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슈트라우스 왕조

요제프 슈트라우스(Josef Strauss)

정준극 2011. 11. 18. 06:54

요제프 슈트라우스(Josef Strauss)

 

요제프 슈트라우스(1827-1870)

 

우리가 잘 아는 저 유명한 '피치카토 폴카'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단독 작품이 아니라 동생인 요제프 슈트라우스와의 공동작품이다. 비엔나 신년음악회의 레퍼토리로 자주 등장하는 '오스트리아의 마을제비'(Dorfschwalben aus Österreich)는 요한 슈트라우스가 아니라 동생인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단독 작품이다. '조국행진곡'(Vaterlandische Marsch)도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공동작품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동생 요제프가 주도하여 작곡한 작품이다. 요제프 슈트라우스(1827-1870)는 40여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생애를 살면서 무려 283개의 작품을 썼다. 대부분이 왈츠이다. 과연 '왈츠 킹'의 동생답다. 대표적인 왈츠로는 '우주의 음악'(Sphären-Klänge),  '황홀'(Delirien), '계약'(Transaktionen), '나의 생애는 사랑과 기쁨'(Mein Lebenslauf ist Lieb' und Lust), 그리고 폴카로는 앞에서 언급한 '피치카토 폴카'가 대표적이다. 이밖에도 여러 곡의 콰드리유(Quadrilles)와 기타 무곡을 작곡했다. 왈츠 '역동'(Dynamiden)은 단조(마이너)로 되어 있는 곡으로 그의 왈츠가 형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와는 색채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바로 아래 동생인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1827년 8월 20일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요세프가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들어가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기를 원했다. 그러나 요제프의 음악적인 재능을 숨길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자 어머니는 큰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함께 요제프의 음악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아마 남편이었던 요한 슈트라우스 1세에 대한 반감으로 세 아들을 모두 음악가로 만들어서 아버지보다 더 유명해지게 하여 복수를 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요제프는 프란츠 안톤 리스(Franz Anton Ries)라는 사람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본격적으로 배웠으며 작곡은 프란츠 돌레샬(Franz Dolleschal)이라는 사람에게서 배웠다.

 

요제프는 음악에 몰두하기 전에 엔지니어로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잠시동안이지만 비엔나 시청에서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는 말이 끄는 도로청소 장치를 개발하기도 했다. 빗자루가 돌아가게 하여 거리를 청소하는 장치이다. 그리고 수학적 문제에 대한 저서도 두권이나 출판했다. 요세프는 드믈게 보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어서 화가, 시인, 극작가, 가수, 작곡가, 발명가였다. 시청에서의 일은 그만 둔 그는 형이 운영하는 오케스트라에 동생인 에드아르드와 함께 들어갔다. 1853년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병에 걸려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자 요제프가 한동안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왈츠를 사랑하는 비엔나의 사람들은 요제프가 음악활동의 초기에 작곡한 왈츠에 대하여 찬사를 보냈다. 이에 힘입은 그는 왈츠의 작곡가로서 계속 활동키로 결심했다. 요제프는 식구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페피'(Pepi)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어느때 형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요제프에 대하여 '페피는 나나 에드아르드보다도 더 재능이 많다. 나는 다만 더 유명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요제프는 1857년 6월 8일 비엔나의 성요한 네포무크 교회에서 카롤리네 프루크마이어(Caroline Pruckmayer)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딸 하나를 두었다. 카롤리네 안나 슈트라우스(Karoline Anna Strauss)였다.

 

요제프는 병약하였다. 어지러워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두통이 심했다. 1870년 봄에 폴란드에서 연주회를 가질 때에는 지휘하러 단상에 올라갔다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마침 연주여행에 동행하였던 부인이 그를 급히 비엔나의 히르센하우스로 옮겼다. 요제프는 그해 7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의사는 사인을 혈액의 분해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폴란드에서 그 전날 밤중에 술취한 러시아 군인들이 요제프에게 왈츠를 연주하라고 강요하자 이를 거절하였더니 러시아 군인들이 무조건 요제프를 구타하여 결국 그 영향으로 뇌에 이상이 생겨 혼절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부인이 부검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요제프의 시신은 생맑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그후 중앙공동묘지의 예술가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나중에 그의 어머니와 부인도 합장되었다. 만일 요제프가 더 살았더라면 형인 요한보다 더 훌륭한 무곡들을 더 많이 작곡했고 더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인 요한은 당시 오페레타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왈츠나 폴카는 거의 작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공동묘지 예술가묘역의 요제프 슈트라우스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