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와 여인들

마스카니와 안나 롤리(Anna Lolli)

정준극 2011. 10. 27. 09:54

마스카니와 안나 롤리(Anna Lolli)

 

안나 롤리

 

인기집중의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피에트로 마스카니(1863-1945)도 누가 이탈리아 남자가 아니랄까봐 여성편력이 복잡하다. 좋게 말하면 로맨틱한 남자이며 그저 그렇게 말하면 바람둥이이다. 그의 결혼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스카니는 1889년 2월 3일, 애칭이 리나(Lina)라고 하는 아르제니데 마르첼리나 카르보냐니(Argenide Marcellina Carbognani)와 결혼했다. 마스카니가 26세의 청년일 때였다. 결혼식을 올린 다음날, 아들 도메니코 마스카니가 태어났다. 마스카니는 태어난 아기가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푸치니의 '라 보엠'을 생각하여 미미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리고 석달후에 마스카니는 걸작인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손초네단막오페라경연대회에 출품하여 1등을 차지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오페라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고 이어 이듬해인 1890년 5월에 로마의 코스탄치극장(Teatro Costanzi)에서 초연을 갖는 것과 동시에 마스카니의 이름도 널리 알려지게 되자 그는 리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런 행운들이 찾아온 것이라며 리나를 무척이나 위했다. 더구나 남들은 결혼후 거의 10개월을 기다려야 자녀를 가질수 있는데 마스카니는 결혼식을 올린 다음날, 부인이 아들을 낳아 주었으니 비록 속도위반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복된 일이었다.

 

피에트로 마스카니

 

마스카니가 리나와 만난 사연은 분명치 않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마스카니가 1886년에 오페라 흥행가인 루이지 마레스카(Luigi Maresca)를 만나 함께 일하기로 하고 그해 12월에 마레스카 오페라단과 합류하기 위해 체리뇰라(Cerignola)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리나와 함께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때만해도 물론 마스카니와 리나는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동거를 시작했으며 그로부터 3년후인 1889년에 사정이 급하여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체리뇰라에 온 마스카니는 마레스카 오페라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였는데 마침 체리뇰라의 시장이 '기왕이면 체리뇰라에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으면 좋겠다'고 간청하는 바람에 잘 되었다고 싶어서 마레스카 오페라단을 떠나 체리뇰라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했다. 마스카니는 체리뇰라에서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그러므로 체리뇰라는 마스카니로서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체리뇰라는 나폴리 남쪽 포지아(Foggia)지방의 도시로서 도시의 면적으로만 보면 이탈리아에서 로마와 라벤나에 이어 세번째로 큰 곳이다.

 

체리뇰라 시가

                             

마스카니는 생기기도 그럴듯하게 생겼지만 멋쟁이이기도 했다.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푸치니보다는 조금 덜 생겼고 멋부리는 것에 있어서도 푸치니보다 한수 아래라고 할수 있으나 어쨋든 상당한 멋쟁이여서 부인네들이 줄을 서서 따라 다닐 정도였다. 일례를 들어서 마스카니는 항상 빳빳하게 풀을 먹인 와이셔츠 칼라를 입고 다녔다. 그의 목에는 언제나 하얀 칼라가 둘러져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게다가 숱이 많은 머리 모습은 마치 백수의 제왕인 사자가 위엄에 찬 갈기를 자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밝은 색의 레그혼(이탈리아의 밀짚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도 참으로 멋져 보였다. 그래서 나이를 불문하고 여인네들은 마에스트로 마스카니에 대하여 열광하였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할머니들은 손자들에게 '내가 당시에 마스카니씨를 얼마나 좋아해서 따라다녔는지 모른다. 마스카니씨의 사진을 한장이라도 구하기 위해 몇번이나 편지를 보낸 일도 있단다.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수 있을 정도이다.

 

피에트로 마스카니

                                       

마스카니는 잘 생겼다. 일반적인 표현으로 말해서 몸이 잘 빠졌다. 건장한 체격이었다. 머리는 숱이 많았고 파도치듯 약간 곱슬이었다. 말솜씨는 솔직하였으며 남과 얘기를 나눌때는 뚫어질듯 바라보는 눈빛이 강렬했다. 마스카니는 의상에 있어서도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성적인 스타일이라는 것은 아니다. 대단히 남성적이었다. 그러므로 마스카니가 생애를 통하여 여러 여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남성적인 성격, 강한 인상, 설득력있는 말솜씨...이런 것들 때문에 실은 그의 부인 리나도 마스카니가 다른 여자와 놀아나고 있다는 증거를 확보하고 항의를 했지만 '그런 일이란 있을 수 없다. 나에겐 당신 밖에 없도다'라고 그럴듯하게 말하는 바람에 별로 다투지도 못하고 설득을 당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한때는 호주의 소프라노인 넬리 멜바(Nellie Melba)와 사귀는 사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멜바가 이탈리아로 와서 사귄 것이 아니라 마스카니가 런던을 방문 했을 때 서로 친하게 지냈다는 것이다. 1893년의 일이었다. 그때 마스카니는 그의 오페라 I Rantzu(란차우 가족)의 런던 초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초연에서는 넬리 멜바가 타이틀 롤을 맡았고 마스카니가 지휘를 맡았다. 이후로 멜바라는 이름은 마스카니의 가족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나도는 것이 되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어느날 부인 리나와 딸 에미(Emy)와 에미의 아들(마스카니의 외손자) 부비(Bubi)가 어느 호텔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할아버지인 마스카니처럼 단 것을 좋아하는 부비가 웨이터에게 디저트 메뉴로서 무엇이 있느냐고 묻자 웨이터는 '아이스크림으로서는 멜바 컵(Melba Cup)이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리나가 한마디 붙이기를 '부비야, 멜바 컵이라는 이름은 너의 할아버지가 데리고 놀던 여자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란다. 알겠니?'라고 설명해 주었다. 잠시후 마스카니가 도착했다. 마스카니는 점심에 늦게 왔기 때문에 식사는 할 시간이 없으므로 곧장 후식(디저트)를 주문했다. 그러자 손자 부비가 누가 묻기도 전에 재빨리 '하부지, 지금은 아누치아(Annuccia) 컵 밖에 없다고 해요.'라고 말했다. 아누치아는 부비도 잘 알고 있던 할아버지 마스카니의 친구인 대본가였다.

 

넬리 멜바. 그는 2개 반 옥타브의 음역을 지닌 소프라노였다.

 

안나 롤리라는 이름은 마스카니의 생애에서 잊을수 없는 것이다. 안나 롤리는 1910년부터 1945년, 마스카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스카니가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이다. 마스카니는 실로 35년 동안 리나와 안나 사이에서 두 집 살림을 하였다. 처음에는 마스카니의 부인인 리나도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세상에 비밀이란 것은 없어서 결국 얼마후에는 남편 마스카니가 또 바람병이 도져서 안나 롤리라는 여자와 사귀고 있다고 단순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사이가 아니었다. 안나 롤리는 마스카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35년간을 정신적인 반려자로 존재했던 여인이었다. 마스카니가 로마에서 혼자 지낼 때에 안나 롤리는 마스카니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서 로마로 이사를 왔다. 안나 롤리는 마스카니가 보내는 편지와 가끔씩의 방문으로 위로를 삼고 지냈다. 안나 롤리는 마스카니에게 있어서 훌륭한 조언자이며 자문이었다. 마스카니가 안나 롤리를 처음 만났을 때인 1910년에 안나 롤리는 22세였고 마스카니는 47세였다. 그러나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생각으로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마음을 나누었다. 

                                   

마스카니는 에밀리아 로마냐(Emilia Romagna) 지방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마음이 약해지는 습관이 있다. 부인인 리나가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의 파르마 출신이기도 했지만 안나 롤리가 로마냐의 바냐라(Bagnara) 출신이기 때문이다. 안나 롤리는 어떤 합창단의 단원이었다. 목소리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마스카니는 어느날 사람들에게 안나 롤리에 대하여 '아름다운 여자다. 얼굴이 평화스럽다. 하지만 입술은 육감적이며 두개의 커다란 녹색 눈동자는 참으로 매력적이다'라고 말했다. 로마냐 지방의 바나라 마을에는 성당 신부관의 옆에 작은 박물관이 하나 있다. 마스카니가 35년 동안 안나 롤리와 교제를 하면서 보낸 사랑의 편지가 무려 5천여 통이나 보관되어 있다. 안나 롤리에 대한 마스카니의 열정과 따듯함과 강한 의지는 그의 오페라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것이었다. 안나 롤리는 35년간 마스카니와 교제하면서 단 몇개월동안 마스카니와 같은 집에서 지낸 일이 있다. 그것은 마스카니가 오페라 '파리시나'(Parisina)를 작곡하고 있을 때였다. 마스카니는 자기 집에서 '파리시나'을 작곡하고 있었으나 부인 리나가 안나 롤리와의 관계를 더 이상 묵과할수 없다고 하며 마스카니를 집에서 쫓아 냈을 때 함께 지냈다. 하지만 유명한 대본가인 가브리엘레 다누치오, 그리고 마스카니의 딸 에미와 함께 일하면서 지냈으므로 이른바 애정의 도피라느니 하는 말은 해당되지 않는다. 딸 에미는 아버지와 안나 롤리의 관계를 오히려 존중하여 어머니편에 서지 않고 아버지 편에 섰다. 아무튼 마스카니가 집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오페라 '파리시나'는 예정보다 훨씬 늦게 완성되었다. 마스카니는 오페라 '이사보'(Isabeau)와 '파리시나'를 안나 롤리에게 헌정하였다.

 

안나 롤리에게 헌정한 마스카니의 오페라 '이사보'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