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슈트라우스 왕조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Eduard Strauss)

정준극 2011. 11. 18. 10:02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Eduard Strauss)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1835-1916)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Eduard Strauss: 1835-1916)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동생으로서 '슈트라우스 왕조'의 일원이다. 삼형제중에서 막내이기 때문에 가장 오래 살았다.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에 무려 81세로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슈트라우스 가문의 멤버 중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이다. 참고로 말하면, 큰형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74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둘째 형인 요제프는 병약하여서 43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들의 아버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45세에 세상을 떠났다. 에두아르드는 성격이 특이했다. 말이 좋아서 특이한 것이지 실은 고집불통에 독선적이었고 한번 마음 먹은 것은 절대로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재능은 있지만 못된 성격이었다. 얼마나 성격이 못되 먹었느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인 사건으로 알수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와는 별도로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여기에 두 동생들인 요제프와 에두아르드도 참여토록 했다. 함께 일하다보니 아무리 형제간이라도 의견이 엇갈릴 경우가 있었다. 더구나 세 사람이 모두 작곡을 했기 때문에 어떤 새로운 작품이 나오면 누가 오리지널 아이디어를 내놓아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놓고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결국 성격이 유별난 에두아르드는 작은 형인 요제프가 세상을 떠나자 자기도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와 결별코자 생각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 형편에 에두아르드는 만일 큰형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까지 세상을 떠나고 자기만 남게 되면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이고 뭐고 해체하고 이 오케스트라가 보관하고 있는 모든 악보는 불태워서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1899년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세상을 떠나자 에두아르드는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를 해산하고 악보들을 모두 없애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두아르드는 우선 자기부터 오케스트라를 떠났다. 1901년 2월의 일이었다.

 

그러다가 1906년에 드디어 에두아르드는 형들에게 한 약속을 최종적으로 실행키로 작정했다. 어느날 에두아르드는 전체 슈트라우스 가족의 오리지널 악보들을 모두 꺼내어 마차에 싣고 의자공장을 하고 있는 친구의 공장에 가서 화로(보일러)에 처넣어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포함하여 팬들이 에두아르드의 만행을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항의했지만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를 않아 어찌할수가 없었다. 에두아르드는 슈트라우스 가족의 악보들을 무려 7시간에 걸쳐 모두 태웠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었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이 사본들을 가지고 있어서 거의 모든 작품이 오늘날까지 알려지게 되었지만 개중에는 불에타서 영영 사라진 작품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서 에두아르드 자신도 255편의 곡을 작곡했다. 에두아르드는 자기의 오리지널 악보도 모두 보일러의 아궁이로 집어 넣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상당수의 사본들을 가지고 있어서 대부분은 생존하게 되었다.

 

에두아르드의 음악적 스타일은 독자적이어서 형들의 스타일을 거의 닮지 않았다. 사실상 에두아르드는 당시에 작곡가로서 보다는 지휘자로서 더 잘 알려졌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겠지만 에두아르드의 명성은 두 형들의 그늘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에두아르드는 자기 자신의 독특한 무엇을 개발코자 노력했다. 결과, 나온 것은 독일에서는 '폴카 슈넬'(Polka Schnell)이라고 알려진 빠른 템포의 폴카였다. '철로를 비워라'(Bahn Frei), '통제불능'(Ausser Rand und Band), '제동 없이'(Ohne Bremse) 등은 대표적인 폴카 슈넬이다. 에두아르드는 아름다운 왈츠도 몇 곡 남겼다. 에두아르드의 가장 유명한 왈츠는 Doctrinen 일 것이다.

 

에두아르드의 음악활동에는 난관이라고 하면 난관이랄수가 있는 여러 요인들이 있었다. 두 형들도 라이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라이발은 군악대장이며 무곡 작곡가인 칼 미하엘 치러(Karl Michael Zieher)였다. 두 사람의 라이발 관계는 비엔나에서 아주 잘 알려진 일이었다. 치러라는 사람도 어지간한 사람이었던지 에두아르드에 대항하기 위해서 새로운 악단을 조직할 때에 에두아르드의 멤버들을 스카웃해 갔으며 악단의 명칭도 '구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Formerly Eduard Strauss Orchestra)라고 지었다. 화가 치민 에두아르드는 당장 자기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소송을 제기했다. 에두아르드가 승소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비엔나에서 치러의 명성은 슈트라우스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에두아르드의 두 형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마치 치러의 세상이 된 듯한 형편이었다. 아무튼 두 사람의 라이발 관계는 에두아르드가 마침내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를 해산할 때까지 몇년이나 계속되었다.

 

에두아르드는 마리아 클렌카르트(Maria Klenkhart)라는 여인과 1863년 1월 8일 결혼하였다. 에두아르드는 두 아들을 두었다. 하나는 요한 슈트라우스 3세이며 다른 하나는 요제프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3세라고 하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의 아들이다. 결국 에두아르드의 아들인 요한 슈트라우스 3세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슈트라우스 가문의 전통을 이어갔던 것이다. 에두아르드는 1899년과 1901년에 미국 순회연주를 감행했다. 그리고는 비엔나로 돌아와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를 해산하고 자기 자신은 음악계에서 은퇴하였다. 에두아르드는 은퇴 후에 일체의 대중행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다만, 19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Erinnerungen(회상)이라는 타이틀의 슈트라우스 가족 비망록을 집필하였을 뿐이다.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예술가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는 화려한 것을 좋아했고 특히 메달들을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을 즐겨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예술가묘역에 있는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의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