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와 여인들

라 트라비아타와 마리 뒤플레시스(Marie Duplessis)

정준극 2011. 11. 4. 18:12

라 트라비아타와 마리 뒤플레시스(Marie Duplessis)

 

비올레타의 모델인 마리 뒤플레시스의 초상화. 가슴에 동백꽃(Camellias)을 달았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가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Alexandre Dumas, fils)의 소설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élias: The Lady of the Camellias)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은 마르게리트 고티에(Marguerite Gautier)이지만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서는 잘 아는대로 비올레타 발레리(Violetta Valery)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마르게리트 고티에가 되었건 비올레타 발레리가 되었건 그 여자는 실제로 파리 사교계 및 화류계에서 유명했던 마리 뒤플레시스(Marie Duplessis)라는 사람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마리 뒤플레시스라는 이름도 원래 이름은 아니다. 원래 이름은 알퐁신 로세 플레시스(Alphonsine Rose Plessis)이다. 알퐁신 로세 플레시스는 실제로 1824년 파리 북서부 노르망디 지방의 노낭 르 팽(Nonant-le-Pin)이라는 마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여인이다. 그런 그가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의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고 '오페라의 황제'라고 존경받는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밖에 수많은 영화, 연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마리 뒤플레시스라는 여자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이에 앞서 우선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아들)의 소설 '동백꽃 여인'은 어떤 내용의 것인지 잠시 살펴보고 그 후에 마리 뒤플레시스의 신상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물론 모두 잘 아는 내용이겠지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의 '동백꽃 여인'의 책 표지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élias)은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가 1848년에 내놓은 소설이다.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휘스는 아들이라는 뜻)는 '삼총사' '몬테 크리스토 백작' 등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르 뒤마 페레(아버지라는 뜻)의 아들이다. 뒤마 휘스의 소설 '동백꽃 여인'은 곧 이어 연극 대본으로 만들어졌다. 연극 '동백꽃 여인'은 1852년 2월 2일 파리의 '보데빌 극장'(Théâtre du Vaudeville)에서 초연되었다. 보데빌 극장은 현재 파리의 명물인 고몽 오페라 영화관(Cinema Gaumont Opera)이다. 연극 '동백꽃 여인'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소설 '동백꽃 여인'은 이탈리아어, 영어, 독일어로도 번역되었다. 어느날 베르디가 이 소설을 읽고서는 가련한 주인공 마르게리트 고티에의 사랑과 희생에 크게 감동하였다. 베르디는 '동백꽃 여인'을 오페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이듬해인 1853년 3월 6일 베니스의 라 페니체극장(Teatro La Fenice: 불사조라는 뜻)에서 초연되었다. 이탈리아어 대본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Francesco Maria Piave)가 썼으며 비올레타의 이미지를 창조한 소프라노는 홰니 살비니 도나텔리(Fanny Salvini Donatelli)였다. 대본을 쓴 피아베는 '리골레토' '맥베스'등 베르디의 여러 오페라의 대본도 쓴 사람이다. 베르디는 처음에 이 오페라의 제목을 '비올레타'라고 붙였다가 주위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라 트라비아타'라고 수정하였다. '라 트라비아타'라는 말은 '타락한 여인'(The Woman Who Goes Astray: The Fallen Woman)이라는 뜻이다. 소설의 여주인공인 마리 뒤블레시스는 실제로 뒤마 휘스가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뒤마 휘스가 이집트 등에 오랫 동안 여행을 갔다오니 그가 사랑했던 마리 뒤플레시스는 병에 걸려 이미 이 세상을 떠난 후였다. 뒤마 휘스는 너무나 충격을 받고 비탄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려서 마리 뒤플레시스의 이야기를 소설형태로 썼으니 그것이 '동백꽃 여인'이다.

 

파리의 Bd de la Madeleine에 있는 시네마 고몽 오페라(Cinéma Gaumont Opéra). 예전에는 보데빌극장(Théâtre du Vaudeville)이었다. 이곳에서 1852년에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의 '동백꽃 여인'이 연극으로서 초연되었다.

 

다시 연극으로 돌아가서, 연극 '동백꽃 여인'은 파리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공연되었다. 특히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는 제목을 'Camille'라고 고쳐서 연극을 공연하였다. 외국어로 번역하여 연극을 공연하다보니 자연히 여러 버전이 생기게 되었다. 뉴욕의 브로드웨이 극장에서는 여섯 개의 각기 다른 버전이 공연되었다. 소설 '동백꽃 여인'의 스토리는 마르게리트 고티에라는 여인과 아르망 뒤발(Armand Duval)이라는 지방 귀족집안 청년의 사랑을 다룬 것이다. 소설은 주인공인 뒤발이 자기의 사랑 이야기를 어떤 해설자에게 말해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설에서는 마르게리트 고티에를 데미 몽데이느(Demi-mondaine)라고 표현했다. 데미 몽데이느라는 말은 환락을 추구하는 부유한 여성을 말한다. 남자는 데미몽드(Demimonde)라고 부른다. 오리지널 프랑스어 소설에서는 데미 몽데이느라는 표현 대신에 코트장(Courtesane)이라고 설명했다. 코트장이라는 말은 원래 궁전에서 시중을 드는 귀부인들을 말하지만 차츰 변화되어서 '정부' 또는 '창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비록 '창녀'라는 의미가 있지만 일반 창녀와는 달리 귀족적인 창녀, 즉 고급창녀를 말했다. 프랑스어에서 코트장은 여러 애인을 두어 동시에 한 사람 이상과 상대하는 여인을 말한다. 마르게리트는 결핵(폐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소설에서는 결핵을 Phtisie 라고 표현했다.

 

오페라극장에 앉아 있는 마리 뒤플레시스. 뭇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상대역인 아르망 뒤발은 오페라에서는 알프레드 제르몽(Alfred Germont)이다. 아르망 뒤발은 프랑스 남부지방인 프로방스 출신이다. 아르망은 파리에 왔다가 어느 파티에서 마르게리트 고티에를 만나 결국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아르망은 마르게리트에게 돈많고 권력있는 사람들의 정부가 되어 창녀처럼 생활하는 것을 청산하고 시골에 가서 함께 살자고 권유한다. 마르게리트와 아르망은 파리 교외의 한적한 시골로 와서 살기 시작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복한 생활은 아르망의 아버지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다. 아르망의 아버지는 아들이 창녀와 함께 지낸다는 사실 때문에 딸의 결혼이 지장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마르게리트에게 아르망과 헤어져 달라고 요청한다. 마르게리트는 아르망을 위해서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홀연히 파리의 생활로 돌아간다. 아르망은 마르게리트가 새로운 남자를 찾아 떠난 것으로 오해한다. 결국 아르망은 마르게리트가 불치의 결핵으로 숨을 거두게 되자 모든 사실을 알고 후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마리 뒤플레시스를 그린 그림

                          

마르게리트와 아르망의 사랑 이야기는 마농 레스꼬와 슈발리에 데 그류의 사랑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 뒤마 휘스는 소설 '동백꽃 여인'의 첫 머리에 마농 레스꼬를 언급함으로서 소설 '동백꽃 여인'과 '마농 레스꼬'가 여러 면에서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했지만 사랑의 형태는 사뭇 차이가 난다. '동백꽃 여인'의 경우, 아르망의 사랑은 자기를 위해 부유함과 화려한 생활 스타일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여성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아르망의 아버지 때문에 간섭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농 레스꼬의 데 그류에 대한 사랑은 순전히 향락과 사치를 위한 것이라고 풀이할수 있다. 뒤마 휘스는 소설에서 마르게리트 고티에를 상당히 좋게 그려놓았다. 비록 과거는 내세울것이 되지 못하는 여인이지만 아르망에 대한 사랑은 진실되고 순수하며 희생적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마르게리트 고티에와 아르망 뒤발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고통에 대하여도 동정적으로 그려놓았다. 사실 두 사람의 사랑은 당시 사회의 도덕적 잣대로 보았을 때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랑을 미화하여 놓았다. 아마 그것은 뒤마 휘스 자신이 마리 뒤플레시스를 사랑했던 것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싶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소설은 19세기 파리인의 생활을 충분히 표현하여서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고급창녀'들의 부서지기 쉬운 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다.

 

마리 뒤플레시스 초상화.

                                                         

소설 '동백꽃 여인'이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사실 소설보다는 연극 때문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여러 언어로 번안되어 공연되었다. 주인공인 마르게리트 고티에의 역할을 맡는 것은 여배우들로서 경력에 남는 자랑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 중에서 아직도 우리 귀에 익은 여배우들은 일리안 기쉬(Lillian Gish), 엘레오노라 두세(Eleonora Duse), 마가렛 앵글린(Margaret Anglin), 가브리엘르 레자느(Gabrielle Rejane), 탈룰라 뱅크헤드(Tallulah Bankhead), 에바 르 갈리엔느(Eva le Gallienne), 이사벨르 아드자니(Isabelle Adjani), 카실다 베커(Casilda Becker), 그리고 특히 사라 베른하르트(Sarah Bernhardt)를 들수 있다. 세기의 사라 베른하르트는 파리, 런던, 뉴욕에서 연극에 출연하여 감동을 주었으며 1912년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무희인 이다 루빈슈타인(Ida Rubinstein)은 1920년대에 사라 베른하르트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아 사라 베른하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의 무대연기를 최대한 그대로 해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008년도 뮤지컬은 '마르게리트'(Marguerite)는 '동백꽃 여인'을 기본으로 삼은 작품이다. 뮤지컬 '마르게리트'는 1944년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있었던 비련을 다룬 내용이다.

 

   

사라 베른하르트 주연의 연극 '동백꽃 여인'의 포스터와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의 소설 표지

                        

'동백꽃 여인'은 베르디에게 영감을 주어 오페라가 탄생하도록 했으며 이밖에도 영화로는 각국에서 20여편이나 제작되어 명작의 영화화에 있어서 또 다른 기록을 세워주었다. 여주인공인 마르게리트 고티에는 사라 베른하르트를 비롯하여 클라라 킴벌 영(Clara Kimball Young), 테다 바라(Theda Bara), 이본트 쁘랭땅(Yvonne Printemps), 알라 나치모바(Alla Nazimova),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 미슐랭 프레슬(Micheline Presle), 프란체스카 베르티니(Francesca Bertini), 이사벨 위페르(Isabelle Huppert) 등이 맡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마르게리트 고티에 역의 그레타 가르보. 그의 병약한 듯 초췌한 모습은 당시 여성들의 선망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초췌하게 보이려는 노력들을 기울였다.

 

[마리 뒤플레시스는 누구인가?]

마리 뒤플레시스는 19세기에 파리에서 여러 부호들과 저명인사들의 정부 또는 고급창녀로서 활동했던 유명한 여인이다. 마리 뒤플레시스를 사랑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는 뒤플레시스의 죽음을 슬퍼하여 La Dame aux Camellias(동백꽃 여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마르게리트 고티에는 바로 마리 뒤플레시스를 모델로 삼았다. 마리 뒤플레시스가 어떤 여인이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가늠하기가 어렵다. 대부분 전설과 같은 얘기로 전해 내려올 뿐이다. 그러므로 소설에 나타난 마르게리트 고티에의 생애로서 마리 뒤플레시스의 생애를 짐작할수 있다. 

 

연극 '동백꽃 여인' 포스터 

                                    

마리 뒤플레시스는 1824년 1월 15일 노르망디 지방의 노낭 르 팽(Nonant-le-Pin)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이 알퐁신 로세 플레시스라는 것은 이미 설명한바와 같다. 그의 아버지는 알퐁신이 12살 때부터 딸에게 몸을 팔아 돈을 벌도록 했다. 말하자면 포주였다. 알퐁신은 더 이상 그런 생활을 하기가 싫어서 15세 때에 가출하여 파리로 무작정 상경하였다. 알퐁신은 파리의 어떤 의상실에서 조수로서 일을 하게 되었다. 알퐁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소설에 표현된 내용으로만 짐작할수 있다. 소설에 따르면 알퐁신은 자그마한 체구에 웃는 모습이 무척 매력적인 아가씨라고 되어 있다. 그런 알퐁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알퐁신은 파리로 온지 1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돈 많은 사람들, 지체 높은 사람들의 데이트 상대가 되어 파티에 참석하거나 오페라를 함께 가는 입장이 되었다. 일퐁신은 귀족여인처럼 보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읽고 쓰는 법을 공부한 것은 물론이고 말하는 것, 세계 정세를 논하는 것, 경제를 설명하는 것, 오페라와 발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등 모든 분야에서 교양을 쌓았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알퐁신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것조차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했다. 알퐁신은 이제 이름도 마리 뒤플레시스라고 바꾸었으며 귀족 집안의 출신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이름에 Du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영화 'Camille'에서 마리 뒤플레시스.

        

그리하여 마리 뒤플레시스는 얼마후부터 파리의 상류층 사교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마리 뒤플레시스는 정치가, 예술가, 작가, 부호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몇 사람과는 사실상 정부의 역할을 하였다. 마리 뒤플레시스는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볼로뉴숲에서 승마를 하며 파리 오페라의 공연을 관람하였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화가인 에두아르 비에노(Édouard Viénot)로 하여금 자기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노르망디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못된 아버지때문에 몸을 팔아야 했던 알퐁신으로서는 놀랄만한 변신이 아닐수 없었다.

 

'동백꽃 여인'의 연극 초연에서 마르게리트 고티에를 맡았던 엘레오노라 두세

                                  

마리 뒤플레시스는 1844년 9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거의 1년 동안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의 정부였다. 그 후에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의 애인이 되었다고 한다. 마리 뒤플레시스는 23세 라는 너무나 짧은 생애를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파리의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것은 6년여에 불과했다. 마리 뒤플레시스는 대단히 지성적인 여인이어서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사모하고 존경했다. 그래서 한때 정부로서 지내다가 헤어졌다고 해도 상대방은 사랑의 감정을 버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마리 뒤플레시스는 1847년 2월 3일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과거의 애인이었던 스웨덴의 폰 스타켈베리 백작과 프랑스의 에두아르 드 페르고(Édouard de Perregaux) 백작이 임종을 지켜보았다. 마리 뒤플레시스는 잠시동안이지만 에두아르 그 페르고 백작과 정식으로 결혼한바 있다. 마리 뒤플레시스는 세상을 떠날 때에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모두 경매에 붙여져 빚을 갚는데 사용되었다. 마리 뒤플레시스는 몽마르트 묘지에 매장되었다. 오늘날 몽마르트의 마리 뒤플레시스 묘지에는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다.

 

몽마르트에 있는 마리 뒤플레시스의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