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와 여인들

오펜바흐와 코라 펄(Cora Pearl)

정준극 2011. 11. 5. 19:17

오펜바흐와 코라 펄(Cora Pearl)

 

코라 펄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레타는 대부분 이른바 데미몽드(Demimonde)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데미몽드는 쾌락적인 생활스타일을 추구하는 부유층 한량들을 말한다. 데미몽드는 프랑스 나폴레옹 3세 치하인 제2제국의 특징이기도 했다. 데미몽드인 부유한 귀족 층들은 공공연히 정부(情婦)를 두고 생활하는 일들이 많았다. 어떤 여인들은 스스로 고급창녀가 되어 환락적인 생활을 즐겼다.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아들)의 소설인 Le Demi-Monde 는 당시 파리 상류사회에서의 도덕적 해이와 환락적 생활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는 저 유명한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élias)의 작가이기도 하다. '동백꽃 여인'은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바탕인 된 작품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주인공인 비올레타 발레리는 19세기 프랑스 데미몽드를 상징하는 유명한 고급창녀였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유명한 고급창녀가 있었으니 영국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코라 펄(Cora Pearl: 1835-1886)이다. 코라 펄은 재능이 뛰어난 소프라노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에도 몇번 출연했다. 예를 들면 1867년 '지옥에 간 오르페오'에서 큐피드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래서 더욱 유명해졌다. 코라 펄은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작곡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마치 환락적인 생활 스타일을 추구하는 코라 펄과 닮은 듯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여인들이 무조건적인 환락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지성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재치와 유머가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의 소설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élias)의 여주인공인 마게리트 고티에의 역할을 맡아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배우 엘레오노라 뒤스

 

코라 펄은 태어나기는 런던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플리마우스(Plymouth)로 이사와서 살았기 때문에 플리마우스가 고향이나 마찬가지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엠마 엘리자베스 크라우치(Emma Elizabeth Crouch)였다. 그의 생일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다. 1842년 2월 23일이라고 하지만 위조된 것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주장이다. 코라 펄의 아버지는 첼리스트 겸 작곡가인 프레데릭 니콜스 크라우치(Frederick Nicholls Crouch: 1808-1896)이다. 코라 펄이 14세 때에 가족들을 영국에 남겨 두고 단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버지니아에 정착하여 새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다. 코라 펄의 어머니는 코라 펄을 프랑스 북부의 불로뉴(Boulogne)에 있는 수녀원학교에 보냈다. 코라 펄은 8년 동안을 수녀원 학교에서 보냈다. 런던으로 돌아온 코라 펄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지만 마땅하지 않았다. 코라 펄은 어찌하다가 몇 번 매춘을 하였다. 그때 몇 사람의 돈 많은 남자들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코라 펄과 단지 하루밤 재미로 지내기 보다는 계속 관계를 맺고 지내기를 원했다. 돈많은 남자들이 원한 여자는 예쁘고 사교성이 있으며 지성적이고 위트가 있으며 신뢰할수 있는 여자였다. 코라 펄은 그러한 범주에 들어 맞았다. 이로써 코라 펄은 런던 사교계에서 알아주는 고급 창녀가 되었다.

 

20대 후반의 코라 펄

               

코라 펄은 당시 런던의 유명한 무도회장 겸 사교장인 아르길 룸스(Argyll Rooms)의 주인인 로버트 비그넬(Robert Bignell)이란 사람의 정부가 되었다. 어느때 두 사람은 파리로 여행을 간 일이 있다. 프랑스의 시골 수녀원 학교에서 답답하게 지낸 경험이 있는 코라 펄은 파리에서 파리의 분방하고 환락적인 생활 스타일이 당장 매료되었다. 코라 펄은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고 파리에 남아서 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이름도 비로소 코라 펄이라고 바꾸었다. 코라 펄은 극장에 취직하여 배우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라 펄의 경력은 섹스 어필로서 더 성공하였다. 참으로 다른 어느 재능보다도 뛰어난 섹스 어필 재능이었다. 코라는 예전에 수녀원 학교에 다니면서 엄격한 예의범절을 배웠다. 그것이 그의 경력에 기막힌 자산이 되었다. 코라는 파리의 사교계에서 예의 바르고 지성적이며 예술적 재능을 겸비한 여인으로서 주가를 높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극장에서 연극이나 오페레타에 출연이라도 할 것 같으면 그 작품은 대히트를 기록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얼마 가지 않아서 코라는 파리에서도 알아주는 부자집 사람들 몇명과 로맨틱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코라는 가진 돈은 없었지만 샤를르 프레데릭 워스 또는 라페리에르(Laferriere)의 레벨이 붙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은 코라의 철학이었다. 옷을 잘 입어야 돈 많은 남자들의 관심을 끌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코라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리볼리(Rivoli) 공작이라는 사람이 코라의 첫번째 후원자가 되었다. 말이 후원자(Benefactor)이지 실은 정부였고 나쁘게 말하면 기둥서방이었다. 그런데 코라는 리볼리 공작과 살면서 또 다른 취미를 개발하였으니 즉 도박이었다. 도박은 마약과 같아서 손을 떼지를 못하였다. 결국 공작은 코라와의 관계를 끊을수 밖에 없었다. 코라는 다른 후원자를 모색하였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을 정부로 두고 활약키로 했다. 유럽에서도 이름난 부자들과 권세가들이 코라의 대상이었다.

 

당시 대단히 숙련된 기술자의 하루 일당은 4 프랑이었다. 그런데 코라 펄은 하루 밤에 5천 프랑을 벌었다. 그렇게 하여 돈이 많다보니 별별 특별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저녁 손님들을 초대하여 난초 꽃으로 카핏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누드로 춤을 추질 않나 순은으로 만든 욕조에 샴펜을 넘치도록 부어넣고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목욕을 하질 않나...코라 펄은 비록 불로뉴의 수녀원 학교에서 8년을 보냈지만 프랑스어가 익숙치 않았다. 영어 스타일의 프랑스어를 말했다. 이를 Cockney French 라고 한다. 만일 보통 사람이 카크니 프렌치 스타일로 말한다면 조소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코라 펄이 그런 스타일로 말하면 사람들은 그것도 매력으로 보았다.

 

파리에서 연극에 출연할 당시의 코라 펄            

 

1982년에 코라의 비망록(Memoirs)가 발견되었다. 독일의 어떤 수집가의 손에 들어간 것이 그라나다 출판사에서 교섭하여 책으로 발간했다. 제목은 The Memoirs of Cora: The Erotic Reminischences of a Flamboyant 19th Century Courtesan 이었다. 코라 펄이 소녀시절부터 경험한 섹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그림과 함께 들어 있는 책이다. 그리고 나중에 파리의 고급창녀가 되고 나서 여러가지 색다른 취미 생활에 대한 설명도 들어 있다. 예를 들면 저녁 모임에서 누드의 코라가 아이스크림을 몸에 덮고 디저트로 등장하여 저녁 손님들이 모두 마음 내키는 대로 먹도록 했다는 얘기도 있다.

 

코라의 애인으로서는 네덜란드 윌렴 3세의 아들인 오렌지공 윌렴, 나폴레옹의 위대한 장군이었던 요아힘 무라(Joachim Murat)의 손자인 아킬레 무라 왕자, 나폴레옹 3세 황제의 이복 동생인 모르니(Morny) 공작 등이다. 이들은 모두 돈이 많고 권세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코라는 모르니 공작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곧이어 나폴레옹 3세의 사촌인 나폴레옹 공자의 애인이 되어 부를 누렸다. 그때 코라는 파리에 두채의 저택을 사서 생각나는대로 왔다갔다 하면서 지냈다. 아무튼 코라는 애정행각으로 인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할수 있었다. 1860년대 말에 코라는 이미 몇 채의 저택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마굿간도 별도로 가지고 있었고 수많은 값비싼 의상과 보석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때 파리에서 란제리 한벌을 샀는데 청구서는 놀랍게도 1만 8천 파운드였다고 한다. 오늘날의 값으로 따지면 약 5천만원이 넘는 것이었다. 코라의 사치는 어찌나 극에 달하였는지 식당에서 오물렛을 시키면 그 안에 다이아몬드를 넣어 장식을 했다고 한다.

 

알렉산더 뒤발이라고 하는 부자가 있었다. 코라를 무척 좋아해서 줄곳 따라다녔지만 코라는 마음을 주는 척 하면서도 다른 남자와 사귀었다. 그 사실을 안 뒤발이라는 사람은 질투심에 불타서 가방에 돈을 가득 넣고 와서 코라의 면전에 뿌려주었다. 코라가 관계를 끊으려 했지만 뒤발은 그러질 못했다. 결국 뒤발은 코라의 집을 찾아와서 코라의 방 앞에서 권총을 쏘아 자살하려 했으나 중상만 입고 성공하지 못했던 일도 있었다.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지만 코라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앰뷸런스를 부르거나 상처를 치료해 주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고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에 코라에 대한 여러 악평들이 퍼지자 코라가 관계하던 극장은 당장 코라와의 계약을 끊었다.

 

코라는 런던으로 도망치듯 돌아왔다. 분위기가 바뀌면 모든 것이 새로 바뀔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코라에 대한 소문은 코라가 탄 배보다도 더 빨리 런던에 도착했다. 코라는 런던에서도 파리와 마찬가지로 고급창녀로서 활동코자 했다. 돈 많은 사람들의 애인이 되어 섹스를 제공하는 대신 부유한 생활을 계속코자 했다. 하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돈 많은 사람들은 그저 파티에서 얘기나 나누는 사이로 지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실망한 코라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말 파리는 변해 있었다. 과거에 코라를 그렇게도 숭모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찾을수가 없었다. 사회에는 새로운 보수주의가 등장했다. 돈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제는 한물 간 코라를 챙겨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코라의 도박벽은 다시 살아났다. 카지노와 식당, 의상실, 보석상 등에서는 외상이란 것이 일체 없었다. 과거에는 코라에게 모두 외상을 주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몇 군데에서는 아직도 외상을 주었지만 어떤 후원자도 코라의 외상을 갚아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1876년쯤해서 코라는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팔아버리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팔아버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돈이 궁해진 코라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돈을 구하기 위해 다시 몸을 팔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서 거의 10년 동안을 그럭저럭 지냈다. 1886년에 코라의 자서전이 출판되어 반짝 관심을 끄는 듯 했으나 번역본이나 재판이 출판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1886년에 코라는 장암에 걸렸다. 코라의 살림은 점점 궁핍해졌다. 몇채나 되던 저택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도박 빚을 갚느라고 거의 모든 재산을 탕진했다. 코라는 겨우 남은 아파트도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서 그 아파트의 아랫층에 겨우 방하나를 차지하고 지내게 되었다. 코라는 이 작은 방에서 1886년 7월 8일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31세였다. 파리와 런던의 신문에 부고가 게재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코라의 세간들을 이틀 동안 세일하였다. 코라는 바티뇰르(Batignolles) 공동묘지에 비석도 없이 묻혔다. 4열 10번째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