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델손과 살비니(Adelson e Salvini) - Adelson and Salvini
Vincenzo Bellini(빈센초 벨리니)의 첫 오페라
빈센초 벨리니(1801-1854)
'아델손과 살비니'(Adelson e Salvini)는 빈첸초 벨리니의 3막 오페라 세리세리아로서 대본은 안드레아 레오네 토톨라(Andrea Leone Tottola)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토마 마리 드 바퀼라 다르노(François-Thomas-Marie de Baculard d'Arnaud: 1718-1805)의 소설 Les Épreuves du sentiment(감정 테스트)를 바탕으로 썼다. 다르노의 '감정 테스트'는 프로스페레 드라마르(Prospere Delamare)가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한바 있다. 벨리니는 생애동안 모두 10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아델슨과 살비니'는 첫번째 오페라이다. 그가 아직도 나폴리의 산 세바스티안 음악원에 다닐 때에 작곡한 것이다. 그가 23세 때였다. 나폴리의 산 세바스티안 음악원은 전도가 유망한 학생들의 오페라(주로 비극)를 일반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었다. 벨리니는 비극 오페라보다는 오페라 세미세리아의 형태로서 '아델슨과 살비니'를 작곡했다. '아델슨과 살비니'는 1825년 2월 12일 산 세바스티안 음악원의 학교극장(Teatro del Conservatorio di San Sebastiano)에서 초연되었다. 벨리니는 '아델슨과 살비니'를 오페라 전문극장에서 공연키 위해 여러번 손질을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벨리니의 생애 동안 일반극장에서 공연되지 못하였다.
카타니아에 있는 빈센초 벨리니 기념상
벨리니가 '아델손과 살비니'를 작곡하게 된 배경에는 흥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벨리니는 나폴리음악원을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예비교사로 있을 때에 우연히 맛달레나 푸마롤리스라는 아가씨를 알게 되었다. 맛달레나는 나폴리에서 상당히 상류층에 속한 가정의 딸이었다. 벨리니는 어느날 맛달레나 푸마롤리스의 집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벨리니도 잘 생겼지만 맛달레나도 무척 예쁘게 생긴 여자였다. 맛달레나의 아버지는 벨리니가 피아노도 잘 친다는 것을 알고는 벨리니에게 맛달레나의 음악 가정교사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벨리니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벨리니와 맛달레나는 어느덧 깊이 사귀는 입장이 되었다. 맛달레나의 부모는 두 사람이 사귄다는 것을 알자 '장래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을뿐 아니라 가난한 청년'이라면서 벨리니가 더 이상 맛달레나를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 결국 벨리니는 가정교사 자리에서 쫒겨났다. 벨리니는 오페라를 작곡해서 유명해지면 맛달레나 아버지로부터 호감을 얻어서 맛달레나와의 결혼을 허락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여 만들어 낸 것이 비록 일반극장이 아니라 음악원 극장에서 공연된 것이지만 '아델손과 살비니'였다. 아델손과 살비니'는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에 그후부터 그해가 저물도록 매주 토요일에 학교 극장에서 의례껏 공연되는 작품이 되었다. 그후 벨리니는 친구를 통해서 맛달레나의 아버지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넣었다. 맛달레나의 아버지는 결혼을 허락하기는 커녕 그동안 벨리니가 맛달레나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두 찾아서 벨리니를 대신해서 갔던 친구에게 던져주면서 '우리 딸은 피아노나 치는 가난한 사람과 절대로 결혼할수 없다'고 선언했다. 기록에 따르면 맛달레나의 아버지는 벨리니를 suonatore di cembalo(쳄발로의 소음을 내는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벨리니는 더 유명해져야 겠다고 마음 먹고 '비안카와 제르난도'를 열심히 작곡했다. '비안카와 제르난도'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에서 공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로써 벨리니의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얼마후 맛달레나의 아버지는 벨리니가 '비안카와 제르난도'로서 성공을 거두었고 그만하면 상당히 관찮은 청년이라는 소리를 들었던지 생각을 달리했다고 한다. 그래서 벨리니의 친구에게 '벨리니가 다시한번 청혼해 온다면 생각은 해 보겠다'라고 넌지시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맛달레나 아버지의 그런 언질은 너무 늦게 벨리니에게 전달되어서 어떤 액션이 취해지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오페라 세미세리아(Opera Semiseria: Semi-serious opera)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한 장르로서 19세기 초에서 중반까지 유행했던 것이다. 오페라 세미세리아는 코믹한 요소도 포함하고 있지만 파토스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목가적인 세팅을 지니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와도 관련이 있다고 할수 있다. 오페라 세미세리아에는 바소 부포(Basso buffo)가 등장하므로서 비극적인 오페라(Tragic opera) 또는 멜로드라마와 구별된다. 대표적인 예는 도니체티의 '샤무니의 린다'이다. 또 다른 예로서는 로시니의 '도둑 까치'(La gazza ladra)이다. 벨리니의 '몽뮤병자'(La sonnambula)도 오페라 세미세리아의 범주에 들어갈수 있지만 바소 부포가 등장하지 않으므로 오페라 세미세리아로 간주하기가 어렵다. 산 세바스티안 음악원은 나폴리에 있는 대표적인 음악원으로 현재는 산 피에트로 아 마옐라(San Pietro a Majella) 구역에 있다. 원래는 수도원 부속건물이었다. 산 세바스티안 음악원을 거쳐간 사람들로서는 알레싼드로 스칼라티, 페르골레지, 도메니코 치마로사, 로시니, 벨리니, 도니제티, 그리고 비토리오 몬티를 들수 있다.
'아델손과 살비니'는 코믹한 면이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원 학생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 얼마큼 인기가 있었느냐하면 음악원은 2월의 초연 이래 연말까지 거의 주말마다 벨리니의 '아델슨과 살비니'를 공연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산 세바스티안 음악원에서 벨리니의 '아델슨과 살비니'가 대인기를 끌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 지배인인 도메니코 바르바자가 벨리니를 직접 찾아와 새로운 오페라의 작곡을 의뢰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비안카와 제르난도'(Bianca e Gernando: 1826)이었다. '비안카와 제르난도'는 2년후에 '비안카와 페르난도'(Bianca e Fernando)라는 타이틀로 바뀌어 공연되었다. 벨리니의 초기 작품들은 대체로 로시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벨리니의 위대함을 엿볼수 있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곳곳에 스며 있다.
벨리니는 23세의 학생으로서 '아델손과 살비니'를 작곡했기 때문에 무언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으로 초연 이후 계속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1829년에 비로소 수정본을 일반극장에서 공연할수 있게 되었지만 사정상 성사되지 못하였다. '아델슨과 살비니'가 정식으로 극장에서 공연된 것은 초연으로부터 1백 수십년이 지난 1985년이었다. 벨리니의 고향인 시실리의 카타니아에서 실로 오랫만에 리바이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도메니코 데 메오(Domenico de Meo)라는 사람이 상당부분을 다시 손질하여 1992년 카타니아의 테아트로 마씨모 벨리니(Teatro Massimo Bellini)에서 공연을 가졌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무대는 아일랜드이며 시기는 17세기이다. 아름다운 넬리(Nelly: S)는 아일랜드의 귀족인 아델슨 경(Lord Adelson: Bar)과 정혼한 여인이다. 아델슨의 친구로서 아일랜드에 와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화가 살비니(Salvini: T)는 넬리를 보자 단번에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다. 넬리의 삼촌인 스트럴리(Struley: B)는 정치적인 문제로서 아일랜드에서 모든 법적인 권리를 박탈 당한다. 이 일에는 아델슨 경이 직접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넬리의 삼촌인 스트럴리는 아델슨을 원수처럼 여긴다. 그리하여 스트럴리는 아델슨에게 복수할 기회만 기다린다. 한편, 아델슨의 아버지는 아델슨이 넬리와 결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런던에 있는 다른 귀족가문의 여자와의 결혼을 주선하고 있다. 아델슨의 아버지는 그런 내용을 편지에 적어 아델슨에게 보낸다. 넬리를 사랑하고 있는 살비니가 그 편지를 우연히 본다. 살비니는 만일 아델슨이 런던의 귀족여인과 결혼하게 된다면 자기는 넬리와 결혼할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여 기뻐한다. 스트럴리는 아델슨에 대한 복수로서 아델슨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자기의 조카 넬리를 납치할 음모를 꾸민다. 살비니가 그 음모를 미리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넬리를 구출코자 한다. 살비니가 납치의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여인의 비명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난다. 살비니는 넬리가 죽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넬리가 없는 세상, 살아서 무엇하나!'라는 생각으로 자살코자 한다. 그때 죽었을 것으로 생각된 넬리가 나타난다. 살비니는 넬리가 아델슨을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다. 결론적으로 넬리는 아델슨 경과 예정대로 결혼하며 살비니는 그를 깊이 따르며 흠모하는 제자 패니(Fanny: Cont)와 결혼한다.
'아델손과 살바니' 음반
'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 > 추가로 읽는 366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91. 조지 프레데릭 헨델의 '게르마니아왕 오토네' (0) | 2011.11.23 |
---|---|
290. 조나단 도우브의 '플라이트' - 비행 (0) | 2011.11.23 |
288. 조지 프레데릭 헨델의 '인도왕 포로' (0) | 2011.11.22 |
287. 레이 레이의 '시 쉬'(西施) (0) | 2011.11.22 |
286. 아고스티노 스테파니의 '니오베' (0) | 2011.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