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와 여인들

하이든의 10년 애인 루이지아 폴첼리(Luigia Polzelli)

정준극 2011. 8. 6. 16:52

하이든의 비밀 애인

메조소프라노 루이지아 폴첼리(Luigia Polzelli) 이야기

 

훌륭한 인품과 독실한 신앙심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은 하이든

  

하이든이라고 하면 우선 점잖고 신앙심이 깊어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이든의 애칭인 '파파 하이든'(Papa Haydn)이라는 표현만 보더라도 인자하고 사랑에 넘친 사람이라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그런 그가 결혼하여 부인이 있는 유부남으로서 무려 10 년이 넘도록 비밀 애인을 두고 2중 생활을 하였으며 더구나 두어명의 숨겨놓은 자녀까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이든의 비밀 애인은 결혼하여 남편과 아들까지 둔 유부녀였다. 이탈리아 출신의 메조소프라노 루이지아 폴첼리(Luigia Polzelli)라는 여인이었다. 하이든은 루이지아의 아버지뻘이 되는 형편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거의 30 년이나 되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역시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잘 아는대로 하이든은 1732년에 태어났다. 3월 31일에 태어났다. 원래는 4월 1일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4월 1일이라고 하면 만우절이기 때문에 곤란하여서 나중에 3월 31일에 태어났다고 등록했다는 얘기가 있다. 하이든의 비밀 애인인 루이지아는 1760년에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1750년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만일 1750년에 태어났다고 하면 하이든과의 나이 차이는 더 많아져서 거의 40년에 이른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하이든의 애정행각이다. 아무튼 공식 기록으로는 루이지아라는 여자가 1760년에 태어났다는 하니 믿기로 하자. 그런데 1760년은 하이든이 마리아 안나 켈러(Maria Anna Keller)라는 여인과 결혼한 해이다. 하이든이 28세의 청년으로서 비엔나의 슈테판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해에 루이지아가 태어난 것이다.

 

루이지 폴첼리

 

하이든의 부인인 마리아 안나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고자 한다. 하이든은 비엔나에 있을 때에 요한 켈러라는 사람의 집에 하숙을 한 일이 있다. 요한 켈러는 가발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이발사의 일도 했다. 요한 켈러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큰 딸은 마리아 안나이며 둘째 딸은 테레제였다. 하이든은 둘째 딸인 테레제를 좋아하여 결혼까지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테레제는 1756년에 뜻한바 있어서 수녀가 되려고 클라레스 수녀원에 들어갔다. 하이든이 둘째 딸인 테레제와 결혼코자 했다는 사실을 안 요한 켈러는 기왕에 둘째 딸이 이미 수녀원에 들어가서 수녀가 되었으므로 하이든을 설득하여 큰 딸 마리아 안나와 결혼토록 했다. 하이든은 이리저리 바쁘다는 핑게를 대고 확답을 주지 않다가 4년후인 1760년에 이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큰 딸 마리아 안나와 결혼하였다.

 

하이든과 마리아 안나의 결혼은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마리아 안나는 하이든의 음악활동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는 작곡해 놓은 오선지를 불소시개로 사용했다는 얘기까지 있으니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하이든은 신세한탄을 하면서 '저 여자는 남편이 신발장이인지 예술가인지 도무지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마리아 안나는 신앙심이 좋아서 그런지 날이면 날마다 성당에 가서 살았다. 그리고 하이든이 고생하면서 벌어오는 돈을 물쓰듯 했다. 특히 성당의 신부를 위해서 돈을 많이 썼다. 아무튼 제멋대로였다. 그래서 하이든은 마리아 안나가 찾지 못하도록 돈을 숨기기까지 했다. 마리아 안나는 하이든보다 일곱살이나 연상이었다. 하이든은 1732년에 태어났고 마리아 안나는 1729년에 태어났다. 그런고로 마리아 안나는 남편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더구나 마리아 안나는 질투심이 강하였다. 하이든의 주위에 그럴듯한 여인들이 몰려드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이든이 10년이란 세월동안 남의 부인인 루이지아 폴첼리와 거의 부부처럼 지냈다는 것은 하이든의 머리가 그만큼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이든과 마리아 안나는 부부로서 40여년을 보냈다. 그런데 자녀는 하나도 두지 못했다. 하이든의 동생들은 결혼하여서 자녀들을 척척 낳아 기르는데 맏형이라는 하이든은 결혼한지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없으니 속이 상해도 무척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하이든은 루이지아 폴첼로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몇명이나 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얘기에 의하면 적어도 두 아들을 두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1779년 루이지아가 에스터하지 궁전을 찾아 왔을 때에 그는 이미 두살짜리 아들 하나를 데리고 있었다. 피에트로라는 이름의 아들이었다. 루이지아는 에스터하지 궁전에 온지 4년째 되던 해인 1783년에 또 다른 아들을 낳았다. 그때는 이미 하이든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안토니오(또는 안톤)였다. 풀 네임은 알로이스 안톤 폴첼리(Alois Anton  Polzelli)였다. 루이지아와 남편 안토니오 폴첼리는 이 아이가 분명히 하이든의 아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하이든은 평생동안 이 아이를 자기 아들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루이지아는 그 후에 또 아들을 낳았는데 역시 하이든의 소생인 것이 확실한 것 같지만 하이든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컨대 모두들 존경하여 마지 않는 하이든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체면이 손상되므로 잠자코 있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하이든은 루이지아와 정식으로 결혼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는 하이든의 성을 갖지 못하고 루이지아의 남편의 성인 폴첼리를 따르게 되었다. 하이든은 안토니오는 물론, 루이지아의 첫 아들인 피에트로를 무척 사랑했다. 하이든은 이 아이들에게 음악 레슨을 해주었고 이 아이들의 법적인 아버지인 안토니오 폴첼리가 세상을 떠나자 후견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하이든은 피에트로가 15세 때에 그를 비엔나의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하여 함께 지내면서 피아노 레슨을 해 주었다. 그리고 어떤 귀족 집의 어린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을 주선해 주었다. 피에트로는 1796년, 19세의 젊은 나이로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하이든의 아들이라고 믿어지는 안토니오는 법적인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바이올린에 소질이 있었다. 안토니오는 20세가 되던 때부터 에스터하지 궁정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일을 했다. 그 때에는 이미 하이든은 물론, 루이지아도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을 떠나 있었던 때였다. 이렇듯 하이든에게 숨겨둔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인 마리아 안나는 알면서도 모른체 했을지 모른다.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 하이든이 오래동안 활동하던 곳이다.

      

점잖고 인품이 훌륭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는 하이든은 부인과 이혼하려고 여러번이나 생각했다. 그러나 하이든도 그렇지만 마리아 안나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여서 이혼은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다. 가톨릭에서는 부인이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는한 재혼할수가 없다. 그래서 루이지아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것 같다. 물론, 부부의 일은 한쪽의 얘기만 들어서는 안된다. 마리아 안나의 얘기도 들어보아야 한다. 하이든이 부인 마리아 안나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데에는 당연히 하이든의 책임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이든은 훗날 마리아 안나에 대하여 '정말 미칠듯이 화가 나게 만드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실토하였는데 하이든의 인품을 믿어 본다면 아무래도 마리아 안나의 잘못이 크다고 아니할수 없다. 하이든의 친지들도 마리아 안나에 대하여 '센스가 없는 여자'라고 입을 모아 말하였다. 그런 것을 보니 아무래도 마리아 안나는 하이든의 배필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수 있다. 잠시 이야기가 옆길로 갔음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다시 루이지아 폴첼리의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한다. 다만, 대단히 송구한 것은 마리아 안나는 물론이고 루이지 폴첼리의 초상화가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본 란에 소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1760년 쯤해서 나폴리에서 태어난 루이지아는 19살도 되기 전에 볼로냐에서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토니오 폴첼리를 만나 단번에 결혼하였다. 그리하여 루이지아 폴첼리가 되었다. 루이지아는 메조소프라노로서 오페라 가수였다. 두 사람은 더 나은 직장을 위해 1779년에 오스트리아로 와서 에스터하지 궁정에 취직하였다. 우선 2년 계약을 맺었다. 그때 루이지아는 열아홉이어서 누가보더라도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로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보니 루이지아의 성악 재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으며 남편이라는 안토니오의 바이올린 솜씨도 수준미달이었다. 아마 남편 안토니오는 폐렴을 오래 앓았기 때문에 바이올린 실력이 줄어 들었던 것 같다.

 

루이지 폴첼리라고 생각되는 초상화

 

당시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자는 오페라에 대하여 매우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성악가들의 실력에 대하여도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자가 가만히 보니 이탈리아에서 온 루이지아라는 여자가 얼굴은 반반하게 생겼지만 노래 실력은 별로였다. 당시의 오페라에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실정에서 메조소프라노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역할을 맡아 등장하니 노래가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개다가 남편이라는 안토니오 폴첼리의 실력도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자는 두 사람을 해고하려 했다. 그런데 그 즈음에 하이든과 루이지아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져서 두 사람은 이른바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당시 하이든은 48세였고 루이지아는 겨우 20세가 지난 때였다. 하이든이 루이지아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당시에 부인인 마리아 안나와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쨋든 하이든을 끔찍히 위하고 존경하는 에스터하지 공자는 하이든이 폴첼리 부부의 해고를 재고해 달라고 부탁하자 두말하지 않고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루이지아와 안토니오 부부는 에스터하지 궁전에 계속 있게 되었고 하이든과 루이지아의 관계는 더욱 깊어져 갔다. 얼마후 하이든은 루이지아와 결혼할 생각도 했으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혼과 재혼이 어렵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낼수 밖에 없었다. 하이든과 루이지아의 관계는 1791년까지 계속되다가 사정이 생겨서 중단되었다. 그러므로 1780년부터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면 무려 11년 동안이나 부부아닌 부부로서 지낸 것이다.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자

   

1790년, 루이지아와 그의 남편 안토니오 폴첼리가 에스터하지 궁전에 온지도 10년이 넘었다. 그 해에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자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은 안톤 에스터하지는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안톤 에스터하지는 아버지 니콜라우스가 고용한 모든 음악인들을 사실상 해고하였다. 하이든 부부는 아이젠슈타트를 떠나 비엔나로 갔다. 마찬가지로 루이지아 부부도 비엔나로 갔다. 물론 따로 살았다. 루이지아의 남편 안토니오는 폐렴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다. 하이든의 부인 마리아 안나는 비엔나에 와서도 집안 일에는 도무지 취미가 없고 성당에 가서 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쇼핑으로 시간을 보내며 지냈다. 하이든은 에스터하지를 떠나 비엔나에 오자마자 영국의 초청을 받아 런던으로 떠나게 되었다. 마리아 안나는 하이든을 따라가지 않았다. 하이든은 대신 루이지아와 함께 런던으로 갈 생각을 했다. 그러나 루이지아로서는 병마와 싸우는 남편을 두고 하이든을 따라 런던으로 갈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하이든은 런던에 가서도 루이지아와 계속 안부 이상의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지냈다.

 

비엔나의 굼펜도르프가쎄에 있는 하이든 하우스. 이곳에서 하이든이 세상을 떠났다. 현재는 하이든-브람스 기념관이다. 훗날 브람스가 이 집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하이든이 런던에 온지 1년쯤 지났을 때 루이지아의 남편 안토니오가 비엔나에서 끝내 세상을 떠났다. 루이지아로부터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하이든은 이 참에 루이지아와 결혼식을 올릴 생각까지 했다.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 영국의 성공회는 이혼과 재혼에 대하여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 그런데 '보이지 않으면 멀어진다'는 옛말대로 루이지아와 하이든의 관계는 1792년에 들어와서 갑자기 냉각되었다. 런던에 있는 하이든에게 들리는 소문은 루이지아가 비엔나에서 하이든을 비방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생각컨대 '못된 노랭이 영감태기' 등등의 표현으로 하이든을 비방했을 것이다. 루이지아가 하이든이 준 피아노를 팔아버렸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하이든은 이를 루이지아가 단교를 선언한 것으로 간주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루이지아는 남편이 죽고 나서 비엔나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피아첸짜(Piacenza)에 있는 어떤 작은 극장에 취직하여 오페라에 출연했다고 한다. 한편, 하이든은 런던에서 레베카 슈뢰터(Rebecca Schroeter: 1751-1826)라는 어떤 돈 많은 과부와 낭만적인 관계를 가졌다. 레베카 슈뢰터는 독일 출신의 작곡가 요한 사무엘 슈뢰터의 미망인으로서 하이든이 런던에 머무는 동안 자주 만나며 지냈다.

 

한편, 피아첸짜에 갔던 루이지아는 얼마후 볼로냐로 자리를 옮겼다. 하이든은 그런 루이지아와 계속 연락은 하며 지냈다. 그리고 가끔씩 루이지아에게 돈을 보냈다. 1800년에 하이든과 40여년 법적인 부부로서 있었던 마리아 안나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엔나 근교의 온천마을인 바덴(Baden bei Wien)에서 온천수를 너무 많이 마셔서 죽었다고 한다. 향년 71세였으니 살만큼은 산 인생이었다. 이탈리아에 있는 루이지아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루이지아는 즉시 하이든에게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은 사항을 문서로서 만들어 줄것을 요청했다. 간단히 말해서 루이지아는 지금도 하이든으로부터 간혹 돈을 받고 있지만 하이든이 죽고 난 후에도 계속 받아야 하므로 아예 문서로서 하이든의 사후에도 매년 3백 굴덴의 돈을 주겠다는 것을 약속하라는 것이었다. 단, 두가지 단서를 내세웠다. 하나는 루이지아가 어떤 남자를 만나 재혼하게 되면 매년 3백 굴덴의 돈을 안 주어도 좋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비록 노년에 접어든 하이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지아와 재혼한다면 그때에도 돈을 주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다. 하기야 루이지아가 하이든과 재혼하고 얼마 후에 하이든이 천국에 간다면 유산을 모두 상속받기 때문에 굳이 매년 돈을 받을 필요가 없다. 아무튼 하이든은 루이지아가 제안한 사항을 들어주고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결코 다른 여자와 재혼하지 않았다. 한편, 루이지아는 얼마후 비교적 젊은 여자로서 혼자 사는 것이 어려웠던지 루이지 프란키(Luigi Franchi)라는 가수와 재혼했다. 루이지아는 새로 결혼한 남편과 함께 헝가리에 가서 지내던 중 1830년에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루이지아 폴첼리는 하이든의 작품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다만, 좋은 쪽이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서 영향을 끼쳤다. 루이지아는 하이든으로부터 자주 레슨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지아는 소프라노의 어려운 파트를 소화하지 못했다. 하이든이 에스터하지 궁전에서 맡은 또 하나의 역할은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이었다. 하이든은 루이지아가 에스터하지에서 오페라에 출연하는 조건으로 고용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역할을 맡기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루이지아는 다른 작곡가들의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하이든은 루이지아를 위해 오리지널 아리아를 빼고 루이지아가 부르기 쉽게 작곡한 '끼워넣기 아리아'로 대체하였다. (이런 아리아를 Insertion Aria 라고 부른다.) 하이든이 루이지아를 위해 그런 식으로 작곡한 아리아는 대강 열 곡이나 된다. 그러므로 어찌보면 하이든은 다른 작곡가들의 오페라를 오리지널대로 살리지 못하고 변형한 셈이었다. 한편, 루이지아는 비록 하이든의 애인이었지만 하이든이 루이지아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오페라는 거의 없다. 하이든은 기록상으로는 14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그러나 그중에서 사랑하는 루이지아가 주역급으로 출연한 오페라는 단 두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도 루이지아가 메조소프라노기 때문에 프리마 돈나의 역할을 맡지는 못하고 세콘도 돈나(Socondo Donna)의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L'isola disabitata(The Desert Island: 무인도 또는 황량한 섬: 1779)에서는 주인공 코스탄짜의 여동생인 실비아를 맡았고 La vera costanza(The True Constancy: 진실한 정절 또는 사랑의 승리: 1779),에서는 남작부인의 하녀인 리세타를 맡도록 했다. 이렇듯 하이든은 루이지아의 음악적 재능과 실력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

 

  

하이든의 오페라 '무인도'의 한 장면. 아무리 루이지아 폴첼리가 하이든의 애인이었지만 성악적 실력이 뛰어나지 못하여 프리마 돈나의 역할을 맡긴 것은 없다. 루이지아는 '무인도'의 초연에서도 조연으로 나왔었다.

 

[사족] 하이든이 비엔나에 있을 때 그는 또 한명의 여인과 로맨틱한 관계를 맺으며 지냈던 일이 있다. 마리안네 폰 겐칭거(Marianne von Genzinger 또는  Maria Anna von Genzinger)라는 여인이었다. 하이든이 섬기던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자의 주치의의 부인이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고 어떤 관계에까지 진전되었는지는 자세히 알수 없으나 나중에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들을 살펴보니 보통 이상의 로맨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본 란의 주제가 루이지아 폴첼리이므로 생략코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