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미완성 오페라

알렉산드르와 록사느(Alexandre et Roxane)

정준극 2012. 3. 24. 09:42

알렉산드르와 록사느(Alexandre et Roxane) - 알렉산더와 록사나(Alexander and Roxana)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미완성 오페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아주 어릴 때에 아버지 레오폴드, 누이 난네를과 함께 파리에 가서 연주회를 가져 신동으로서 대찬사를 받은 일이 있다. 그런 그가 어느덧 22세의 청년이 되어 다시 파리를 찾았다. 모차르트가 아직도 잘츠부르크에서 지내고 있던 때인 1778년이었다. 모차르트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단신으로 슈트라스부르를 거쳐 파리에 갔다. 모차르트는 파리에 잠시 머물면서 '놀면 뭐하나?'라는 생각으로 시간이 나는대로 작곡을 하였다. 그중에서 하나가 오페라 '알렉산드르와 록사느'(Alexandre et Roxane)였다. 프랑스어 대본으로 된 2막의 오페라로 작곡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완성으로 남겼다. 아버지 레오폴드의 호출을 받고 급히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잘츠부르크를 통치하고 있던 대주교는 그가 고용하고 있는 모차르트가  파리로 출장을 갔다는 얘기를 듣고는 기분이 좋이 않아서 레오폴드를 통해 즉시 모차르트를 돌아오도록 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파리에 잠시 머물고 있던 모차르트는 뭇 여인들의 환심을 사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 여인들의 약혼자 또는 남편 또는 애인들은 심기가 몹씨 불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그중에서 대표되는 사람이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에게 편지를 보내어 모차르트를 어서 잘츠부르크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따라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지 않을수 없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 내용을 레이날도 한(Reynaldo Hahn: 1874-1947)이라는 베네주엘라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가 '모차르트'라는 오페라를 만들어 1925년에 초연한 것이 있다.

 

모차르트가 파리에서 작곡하다가 미완성으로 남긴 오페라 '알렉산드르와 록사느'는 무대공연이 이루어진 일이 없다. 다만, 당시 발레 안무가로서 명성이 높았던 장 조르즈 노베르(Jean-Georges Noverre)의 발레 작품인 Les petits riens(사소한 일)에 음악으로 사용할 계획도 있었다고 하지만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알렉산드르와 록사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박트리아의 공주인 록사나와 결혼하게 된 이야기이다. 록사나는 박트리아 왕국의 옥시아르테스(Oxyartes) 왕의 딸이라고 하지만 박트리아 왕국의 귀족의 딸이라는 주장도 있다. 여기서 잠시 박트리아 왕국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자면, 박트리아(Bactria)는 아베스탄 언어로 부크디(Bukhdi)를 그리스어로 표현한 것이며 BC 6세기경에 아무 다르야(Amu Darya)의 남쪽, 간다라(Gandhara)의 서쪽에 있었던 왕국이다. 중국어로는 따샤(大夏)라고 불렀다. 지역이 건조하고 더워서 그런 이름을 붙인것 같다. 박트리아는 알렉산더 이후 파사제국(페르시아: 이란)의 한 부분이 되었다. 현재는 아프가니스탄의 발크(Balkh) 지방에 속한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에서 멀지 않다. 박트리아는 그리스어로 박트리아나(Bactriana)라고 부르기도 한다.

 

록사느(록사나)는 페르시아어로 로샤니아(Roshania)라고 하며 '빛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알렉산더 대왕과 결혼한 록사느는 기원전 345년에 태어나서 35세로 죽임을 당한 여인이다. 오페라 '알렉산드르와 록사느'는 두 사람이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역사에 기록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은 역사적인 동방정복에 나서서 우선 제1페르시아제국이라고 하는 아키메니드 제국(Achaemenid Empire)을 정복하는 중에 박트리아 왕국을 침공한다. 아키메니드 제국은 기원전 6세기 경에 사이러스 대왕이 건국한 대제국이다. 알렉산더 군대의 침공을 받은 박트리아 왕국의 옥시야르테스 왕은 부인과 딸들을 현재의 사마르칸드 부근에 있는 천혜의 요새인 소그디아나(Sogdiana)로 피신케 한다. 소그디아는 바위로 된 높은 지역의 절벽요새로 아직까지 그 누구도 점령한 일이 없는 곳이다. 마치 유대 땅의 마사다와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소그디아나를 포위한 알렉산더는 방어군에게 항복을 권유한다. 그러나 방어군은 알렉산더의 병사들에게 날개가 달리지 않는한 절대로 소그디아나에 발을 디딜수 없다면서 항복을 거절한다.

 

알렉산더 대왕과 록사나의 결혼. 프레스코.

 

알렉산더는 병사들에게 소그디아나를 점령하고 싶은 자가 있으며 자원하라고 말한다. 알렉산더는 높이 치솟은 절벽을 기어 올라간 병사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한다. 3백명의 병사가 자원한다. 이들은 과거에 절벽을 기어 올라가 전투를 벌였던 경험이 있는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텐트를 칠 때에 사용하는 말뚝 못(페그)과 튼튼한 천을 가지고 밤중에 절벽을 기어 올라간다. 30명에 이르는 병사는 도중에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 그만큼 위험한 작전이다.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간 알렉산더의 특공대는 천을 흔들어 아래에 있는 알렉산더에게 신호를 보낸다. 이에 알렉산더는 다시한번 박트리아의 방어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그대들이 저 하늘 위를 바라보면 날개가 달린 우리의 병사들을 볼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박트리아의 방어군이 절벽 꼭대기를 바라보니 과연 수를 알수 없는 많은 병사들이 마치 날개를 펄럭이듯 커다란 천을 휘날리면서 함성을 지르고 있다. 박트리아의 방어군은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에 알렉산더의 병사들에게 순식간에 다다른 것을 보고 너무 놀래서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즉시 항복한다. 알렉산더의 심리전이 주효하여 소그디아나를 점령할수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소그디아나에서 록사나 공주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결국 결혼한다. 결혼합의가 되면 즉시 결혼식을 올리는 페르시아식 결혼 스타일이었다. 마케도니아 백성들과 병사들은 '록사나가 아시아에서 만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예외가 있다면 다리우스의 왕비가 있을 뿐이다'라면서 찬사를 보낸다. 신랑과 신부는 빵을 잘라 나누어 먹는 의식이 있다. 알렉산더가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빵을 자른다. 록사나의 아버지인 옥시야르테스는 비록 박트리아의 대부분이 알렉산더에게 정복되었지만 아직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알렉산더의 군대가 또 다른 바위요새를 만나자 옥시야르테스가 그곳에서 항전하고 있는 백성들과 병사들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만든다. 알렉산더는 항복한 백성들과 병사들을 명예롭게 대하여 준다. 옥시야르테스에 대한 신임이 높아지고 아울러 록사나에 대한 찬양의 소리가 높아진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야기는 더 이어진다.

 

알렉산더 대왕과 결혼한 록사느나(록사느). 영화에서.

 

이야기는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부터 시작한다. 록사나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아들인지 딸인지 알수 없다. 마케도니아의 군대에서는 누가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이 양분된다. 보병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생인 필립 3세를 지지한다. 필립 3세는 소심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동생이므로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다. 페르디카스 장군을 중심으로하는 알렉산더의 친위대(콤파니온 기병대)는 알렉산더의 첫째 부인인 록사나가 아들을 낳을지도 모르므로 그때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한다. 두 세력은 록사나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페르디카스 장군이 섭정으로서 마케도니아를 통치하며 필립은 명목상의 왕으로 존재한다고 타협을 한다. 그리고 만일 록사나가 낳는 아이가 아들이면 그가 당연히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는 것으로 합의한다.

 

록사나는 BC 323년에 알렉산드르 에고스(Alexandre Aigos)를 유복자로서 낳는다. 한편, 록사나는 비록 삼촌인 필립이 왕으로 있지만 자기의 어린 아들이 당연히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누구든지 자기 아들의 앞 길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제거키로 한다. 록사나는 알렉산더의 충실한 장군인 페르디카스(Perdiccas)의 도움을 받아 우선 알렉산더의 두번째 부인인 스타테이라(Stateira)를 제거한다. 스타테이라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3세의 딸이다. 록사나는 이어 자기 아들을 알렉산더 4세라고 칭하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후계자로 인정받도록 한다. 이어 록사나는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 모후와 연계하여 명의상의 왕으로 존재하고 있는 필립 3세와 그의 지지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어린 알렉산더 4세가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다. 페르디카스 장군이 계속 섭정으로서 활동한다. 페르디카스의 통치는 엄중한 독재였다. 불만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더구나 이집트에서의 군사작전이 실패로 돌아간다. 급기야 군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페르디카스는 부하장교에서 살해당한다. 마케도니아의 안티파트리드 왕조를 창시한 안티파테르가 비록 늙었지만 새로운 섭정으로 임명된다.

 

안티파테르는 록사나와 어린 왕, 그리고 추종자들과 함께 아직도 왕의 행세를 하고 있는 필립 3세를 불러놓고 알렉산더가 이룩한 제국을 통치하려면 모두 자기의 주장을 포기해야 할것이라면서 이들이 정치에서 손을 뗄 것을 강요한다. 결국 록사느와 필립 3세는 안티파테르의 세력이 두려워서 물러난다. 몇년후 안티페테르는 세상을 떠나면서 제국의 통치권을 자기 아들인 카산더(Cassander)에게 넘기지 않고 노장군인 폴리페르촌(Polyperchon) 장군에게 맡긴다. 폴리페르촌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립 2세,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에 이르기까지 충성을 다한 장군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카산더가 이집트의 톨레미, 필립 3세의 야심많은 부인인 유리디체 등과 손을 잡고 섭정 폴리페르촌 장군에게 반기를 든다. 폴리페르촌은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 등과 손을 잡아 대치한다.

 

폴리페르촌의 군대는 처음에 카산더를 군대를 물리치지만 해전에서 참패를 당한다. 그리하여 카산더가 마케도니아를 통치하게 되고 폴리페르촌은 록사나와 어린 알렉산더를 데리고 에피루스로 도망간다. 몇달후, 올림피아스는 에피루스에 있는 친척에게 폴리페르촌을 도와 마케도니아를 탈환케 해 달라고 설득한다. 그리하여 올림피아스와 폴리페르촌이 이끄는 군대가 카산더의 군대와 대치한다. 카산더의 군대는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와 대적할수 없다고 하며 투항한다. 폴리페르촌이 다시 마케도니아를 차지한다. 필립 3세와 그의 부인인 유리디체는 처형된다. 알렉산더 4세가 왕으로 복귀되며 올림피아스가 실질적인 섭정으로서 마케도니아를 통치한다. 전투에서 패하여 은인자중하던 카산더가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올림피아스를 공격한다. 결국 카산더의 군대가 마케도니아를 점령한다. 올림피아스는 즉시 처형 당한다. 록사나의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 4세는 체포되어 현재 마케도니아 중부에 있는 암피폴리스의 요새에 감금된다. 이어 주요세력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이에 의하면 알렉산더 대왕의 아들인 알렉산더 4세를 마케도니아의 적법한 왕으로 인정하되 그가 나이가 될때까지는 카산더가 섭정을 맡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산더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야심을 키워 나간다. 카산더는 BC 309년(또는 310년), 즉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떠난지 14년이 되던 해에 당시 13세이던 알렉산더 4세와 그의 어머니인 록사나를 독살한다. 그리하여 파란만장의 록사나의 일생도 35세로서 마감된다.

 

록사나를 만나는 알렉산더 대왕. 피에트로 로타리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