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슈트라우스 왕조

왕조의 시조 요한 슈트라우스1세

정준극 2011. 11. 17. 15:08

요한 슈트라우스1세(Johann Strauss I) - Johann Strauss Vater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유명한 '슈트라우스 왕조'의 시조

 

요한 슈트라우스 1세(1804-1849)

 

슈트라우스 왕조의 시조는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유명한 요한 슈트라우스 1세(1804-1849)이다. 매년 1월 1일 열리는 비엔나신년음악회의 마지막 앵콜 곡으로서 청중들이 박수를 치는 중에 연주되는 '라데츠키 행진곡'이 요한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것이라고 하니까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도나우)'를 작곡한 그 요한 슈트라우스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아니라 '라데츠키 행진곡'의 요한 슈트라우스는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의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버지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같기 때문에 1세, 2세로 구분하고 있는 것은 모두 다 잘 아는 내용이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1804년 3월 14일 비엔나에서 태어났고 1849년 9월 25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태어난 집은 현재 2구 레오폴드슈타트의 플로쓰가쎄(Flossgasse) 7번지이다. 옛집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의 집에 기념 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2구 레오폴드슈타트의 플로쓰가쎄 7번지에 부착되어 있는 명판. '이 집에서 예술가이며 란너와 같은 시대의 요한슈트라우스 아버지가 1804년 3월 14일에 태어났다. 1883년에 설치하였다.'고 적혀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세 아들 모두 훌륭한 음악가가 되었다. 큰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세상이 다 아는대로 '왈츠의 왕'(Waltz King)이며 둘째 아들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원래 엔지니어이지만 뛰어난 작곡가였고 셋째 아들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도 대단한 작곡가였다. 슈트라우스 왕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들인 요한 슈트라우스 3세가 할아버지와 삼촌들, 그리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작곡가 겸 지휘자로 활동했고 이어 그의 아들인 요한 슈트라우스 4세도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통상 '슈트라우스 왕조'라고 하는 것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부터 2세까지 지속된 것이 아니라 1세부터 4세까지 계속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는 보통 요한 슈트라우스 2세(아들)에 대하여는 잘 알고 있지만 3세, 4세까지 있다고 하면 '어, 그런가?'라며 호기심을 금치 못하게 되기 마련이다. 이제 슈트라우스 왕조의 핵심 멤버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아들들. 좌로부터 요제프 슈트라우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에드아르드 슈트라우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또 다른 이름으로 요한 밥티스트 슈트라우스(Johann Baptist Strauss) 라고 하며 일반적으로는 Johann Strauss Sr., Johann Strauss the Elder, Johann Strauss, the Vater 라고 부른다. 슈트라우스 가문의 아버지,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요한이라는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요제프 란너(Joseph Lanner)와 함께 왈츠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대표적인 작품은 행진곡으로서 앞에서도 언급한 '라데츠키 행진곡'(Radetzky Marsch)이며 왈츠로는 '로렐라이 라인클랭게'(Lorelei Rheinklänge)를 들수 있다.

 

프라이융에 있었던 라데츠키 장군 기마상. 지금은 슈투벤링의 정부종합청사 앞에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라데츠키 장군이 북부 이탈리아의 노바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승전한 것을 축하하여 라데츠키 행진곡을 작곡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을 셋 두었다. 잘 아는대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아들), 요제프 슈트라우스,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이다. 막내아들 에드아르트 슈트라우스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에서 큰 아들에게 요한 슈트라우스 3세라는 이름을 붙였다. 역시 작곡가이며 지휘자였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요한 슈트라우스 1세로부터 3세까지를 슈트라우스 왕조의 근간으로 보고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딸도 둘이나 두었다. 큰딸은 안나로서 1829년에 태어났고 작은 딸은 테레자로서 1831년에 태어났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이상의 세 아들과 두 딸 이외에도 아들 하나를 더 두었는데 1834년에 태어난 페르디난트이다. 하지만 생후 10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아버지는 프란츠 보르지아스 슈트라우스(Franz Borgias Strauss)로서 1764년에 태어나 1816년, 즉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12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바르바라 돌만(Barbara Dollmann)으로서 1770년에 태어나 181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어린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7세일 때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부모는 Zum heiligen Florian(성플로리안집)이라는 여관을 경영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할아버지는 유태인으로서 이름은 요한 미하엘 슈트라우스(1720-1800)였다. 하지만 그는 유태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기 때문에 슈트라우스 일가는 가톨릭 가문에 속하였다.

 

플로스가쎄 7번지 건물과 기념명판이 붙어 있는 위치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어려서부터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가 일곱살 때에 어머니가 만성열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더욱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의 아버지는 그가 12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도나우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물에 투신하여 자살한 것이라고 한다. 소년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양복장이인 안톤 뮐러라는 사람의 집에 보내져 지내야 했다. 말하자면 안톤 뮐러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후견인이었다. 안톤 뮐러는 소년 요한 슈트라우스 1세를 책 제본업을 하는 요한 리히트샤이들이란 사람의 도제로 보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책 제본공장에 다니면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공부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제본공장에서 도제로서 6년을 지냈다. 도제생활을 끝낸 그는 미하엘 파머(Michael Pamer)라는 사람이 조직한 작은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직업을 가질수 있었다. 얼마후 그는 장래의 그의 파트너인 요셉 란너가 조직한 '란너 4중주단'(Lanner Quartet)에 합류하여 비올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란너 4중주단은 주로 비엔나 월츠를 연주했고 독일 무곡도 연주했다. 이 현악4중주단은 2년후 작은 오케스트라로 발전하였다.

 

이어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란너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가 되었다. 란너 오케스트라는 1824년 카니발 기간에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란너와 그의 동업자인 드라하네크(Drahanek) 형제는 제2의 오케스트라를 만들기로 했다. 요한 슈트라우스가 제2 란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활약했다. 그러다가 1825년,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자기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였으며 주로 무곡을 작곡하여 연주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란너와 재정문제로 의견의 대립을 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는 그러한 대립을 더 이상 갖지 않기 위해 란너와 결별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요셉 란너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렇게 되자 란너는 대단한 경쟁심으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크게 대립하였다. 하지만 그런 대립이나 경쟁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 비엔나에서는 무곡을 연주하는 악단이 크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라트하우스파르크에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요제프 란너 기념상 디테일

 

오래지 않아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비엔나에서 가장 인기가 높고 가장 사랑을 받는 작곡가 및 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자기 악단을 데리고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등지를 순회공연하여 비엔나 왈츠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는 대를 잇는 가업이 되었다. 다만, 1901년에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셋째 아들인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가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를 해산하는 바람에 더 이상 전통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1837년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악단을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프랑스 순회연주를 가졌다. 그는 프랑스에서 콰드리유(Quadrille) 음악을 듣고는 대단한 흥미를 느껴서 당장 직접 작곡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1840년 비엔나의 카니발에 요한 슈트라우스 특유의 무곡을 소개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전인 1838년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즉위식에 참가하여 연주회를 가져 대성공을 거두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성공을 거둔 비결은 왕족이나 귀족등 제한된 관중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즐거움을 주는 음악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그는 더 많은 청중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당대에 인기있는 멜로디들을 그의 왈츠에 도입하였다. 예를 들면 그의 '비너 카니발'에 베버의 오페라 '오베론'의 서곡을 사용한 것이나 '파리 왈츠'에 프랑스의 국가로 유명한 '라 마르세이유'의 멜로디를 사용한 것 등이다. 이런 잘 아는 멜로디가 나오므로 그의 작품은 사람들의 사랑을 더 받았다.

 

비엔나 슈타트파르크의 쿠어살롱(Kursalon)에서 연주하고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1825년 마리아 안나 슈트라임(Maria Anna Sterim)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였다. 비엔나의 리히텐탈(Liechtenthal)교구교회에서였다.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빈번히 연주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출장도 병이었기 때문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가족은 부자처럼 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비엔나에서 요한 슈트라우스라고 하면 유명인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집이 어딘지 정도는 다 잘 알고 있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식구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은 '황금 사슴'(Goldener Hirsch)라는 이름의 집이었다. 집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주로 주점이나 여관이 그랬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자기 집을 '황금 사슴'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던 것은 아마 그의 아버지가 '성플로리안집'이라는 여관을 경영했었기 때문이 아닌듯 싶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자녀들에게 엄격한 아버지였다. 그는 자기의 아이들이 자기와 같은 음악가가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사실 말이지만, 말이 인기있는 음악가였지 그 뒤안길에는 말할수 없는 고초와 비난과 무시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만 당시에는 특히 음악가라고 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성은 상관하지 않고 그저 남들을 즐겁게 해주는 한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취급하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아이들이 그런 취급을 당하며 살지 않게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자녀들은 모두 뛰어난 음악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엄격한 지시로 인하여 음악가가 되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고들 지냈다.

 

요한 슈트라우스 가족이 살았던 비엔나의 골데네 히르센하우스(황금사슴집). 지붕위에 커다란 사슴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큰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은행원이 되려는 공부를 해야 했다. 둘째 요제프는 군대에 들어가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도록 했다. 셋째 에두아르드는 직업외교관이 되는 공부를 했다. 하지만 셋째 에두아르드는 일단은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런중에도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연애에 소질이 다분하여서 1834년부터 아예 에밀리 트람푸슈(Emilie Trampusch)라는 여자를 공공연히 데리고 살며 두집 살림을 하였다. 좋게 말해서는 둘째 부인이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정부(情婦)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무려 6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그러다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에밀리 트람푸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의 아버지라고 공식으로 밝히자 본부인인 마리아 안나는 더 이상 참을수 없어서 이혼소송을 냈다. 가톨릭교도로서 이혼이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 아무튼 이혼소송을 냈고 법원은 그같은 요구를 받아들여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안나 마리아 슈트라우스의 이혼을 승인하였다. 안나 마리아는 이제는 더 이상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으므로 큰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음악가가 되도록 하는데 힘을 실어 주었다.

 

비엔나 슈타트파르크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황금기념상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비록 가정문제가 복잡해서 골치가 아팠지만 쉬지않고 순회연주를 다녔으며 수많은 자선단체를 위해 새로운 곡들을 썼다. 그가 쓴 왈츠는 농부들의 무곡인 랜들러로부터 발전하여 비로소 '비엔나 왈츠'라는 독특한 형태의 음악이 되었다. 주로 짧은 도입부에 이어 4분의 3박자의 춤곡이었다. 끝 부분은 대체로 화려하고 웅장한 코다로 마무리 되는 스타일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왈츠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들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의 왈츠에 비하여 악기의 편성을 더 화려하게 했으며 왈츠의 구조를 더 연장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말을 하면 뭐하지만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 비하여 음악적 재능이 풍부하지 못했으며 비즈니스 마인드도 부족하였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그저 당시에 먹고 살기 위해 작곡을 하고 연주를 하는 비엔나의 음악가였을 뿐이었다. 주로 무도회장(댄스홀)에서 왈츠와 폴카를 연주하여 춤을 추는 사람들로부터 사례를 받아 수입을 챙겼으며 왈츠를 작곡하여 악보를 팔아 돈을 벌었다. 무도회장에서는 연주가 끝난 후에 마치 교회에서 헌금을 걷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쟁반을 돌려 성의표시의 돈을 받았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더 확실히 돈을 걷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즉, 무도회장의 주인과 얘기하여 사람들이 무도회장에 들어오기 전에 입장권을 사서 들어오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하니 돈을 더 벌었다. 그런 시스템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왈츠를 연주하고 있던 슈페를 발하우스(Sperl Ballhaus)로부터 시작하였다. 슈페를 발하우스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비로소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장소였다.

 

새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왈츠와 폴카를 연주하기 시작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가 그렇게도 음악을 하지 말라고 탄압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훌륭함을 찬양하고 선전하였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곡을 많이 연주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점차 인기상승하자 라이벌 의식을 크게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아들이 처음 연주를 시작했던 돔마이어(Dommayer) 카지노에서는 다시는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렇게 된데에는 신문들의 부추김이 컸었다. 신문들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대서특필하여 신문을 팔어먹었다. 그래서 부자간의 라이벌 의식이 더욱 확대되었다고 본다.

 

중앙공동묘지의 요한 슈트라우스 1세 묘지의 이장식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1849년, 향년 45세로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생아 자녀중 한 아이로부터 성홍렬을 옮아서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되블링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친구이며 라이벌이었던 요제프 란너의 묘지 옆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요제프 란너의 유해는 1904년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의 예술가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되블링 공동묘지는 현재 슈트라우스-란너 공원으로 바뀌었다.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슈트라우스의 가족들을 기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엔나에서 슈트라우스가 없다는 것은 오스트리아에서 도나우가 없다는 것과 같다.'

 

슈트라우스-란너 공원(구 되블링 공동묘지)에 남아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요제프 란너의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