의 59번째 오페라인 '귀욤 텔'(Guillaume Tell)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다. 수정본을 제외하면 로시니의 오페라는 모두 39편이 된다. 아무튼 그때 로시니의 나이는 37세 였으니 정말로 한창 때였다. 1829년에 '귀욤 텔'이 파리에서 공연되었을 때 로시니는 이미 활력이 넘치는 코미디인 '세빌리아의 이발사'(1816), '라 체네렌톨라'(1816), 그리고 아름다운 비극인 '호수의 여인'(La donna del lago), '오텔로'(Otello)를 창조한 위대한 작곡가로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한 장면. 음악선생으로 변장한 알마비바 백작이 로지나의 후견인인 바르톨로와 다투고 있다. 하여튼 기가막히게 코믹한 오페라이다.

 

1824년에 슈텐달(Stendhal)이라는 사람은 '지난 12년간 모스크바에서 나폴리까지, 런던에서 비엔나까지, 파리에서 캘커타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인물중 로시니만큼 자주 오르내린 사람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로시니는 널리 알려진 작곡가였다. 그때 로시니는 불과 32세의 나이였다. 1822년, 당시 30세의 젊은 로시니는 그때 51세였던 베토벤을 만날수 있었다. 로시니로서는 가장 존경하는 베토벤을 비로소 만나게 되어 감격스러운 입장이었다. 당시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아서인지 성질이 난폭한 편이었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이 위대한 작곡가의 건강은 계속 나빠지고 있었다. 로시니와 베토벤은 필답으로 대화를 진행하였다. 베토벤은 '아, 로시니, 그대가 바로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작곡한 사람이구려. 축하하오.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존재하는 한 공연될 것이오. 오페라 부파를 작곡하시오. 다른 것은 작곡하지 않아도 좋소. 다른 스타일의 오페라를 작곡한다면 그대의 천성을 거슬르는 행동일 것이오'라고 썼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한 로시니에게 참으로 기이한 일이 생겼다. 로시니는 '귀욤 텔'을 작곡하고 나서 40년을 더 살았지만 단 한편의 작품도 쓰지 않았다.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이런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작곡가들, 예를 들면 엘가, 라흐마니노프, 시벨리우스, 챨스 아이브스 등도 세상을 떠나기 오래 전에 은퇴하였다. 그러나 젊을 시절에 로시니만큼 유명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늙어서도 심심하면 작곡을 했다. 로시니의 이력은 어떻게 되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로시니는 1792년 페사로에서 태어났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였다. 아버지는 페사로 악단에서 트럼펫과 혼을 불어서 생활비를 마련했다. 어머니는 상당히 재능있는 소프라노였으나 무대기회가 거의 없었다. 로시니는 어릴 때부터 놀라운 음악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로시니는 18세 때인 1810년, 첫 히트작인 '결혼계약서'(La Cambiale di Matrimonio)를 발표하였다. 로시니의 다른 오페라들과 마찬가지로 '결혼계약서'도 대본은 멋이 없는 흔한 내용이었지만 그의 음악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것이었다.

 

로시니의 첫 오페라인 '결혼계약서'의 피날레. 역시 말할수 없이 재미있는 오페라이다.

 

19세기 초에 있어서 이탈리아에서는 관찮은 오페라가 나오면 금방 전국에 전파되어서 박수를 받았다. 성공을 거둔 오페라의 아리아는 초연이 있었던 다음날부터 사람들이 거리에서 흥얼거릴 정도로 오페라에 대한 관심은 컸다. 로시니는 1년에도 몇 편씩의 오페라를 발표했다. 거의 모두 대성공이었다. 로시니의 인기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들은 당장 거리에서 울려퍼질 정도였다. 예를 들면 1813년에 내 놓은 '탄크레디'의 아리아인 Di Tanti Palpiti (이렇게 가슴이 설레이다니)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노래가 되었고 로시니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어 로시니는 그해에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을 발표했다. 역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어 '이탈리아의 터키인'도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1816년에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나왔다. 사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로시니는 세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탄크레디'의 귀환 장면

                  

로시니는 스페인 출신의 카리스마에 넘친 소프라노인 이사벨라 콜브란과 결혼하였다. 그후로부터 로시니의 작품 성향은 콜브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코믹에서 그랜드한 오페라 세리아로 변천하였다. 사람들은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같은 코믹하고 풍자적인 오페라를 원했지만 로시니는 어두운 오페라에 마음을 두기 시작했다. 로시니의 무겁고 어두운 오페라들은 예상을 깨고 대인기를 끌었다. 특히 파리에서 그랬다. '호수의 부인'은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귀욤 텔'은 그랜드 오페라인데도 불구하고 미지근한 반응을 받았다. 로시니는 실망했다. 그리고 '귀욤 텔'의 초연으로부터 석 달후에 로시니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로시니가 그렇게 빨리 이탈리아로 돌아갈줄 몰랐다. 그런데 사실 '귀욤 텔'은 실패한 것도 아니었다. 로시니를 비판하는 관객의 일부가 박수를 치지 않았을 뿐, 르 글로우브(Le Globe)와 같은 유력 신문들은 '프랑스 음악계뿐만 아니라 세계의 음악을 위해 새로운 시대를 연 작품이다'라며 찬사를 보낸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귀욤 텔'(구글리엘모 텔)의 한 장면. 1997 페사로 로시니 페스티벌

 

그러한 로시니가 어찌하여 한창 시절에 작곡에서 손을 떼었는지는에 대하여는 아무도 그 이유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로시니는 그가 28세 때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이 30이 되면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겠다'고 표명한바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로시니는 이미 젊은 나이에 은퇴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로시니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로시니 연구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는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아도 좋기 때문에 그만 둔 것이며 한편으로는 더 이상 작곡해 보았자 그때까지 작곡한 작품보다 더 훌륭한 오페라를 쓸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그만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로시니에게 있어서는 '박수를 받을 때에 물러나야 한다'는 옛 말씀이 거짓이 아니었다.

 

스페인 출신의 소프라노 이사벨라 콜브란. 훗날 로시니의 부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