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코와 반제티(Sacco and Vanzetti)
Anton Coppola(안톤 코폴라)의 장편 그랜드 오페라
미국 역사상 초유의 사법살인이라는 사건을 오페라로 표현
안톤 코폴라(1917-)
미국의 보통 사람들에게 금세기에 있었던 가장 유명한 재판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O.J. Simpson에 대한 재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1900년대 초반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Sacco and Vanzetti 재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만큼 미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재판이었다. 페르디난도 니콜라 사코(Ferdinando Nicola Sacco: 1891-1927)과 바르톨로메오 반제티(Bartolomeo Vanzetti: 1888-1927)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온 무정부주의자들이다. 두 사람은 1920년에 매사추세츠주 사우스 브레인트리(South Braintree)에서 백주에 강도를 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구두상점의 경리직원과 경비원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고 재판을 받아 1927년 8월 23일 전기의자에서 처형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한 재판과정에서부터 과연 두 사람이 그러한 살인을 저질렀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탈리아인 반대 분위기, 이민주의자 반대 분위기, 그리고 무정부주의자 반대 분위기에 편승되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불붙듯이 일어났다. '사코와 반제티 위원회'라는 시민단체가 구성되어 이들의 무죄를 강력히 주장했다. 당시 미국의 지도적 인사들도 편파적인 재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미국 대법원의 대법관인 펠릭스 프랑크푸르터(Felix Frankfurter: 1882-1965), 미국의 지성이라고 하는 작가 업튼 싱클레어(Upton Sinclair: 1878-1968)도 '사코와 반제티' 재판의 부당함을 들어 시민운동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의 주장도 두 사람에 대한 판결을 번복하지는 못했다. 이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자 사법당국에 대한 비난여론을 걷잡을수 없이 확대되었다. 뉴욕에서는 대규모 반대집회가 열렸고 이어 런던, 암스텔담, 토쿄에서도 반대시위가 있었고 저 멀리 남미에서도 노동자들의 폭력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폭동과 같은 시위는 파리, 제네바, 독일, 요한네스버그에서도 일어났다. 미국의 소도시에서 있었던 이 사건이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다.
콘서트형식의 '사코와 반제티' 공연. 메모리얼 데이의 합창
사코와 반제티가 처형된 날로부터 꼭 50년 후인 1977년 8월 23일, 매사추세츠주 지사인 마이클 듀카키스(Michael Dukakis)는 '앞으로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의 이름으로부터 오명과 불명예는 영원히 제거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듀카키스 주지사는 '우리는 이 두사람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도 자부심을 갖고 있던 매사추세츠주의 정의가 사코와 반제티에 대하여는 실패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듀카키스 주지사는 이제 두 사람을 사면하고 싶으나 현행 매사추세츠주의 법률이 이를 허용하지 않으므로 어찌할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쨋든 이 케이스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아직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무죄라는 주장과 유죄라는 주장이 서로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첨단 탄도학을 적용하고 증거를 잘못 취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개인들의 증언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단정을 지을수는 없는 것이 이 사건이다. 다만, 작금의 대체적인 정세는 이 두사람이 무정부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 좌익세력 타파라는 사회적 분위기에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탈리아계 저명한 오페라 지휘자이며 작곡가인 안톤 코폴라(Anton Coppola: 1917-)는 '사코와 반제티'의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기로 했다. 안톤 코폴라는 유명한 영화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여배우 탈리아 샤이어의 삼촌이며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의 종조부에 해당한다. 코폴라는 사코와 반제티의 재판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 얘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코폴라는 1999년에 사코와 반제티의 이야기를 오페라로 완성했다. 서곡과 2막 14장으로 구성된 오페라 '사코와 반제티'는 2001년 3월 16일 탐파 오페라단이 세계 초연했다. 코폴라가 직접 초연을 지휘했다. 당시 코폴라는 83세였다. '사코와 반제티'의 음악은 다양함을 보여주고 있다. '베니스의 카니발'과 같은 이탈리아 민요가 나오는가 하면 현대 전자음악이 등장한다. 또한 1920년대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연상케 하는 음악이 나오는가 하면 차이코브스키의 절망적인 음악도 등장한다. 그리고 간혹 비명소리도 들린다. 특히 오페라의 마지막에 두 사람이 처형되는 장면에서의 비명소리는 잔혹하리만치 효과적이다. 결론적으로 음악과 무대연출은 폭력과 죽음의 콜라쥬를 강조한 것이다. 무대 출연자만 해도 백여명이 넘으며 주요 배역만해도 20명이 넘는다. 대합창단이 등장하며 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엑스트라의 규모도 대단하다. 너무나 출연자가 많기 때문에 끝나고 나서 코폴라가 무대인사를 할 때에는 마땅히 서 있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코폴라는 장내를 메운 2천 4백명의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처형당하기 직전의 사코와 반제티
또 하나의 오페라 '사코와 반제티'가 있다. 마크 블리츠슈타인(Marc Blitzstein: 1905-1964)이 포드재단의 위촉을 받아 작곡한 3막의 '사코와 반제티'이다. 1960년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될 예정이었으나 블리츠슈타인의 건강악화로 지연되었다. 그러다가 블리츠슈타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오페라는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이를 레오나드 레르만(Leonard Lehrman)이 완성하여 2001년 8월 17일 코네티컷주의 웨스트포트에 있는 화이트 반 극장(White Barn Theater)에서 콘서트 형식으로 초연되었다. 레르만이 피아노도 연주하면 앙상블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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