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미세스 브라운(Mrs Brown)

정준극 2012. 3. 1. 06:32

미세스 브라운(Mrs Brown)

 

영화 '미세스 브라운'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손에 키스를 하는 시종 브라운

 

Mrs Brown(미세스 브라운)은 1997년에 제작된 영국 영화의 제목이다. 미세스 브라운은 빅토리아 여왕을 말한다. 영국 사람들이야 미세스 브라운이라고 하면 '그거야 빅토리아 여왕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라며 모두 알아듣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잘 모를수가 있기 때문에 이 영화를 홍보할 때에 친절하게도 제목을 Her Majesty, Mrs Brown(여왕 폐하, 미세스 브라운)이라고 붙였다. 그러므로 미세스 브라운이 여왕폐하라는 것을 알도록 했다. 아니, 그런데 어찌하여 감히 여왕 폐하를 미세스 브라운이라고 부를수 있느냐고 의아해 하며 더구나 도대체 미세스 브라운이라고 하면 미스터 브라운은 누구를 말하느냐는 궁금증을 가질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브라운이라는 사람은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알버트를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말년에 혼자서 외롭게 지낼 때에 여왕을 모시던 시종이다. 브라운은 슬픔에 젖어 있는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무던히도 봉사하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두 사람이 어찌나 가깝게 지냈던지 사람들은 혹시 여왕이 브라운과 은밀히 재혼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여왕을 미세스 브라운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빅토리아 여왕을 여염집 부인네처럼 미세스 브라운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니 어이가 없지만 그렇다고 흥미가 없는 일은 아니다.

 

이 영화는 BBC 방송국이 방송용으로 그럭저럭 만든 것이다. 그런데 미라맥스라는 회사가 이 영화에 대하여 바짝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여 결국 BBC는 영화의 판권을 적당한 가격을 받고 미라맥스에게 양도하였다. 미라맥스는'미세스 브라운'을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보급하여 무려 1천3백만불이라는 수입을 올렸다. 영화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역은 007 영화에서 M으로 나와 인기를 끌었던 주디 덴치(Judi Dench)가 맡았고 시종인 브라운은 빌리 코널리(Billy Connolly)가 맡았다. 주디 덴치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상 후보에 올랐으나 안타깝게도 As Good As It Gets(이보다 더 좋을순 없다)에서 잭 니콜슨의 상대역으로 나온 헬렌 헌트에게 양보해야 했다.

 

'여왕 폐하 미세스 브라운' 영화 포스터. 주디 덴치 주연. 빅토리아 여왕과 시종 브라운.

 

빅토리아 여왕은 1861년 부군인 알버트공이 세상을 떠나자 상심 중에 런던을 떠나 스코틀랜드의 발모랄 성에서 은둔하며 지냈다. 그러기를 3년! 당시에는 여왕이 지금처럼 명목상의 존재가 아니라 실질적인 군주였다. 그런 여왕인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3년씩이나 시골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를 않고 있으니 국정에 어려움이 많을수 밖에 없었다. 가장 속이 타들어가고 있는 사람은 수상인 벤자민 디스라엘리(Benjamin Disraeli)였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국민들은 여왕이 해도 너무 한다고 하면서 은근히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심지어 언론도 국민의 상당수가 공화제를 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식의 보도를 했다. 디스라엘리 수상은 의회에서 열세이기 때문에 국민들의 여왕에 대한 인기가 계속 떨어진다면 참으로 황공하옵게도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해야 할지도 모르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디스라엘리 수상은 그저 빅토리아 여왕이 어서 칩거에서 벗어나 런던에 와서 정사를 주도하는 길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디스라엘 수상은 여왕의 비서실장(Chief secretary)을 만나 이 노릇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의논했다. 그리하여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여왕에게 충실하고 착실한 시종을 붙여 주어서 친하게 지내게 하고 그 시종으로 하여금 여왕을 설득해서 런던으로 돌아오도록 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든든한 모습의 브라운이 여왕의 특별 시종으로 배치되었다.

 

브라운과 빅토리아 여왕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느라고 그런지 하여튼 브라운은 여왕에게 런던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는 입밖에도 내지 못하고 오히려 여왕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충실한 시종 겸 착실한 친구로서 지내게 된다. 여왕은 남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슬픔에서 그나마 브라운 때문에 위로를 받아 하루하루를 안정된 상태로 살고 있는 처지였다. 그리하여 누구도 그렇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실 브라운은 여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주관할 정도로 여왕의 생활에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디스라엘리 수상과 여왕의 비서실장과 왕세자인 에드워드는 난감해 져서 오히려 브라운 작전이 역효과를 가져 왔다고 하면서 후회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다만, 이들이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브라운을 미워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브라운이 여왕을 부를 때에 Woman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Woman이라는 표현을 글자그대로 풀이한면 '여자여'라고 번역할수 있지만(성경에서도 예수께서 죄지은 여자를 부르실 때에 Woman 이라고 했음)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보슈' 또는 '아줌마' 정도로 번역할수 있다. 아마 브라운이 빅토리아 여왕을 부를 때에 사용한 Woman 이라는 호칭은 아무리 좋게 번역해도 '여사님' 정도일 것이다. 어쨋든 그것은 왕실의 규범에 크게 저촉되는 것이었다.

 

'여왕 폐하 미세스 브라운' 포스터

 

여왕의 비서실장은 이번 기회에 브라운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브라운을 불러서 '당신말야, 여왕 폐하를 아줌마라고 부르질 않나, 하여튼 좋지 않아. 왕세자님과 수상님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라고 겁을 준 후에 다시 한번 여왕을 설득하여서 런던으로 돌아가도록 해보라고 지시했다. 브라운은 이내 여왕에게 런던으로 돌아가서 종전처럼 정사를 보살피심이 타당하다고 사료된다고 진언하였다. 그러자 평소에 브라운의 말이라면 신뢰하던 여왕이 이번에는 브라운에게 디스라엘리 수상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로부터 세뇌당했다고 하면서 역정을 냈다. 여왕은 브라운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브라운이 여왕에게 평소대로 Woman 이라고 부르자 여왕은 단번에 화를 내며  '나는 대영제국의 군주이며 인도의 황제이다. 어찌하여 시종인 주제에 나를 Woman이라고 부르느냐?'면서 브라운을 크게 책망했다. 그러면서 비서실장을 불러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시중을 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브라운을 멀리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로부터 브라운과 여왕의 관계는 전처럼 친구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였다. 친구 이상이라는 말이 나와서 그렇지만 항간에서는 여왕과 브라운이 잠자리까지 함께 하는 사이라느니 또는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느니 하는 소문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문은 나중에 전후좌우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렇게까지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아무튼 브라운의 설득이 그나마 효과가 있었는지 또는 여왕 자신이 생각을 고쳐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얼마후에 여왕은 런던으로 돌아와 국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여왕에 대한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공화제를 찬성한다는 소리는 쑥 들어갔다.

 

스코틀랜드 발모랄 성에서의 빅토리아 여왕


브라운은 1883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빅토리아 여왕을 섬겼다. 여왕은 홧김에 브라운을 책망하였지만 곧 마음이 풀어져서 브라운을 다시 곁에 두고 시중을 들게 했다. 브라운은 말년에 특히 여왕의 주변에 대한 보안에 힘을 썼다. 혹시라도 발모랄 성이나 버킹검 궁전에 이상한 녀석이 침입하면 곤란하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왕의 주변을 경호하며 보안에 신경을 썼다. 너무나 지나치게 보안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곤해서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하지만 브라운은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해서 몸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날에는 여왕이 어디를 가는 중에 어떤 사람이 여왕을 살해하려고 달려든 일이 있었다. 브라운이 재빨리 움직여서 여왕을 보호하고 암살기도범을 체포하였다. 그날 저녁, 만찬에서 왕세자는 자기가 브라운에게 암살의 위험을 미리 얘기했기 때문에 그가 막을수 있었다고 하면서 자기의 공로인양 치켜 세웠다. 그 말을 들은 여왕은 자기에게 너무나 헌신적인 브라운을 다시 생각하게 되어 그에게 최고근무훈장을 새로 만들어 내리도록 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브라운과 함께 오래동안 지낸 스코틀랜드의 발모랄 성

                              

몇년후 브라운은 폐렴이 악화되어 중태에 빠지게 되었다. 며칠밤을 지새며 여왕의 숙소 부근을 순찰하느라고 병에 걸렸던 것이다. 브라운이 중병에 걸렸다는 얘기를 들은 여왕은 브라운의 침실을 방문하였다. 여왕은 찬 물수건을 브라운의 펄펄 끓는 이마에 대주면서 자기가 그동안 너무 소홀했었다며 사과했다. 여왕이 신하에게, 더구나 시종에게 사과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브라운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던 것이다. 얼마후 브라운은 숨을 거두었다. 브라운은 여왕을 모시면서 매일처럼 일기를 썼다. 자기만이 소중하게 간직한 일기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후 비서실장과 주치의가 일기를 발견하였다고 하지만 어떤 내용이 써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브라운의 일기책은 영원히 사라졌다. 여왕에 세상을 떠나자 에드워드 왕세자는 왕궁의 복도에 있던 브라운의 흉상을 벽에 던져버렸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멘트가 나온다. '존 브라운의 일기는 결코 찾지 못했다.'

 

'미세스 브라운'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