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슈트라우스 왕조

요한 슈트라우스 3세(Johann Strauss III)

정준극 2011. 11. 18. 14:27

요한 슈트라우스 3세(Johann Strauss III)

슈트라우스 왕조의 마지막 보루

 

요한 슈트라우스 3세(1866-1939)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알겠는데 요한 슈트라우스 3세는 또 누구냐고 궁금해 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3세라는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의 아들로서 분명히 슈트라우스 왕조의 일원이다. 그는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의 명맥을 부활시킨 사람이다. 그는 지휘자 겸 작곡가로서 몇 곡의 왈츠곡과 오페레타도 남겼다. 그만하면 슈트라우스 왕조의 일원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반복되는 설명이지만, 상단의 사진에서 보는 대로 요한 슈트라우스 3세라는 사람의 할아버지는 '라데츠기 행진곡'을 작곡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이며 큰 삼촌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작곡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이고 작은 삼촌은 '오스트리아 마을제비'를 작곡한 요제프 슈트라우스이며 아버지는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이다. 1901년에 그의 아버지인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가 뜻한바 있어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를 해산하자 주위의 사람들은 그럴수가 없다고 하면서 누군가 나서서 슈트라우스 가문의 전통을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때쯤해서 에두아르드는 음악활동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은퇴하여 집에만 눌러 있었다. 얼마후 요한 슈트라우스 3세는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를 다시 구성하여 연주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3세의 음악적 재능은 한동안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것이었다. 다만, 큰 삼촌이 되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만이 그의 재능을 믿고 음악가로서 자질이 개발될수 있도록 코치하였으나 오히려 그의 아버지인 에두아르드는 그것이 못마땅해서 형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다투기를 반복하였다. 또 한가지 그의 재능이 충분히 알져지지 못한 것은 당시 급변하는 세태때문이었다. 비엔나는 오페레타의 백은시대(Silver Age)에 들어섰다.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왈츠보다는 좀 더 대중적인 음악이 인기를 끌었다. 프란츠 레하르와 오스카르 슈트라우스는 오페레타로서 비엔나의 음악계를 주도하였다. 슈트라우스에 대한 인기는 점차 수그러 들던 때였으므로 요한 슈트라우스 3세의 활동이 빛을 보지 못한 것도 숨길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실상 요한 슈트라우스 3세는 작곡에도 재능이 많았지만 오히려 지휘자로서 더 활동하였다. 그는 가문의 전통인 포라가이거(Vorgeiger) 스타일로 지휘를 하면서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그는 단 한 편의 무대작품을 남겼다. 1898년에 작곡한 3막의 오페레타 '고양이와 쥐'(Katze und Maus)였다. 그해 12월 23일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에서 초연을 가졌다. 초연은 실패였다. 평론가들은 지루하고 시시한 작품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는 자기로 인하여 슈트라우스라는 이름이 초라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작곡자의 이름을 가명으로 썼다. 그는 '고양이와 쥐'를 잊기로 하고 다만 그 오페레타에서 사용했던 음악을 발췌하여 왈츠 '실비아넨'(Sylvianen)과 '레오니'(Leonie)에 사용하여 오늘날까지 남아있게 했다. 1900년대에 들어와서 레코드가 실용화되기 시작하였을 때 그는 도이치 그라마폰과 계약을 맺어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로서 슈트라우스 가족들의 작품을 8장의 싱글에 취입하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3세는 슈트라우스 가족 중에서 처음으로 레코딩을 실현한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영국의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대관식 왈츠'(Krönungs-Walzer )와 '세상은 용감한 자의 것'(Dem Muthigen gehört die Welt)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3세는 1939년 1월 9일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