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실 오페라(Lost Operas)
공연을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음악의 일부 또는 전부가 분실되는 바람에 지금은 아쉬움만이 남아 있는 오페라들이 있다. 최근의 현황은 모르겠지만 야코포 페리 이후부터 비교적 근세까지의 분실 오페라 리스트를 작성해 보았다. 사실 그렇게 많지는 않다. 오페라 중에서는 작곡된 후 한번도 공연되지 않은 것들도 있고 겨우 한두번 정도는 공연되었으나 더 이상은 공연되지 않고 사장된 것들도 있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고 해도 대본과 음악 스코어는 남아 있기 때문에 어떤 오페라인지는 알수 있다. 다음의 리스트는 순전히 분실된 오페라로서 어떤 음악인지를 알 길이 없는 것들이다. 대체로 대본은 남아 있지만 스코어가 분실된 경우이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와 장 필립 라모의 오페라 중에서 분실된 것들이 가장 관심을 끈다.
● Dafne(다프네): 야코포 페리(Jacopo Peri: 1561-1633)의 오페라. 대본과 음악이 모두 사라졌다. 다만, 455 구절의 대사만 남았다. 오페라 '다프네'는 현대적 기준으로 보아 오페라라고 할수 있는 최초의 작품이다. 대본은 르네상스 말기 플로렌스의 시인인 오타비오 리누치니(Ottavio Rinuccini: 1562-1621)이 썼다. 그러므로 오타비오 리누치니는 오페라 연혁에 있어서 최초의 대본가라고 할수 있다. 이 오페라는 플로렌스 카메라타를 위해 작곡한 것으로 1597-98년 플로렌스의 팔라쪼 코르시(Palazzo Corsi)에서 초연되었다. 야코포 페리의 '다프네'는 그 후에 등장한 몬테베르디의 오페라에 비하여 규모가 작다. 몬테베르디의 '에우리디체' 또는 '버림받은 디도네' 등은 당시로서는 첨단 기계장비를 사용하여 놀라울 정도의 무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공중에서 사람들이 구름을 타고 왔다갔다하는 것은 보통이며 화산이 터지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장관도 무대 위에서 표현하였다. 하지만 야코포 페리의 '다프네'는 대여섯명의 악기연주자들이 마치 실내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처럼 차분하게 연주하는 것이었다. 야코포 페리는 대사에 음악을 붙여서 멜로디를 가진 스피치를 만들었다. 레시타티브의 시초라고 할수 있다. '다프네'의 내용은 아폴로가 님프인 다프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목동으로 변장하고 접근한다는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은 야코포 페리는 1600년 프랑스의 앙리4세와 메디치의 마리(Marie de Medici)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에우리디체'(Euridice)를 작곡하였다.
야코포 페리는 노래도 잘 불렀던 모양이다. 여러 오페라에 주연급으로 출연했다. 위의 그림은 야코포 페리가 '다프네'에 출연한 모습을 스케치한 것이다. 기왕 그릴 거면 좀 잘 그릴것인지...
● Dafne(다프네): 독일의 시인인 마르틴 오피츠(Martin Opitz: 1597-1639)의 독일어 대본에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ütz: 1585-1672)가 음악을 붙인 독일 최초의 오페라이다. 오늘날에는 징슈필(Singspiel)로 간주되고 있기도 하다. 하인리히 쉬츠는 이 오페라를 작곡함에 있어서 야코포 페리의 '다프네'를 모델로 삼았다. 대사로 구성된 드라마에 간혹 음악과 발레를 삽입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마르틴 오피츠는 이탈리아의 오타비오 리누치니의 대본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오피츠의 독일어 번역본은 너무나 훌륭하여서 나중에 오히려 이탈리아어로 다시 번역되어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이 사용하였다. 내용은 아폴로와 다프네의 사랑 이야기이다. 초연 이후 음악이 분실되어서 다시 공연되지 못하였다.
하인리히 쉬츠
● Didone abbanbdonata(버림받은 디도: 이탈리아의 바로크 작곡가인 토마소 알비노니(Tomaso Albinoni: 1671-1751)가 위대한 시인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1698-1782)의 대본을 바탕으로 작곡한 오페라이다. 메타스타시오의 '버림받은 디도'는 비르길의 '이네이드'(Aeneid)에서 '디도와 이니아스'(Dido and Aeneas)를 기본으로 하였다. 이 오페라는 1724년 12월 26일 베니스의 산카씨아노극장(Teatro San Cassiano)에서 초연되었다.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으로 된 오페라의 첫 베니스 공연이었다. 초연에서 디도의 역할은 유명한 배우겸 소프라노인 마리안나 불가렐리(Marianna Bulgarelli)가 맡았다. 젊은 메타스타시오의 후원자이며 애인이었다. 메타스타시오의 '버림받은 디도네'는 불가렐리의 집에서 완성되었다. 얼마후 교황의 칙령에 의해 여자는 무대에 서면 안된다고 하여서 불가렐리는 더 이상 오페라에 출연하지 않았다. '버림받은 디도네'는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와 트로이 전쟁 이후 이탈이라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이니아스의 사랑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비록 서로 사랑하지만 이니아스는 원래의 계획대로 카르타고를 떠나 이탈리아로 간다. 상심한 디도는 불 속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는다.
토마소 알비노니
● Dmitry Donskoy(드미트리 돈스코이):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의 첫 오페라로서 3막이다. 대본은 블리디미르 솔로구브(Vladimir Sollogub)백작이 썼다. 글링카의 '차르를 위한 삶'의 대본을 쓴 사람이닫. 돈스코이는 타르타르와의 전투인 쿨리코보전투(Battle of Kulikovo)에서 승리한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라이발을 제치코 크세니아와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쿨리코보전투라는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주인공의 러브 스토리에 중점을 둔 것이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보다도 러시아당국은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공연허가를 신청하자 '위대한 돈스코이를 무대에서 노래나 부르게 할수는 없다'면서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제를 '쿨리코보 전투'라고 붙이는 조건으로 공연허가를 내주었다. 1852년 생페터스부르그의 볼쇼이 카메니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루빈슈타인은 전곡을 완성하기 전에 서곡부터 완성하고 이를 1850년에 콘서트에서 선보였다. 그러나 출연진들의 미숙함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4회 공연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악보가 분실되어 찾을수 없었다. 다만, 서곡과 1곡의 아리아만이 남아 있다.
안톤 루빈슈타인
● Fomka the Foo(바보 폼카) 안톤 루빈슈타인(1829-1894)의 단막 오페라. 1853년 5월 12일 생페터스부르크의 알렉산드린스키극장에서 1회 공연이 대실패로 돌아가자 루빈슈타인은 다음날 극장을 찾아가서 스코어를 돌려 받고 다시는 러시아에서 활동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이날의 실패는 출연자들이 자기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고 헤매었을 뿐만 아니라 노래도 순전히 틀리게 불렀기 때문이었다. 루빈슈타인은 1854년에 봐이마르에 가서 프란츠 리스트에게 악보를 주고 공연을 부탁했으나 당장 공연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후 악보가 소리없이 사라져서 찾지를 못하였다.
● The Giant(거인):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Sergei Prokofiev: 1891-1953)가 8세 때에 작곡한 3막의 오페라이다. 현재 악보는 전체가 분실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인 프로코피에프는 여덟살 때에 아버지를 따라 모스크바에 가서 처음으로 오페라를 보았다. 보로딘의 '이고르 공'과 구노의 '파우스트'였다. 어린 프로코피에프는 자기도 오페라를 작곡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해에 '거인'(러시아어로는 Velikan)이 선보였다. 평소에 식구들과 함께 집안에서 오락으로 하던 연극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흉포한 거인이 어린 소녀인 우스티냐를 납치코자 한다. 소녀의 친구인 세르게예프와 예고로프가 착한 임금의 도움으로 소녀를 구출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프로코피에프는 대본에서 피날레에 거인이 왕을 물리치는 내용을 추가했다. 당시 절대군주제도에서 그런 아이디어는 금지였다. 프로코피에프는 더 이상 '거인'을 공연코자 하지 않았다. 따라서 악보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 A Guest of Honor(귀빈): '귀빈'은 래그타임 음악으로 유명한 스콧 조플린(Scott Joplin: 1868-1917) 의 첫번째 오페라로서 불행하게도 전체 악보가 분실되어 내용을 알수 없다. 이 작품은 1901년 백악관에서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첫 해에 미국의 민권지도자이며 교육가인 부커 워싱턴(Booker Washington)과 만찬을 가졌던 것을 테마로 삼은 것이다. 당시 루즈벨트의 정적들은 루즈벨트가 미국내 흑인 지도자의 회동을 가진 것을 비난하였다. 조플린은 오페라를 완성하고서 국회도서관에 저작권을 신청했다. 하지만 악보를 첨부하지 않았다. 그 전에 악보를 출판키로 했기 때문에 인쇄된 악보가 나오면 첨부할 생각으로 악보를 첨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없어서인지 나중에 국회도서관에 정식 악보를 제출하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악보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조플린은 '귀빈'을 어떤 순회오페라단을 위해 작곡했다. 그러나 악보가 사라졌기 때문에 출연진이 모두 흑인인지, 또는 흑백인이 혼합된 것인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1900년 초에 있어서는 어떤 공연이든지 흑백인이 혼합하여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믈었다.
스콧 조플린
● Il rapimento di Cefalo(세팔루스 유괴): 줄리오 로마노라고도 알려진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 1551-1618)의 작품이다. 피날레 합창과 아리아 1곡만이 남아 있다. 동료들인 피에로 스트로찌(Piero Strozzi)등이 협동하여 완성한 작품이다. 대본은 '이탈리아의 핀다르'라고 불리는 가브리엘로 키아브레라(Gabriello Chiabrera: 1552-1638)이 그리스 신화인 세팔루스와 아우로라(Aurora)를 바탕으로하여 썼다. 핀다르는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극작가이다. 이 작품은 야코포 페리의 '다프네'와 마찬가지로 1600년 메디치 가문의 마리와 프랑스의 앙리4세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음악행사의 하나로 작곡되었다. 초연은 1600년 10월 9일 플로렌스의 우피치 궁전에서였다. 3천명의 신사와 8백명의 숙녀가 참석했다고 한다. 5시간에 걸친 공연이었다. 제작비는 6만 스쿠디가 들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막대한 금액이었다. 야코포 페리도 하나의 역할을 맡아 출연했다. 그런데 그후'세팔루스의 유괴'는 바로 며칠전 공연된 '다프네'에 비하여 잘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팔루스의 유괴'가 무대장치에 대하여는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음악에 대하여는 지루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줄리오 카치니
● Undina(운디나: Undine - ondine). 페터 차이코브스키가 1869년에 완성한 3막 오페라이다. 그런데 차이코브스키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4년 후인 1873년에 스코어를 모두 없앴다. 다만, 아리아 1곡, 합창 2곡, 듀엣 1곡만을 남겼다. 그러므로 3막 전체가 공연된 일은 없다. 대본은 프리드리히 드 라 모트(Friedrich de la Motte)의 소설 '온디네'(Ondine)를 바탕으로 하여 블라디미르 솔로구브(Vladimir Sollugub)가 완성했다. 차이코브스키는 나중에 '운디나'에서 남겨 놓은 몇곡을 다른 작품에 사용하였다. 신부입장에서 사용한 곡은 교향곡 제2번 '리틀 러시아'(1872)에 사용하였고 서곡은 '눈아가씨'(1873)의 막간음악으로 사용했다. 또한 운디나의 아리아는 '눈아가씨'에서 렐(Lel)의 아리아로 수정하여 사용했다. 그리고 듀엣은 '백조의 호수'에서 지그프리트와 오데트의 듀엣으로 사용하였다. 보컬 파트는 첼로와 바이올린이 맡도록 하였다.
페터 차이코브스키
● 몬테베르디(1567-1643)의 분실 오페라: 10개 오페라 중 3개만 생존했다. L'Orfeo(오르페오), Il ritorno d'Ulisse in patria(율리시스의 조국 귀환), L'Incoronazione di Poppea(포페아의 대관)이다. 다음은 몬테베르디의 분실 오페라이다. 다음 3편의 오페라는 만투아 공국을 위해 작곡했던 것이다.
- L'arianne(아리안느: Ariadne): 몬테베르디가 만투아공국에 있을 때인 1608년 5월 만투아의 빈센초 곤자가 공작과 사보이의 마르게리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오페라. 오비드의 헤로이데스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다. 낙소스 섬에서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를 버리고 떠난 이야기, 그후 아리아드네는 바커스의 신부가 된다는 스토리이다. 이 오페라는 1607년 초연된 후 1840년에 베니스에서 리바이벌 되었으나 그후에는 Lamento d'Arianna(아리아드네의 탄식)이라는 긴 레시타티브와 아리아를 제외하고는 전체 음악이 자취를 감추었다. Lamento d'Arianna 는 몬테베르디가 별도로 출판했기 때문에 생존하였으며 지금도 콘서트의 레퍼토리로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 Le nozze di Tetide(테티데의 결혼): 몬테베르디는 만투아 공국으로부터 소외를 당했지만 몇몇 영향력있는 가신들과는 연락을 계속하고 있었다. 가신 중의 한 사람인 스트리지오(Striggio)는 1616년에 몬테베르디에게 만투아 공국의 계승자인 페르디난도 공작과 메디치의 카테리네의 결혼을 축하하는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요청하고 스토리는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영웅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으로 삼아 달라고 부탁했다. 완성일자는 그해 12월 9일로 잡았다. 그러나 몬테베르디는 성마르꼬성당의 크리스마스이브 미사곡을 작곡하느라고 바뻐서 '테티데의 결혼'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테티데의 결혼'은 공연이 취소되었다. 이후 대본과 음악이 사라졌다.
- Andromeda(안드로메다): 몬테베르디가 만투아 공국으로부터 의뢰받은 두번째 오페라이다. 하지만 몬테베르디는 만투아 공국에서 거의 쫓겨난 것과 같이 나왔고 더구나 산마르꼬대성당의 음악을 작곡해야 하며 여기에 건강까지 여의치 않아서 만투아가 의뢰한 '안드로메다'를 차일피일해왔다. 대본은 만투아 공국의 페르디난도 공작의 시종장인 에르콜레 마릴리아니가 썼다. 만투아 측은 이 오페라를 1618년 3월의 만투아 카니발에서 공연할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예정일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몬테베르디는 1619년으로 연기했다가 다시 1620년으로 연기했다. 만투아 측은 불쾌하게 생각하여 현재까지 진행된 악보를 가져오라고 했다. 앞 부분의 8파트 노래 등만이 완성되었다. 몬테베르디는 미완성인 '안드로메다'를 만투에 측에 제출했고 그 이후 그나마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작곡을 하다가 포기한 것으로는,
- La finta pazza Licori(가짜로 미친 리코리): 만투아 공국의 페르디난도가 1626년 세상을 떠나자 돈 빈센초가 자리를 이어 받았다. 가신인 스트리지오는 몬테베르디에게 빈센초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한 작품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몬테베르디는 세가지를 제안했다. 첫째는 토르쿠아토 타소의 서사시인 '예루살렘 해방'을 바탕으로 한 In combattimento di Tancredi e Colorinda(탄크레디와 콜로린다의 전투)였고 두번째는 역시 타소의 서사시로서 이슬람의 마법사인 아르미다와 기독교도인 영웅 리날도와의 이야기이다. 세번째는 줄리오 스트로찌의 희곡 Licori finta pazza inamorata d'Aminta(아민타의 사랑을 얻기 위한 리코리의 가짜 미친 행동)이었다. 만투아의 스트리치오는 세번째 것이 좋다고 하면서 몬테베르디에게 작곡을 시작하라고 했다. 미친척하는 것은 16세기 이탈리아 연극인 commedia dell'arte의 전통이었다. 주인공인 리코리는 처음에는 남자로, 그러다가 다시 여자로, 그러다가 마침내는 미친여자로 등장하여 결국 아민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데 성공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가짜로 미친 리코리'의 공연이 갑자기 취소되었다. 몬테베르디가 얼마나 많이 작곡해 놓았는지 알수 없다.
- Armida abbandonata(버림받은 아르미다)
베니스를 위해 작곡한 오페라 중에서 다음 작품은 분실되었다.
- Proserpina rapita(프로세르피네 약탈: The Rape of Proserpina): 몬테베르디의 파트론인 지롤라모 모체니고의 딸인 주스티나이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의뢰받은 작품이다. 대본은 스트로찌(Strozzi)가 썼다. 11630년 4월 16일 모체니고의 대저택에서 공연되었다. 놀랄만한 규모의 무대장치를 보여주는 공연이었다. 그후 다시는 공연되지 않았으며 스코어도 분실되었다. 다만, Come dolce oggi l'ametta 라는 곡만이 남아 있다. 몬테베르디가 별도로 간수했기 때문이다. 이 곡은 몬테베르디의 사후인 1651년에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집에 포함되어 출판되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인 플루토와 프로세르피네와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이다. 프로세르피네는 신들의 제왕인 주피터와 농사와 수확의 여신인 체레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여인이다. 목동 파키노(Pachino)가 프로세르피네를 보고 사랑에 빠져 번민한다. 파키노는 플루토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한다. 플루토는 파키노를 산으로 만들어 안정을 찾도록 해준다. 그러다가 플루토가 프로세르피네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플루토는 프로세르피네를 왕비로 삼겠다고 선언한다. 프로세르피네가 이런 법은 없다고 하면서 저항한다. 플루토가 프로세르피네를 강제로 약탈해 간다. 그리고는 프로세르피네의 수호자인 치아네를 아름다운 샘으로 만든다. 아름다운 샘을 본 프로세르피네는 마음이 변하여 플루토에게 순종키로 한다. 플루토는 프로세르피네의 아름다움과 순종하는 미덕에 감동하여 앞으로는 연인들을 공연히 거칠게 다루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프로세르피네 약탈'은 몬테베르디가 베니스의 극장을 위해 처음으로 작곡한 작품이다. 그런데 당시 귀족이나 부유층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오페라 또는 연극에서는 Rape(rapita)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결혼을 축하하는 방안이었다. rape 라고 하면 성폭행이나 강간을 연상하게 되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rape는 약탈 또는 강탈을 의미한다. 신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데려온다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하며 정절에 있어서도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하여 rape 라는 표현을 통하여 사랑의 권세를 선포하고 여성의 행동에 대한 적합한 범위를 얘기해 준다고 보면 된다.
- Le nozze d'Enea in Lavinia(에네아와 라비니아의 결혼): 1637년에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일반인을 위한 극장이 오픈되었다. 테아트로 산 카씨노(Teatro San Cassino)이다. 몬테베르디는 베니스의 오페라 극장을 위해 1640년부터 1643년 사이에 3부작을 완성했다. 첫번째는 1640년의 '율리시스의 조국 귀환'이었고 두번째는 '에네아와 라비니아의 결혼'(1641)이며 마지막이 1643년의 '포페아의 대관'이었다. 그중에서 '에네아와 라비니아의 결혼'만이 대본은 남아 있지만 음악 스코어가 완전히 사라져서 유감이 되고 있다. 몬테베르디의 역사적인 3부작은 트로이전쟁과 그 이후 이니아스(에네아)에 의한 로마의 탄생, 그리고 로마제국의 몰락을 장엄하게 그린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 3부작은 베니스 공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작곡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주노(Juno)는 비너스의 아들인 이니아스(에네아)와 라이툼 왕국의 라티노 왕의 딸인 라비니아의 결혼을 방해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한다. 그 중의 하나는 트로이 사람들과 라이툼(라틴)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트로이의 이니아스가 라이툼의 동맹군을 격파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니아스의 용맹함을 찬양한다. 라티노 왕은 그러한 아니아스와 자기의 딸 라비니아의 결혼을 주선한다. 주노도 이니아스의 영웅적인 용맹함을 치하하며 비너스 등과 함께 이니아스와 라비니아의 결혼을 축복한다. 라비니아는 이니아스의 첫번째 부인이다.
클라우이도 몬테베르디
● 장 필립 라모의 오페라 중에서 분실된 것으로는 다음의 3편이 있다. 모두 스코어만 분실되었다.
- Samson(삼손): 라모는 이 오페라는 그의 첫 오페라인 '이폴리트와 아리시'(Hippolyte et Aricie)의 후속으로 작곡할 생각이었다. 대본은 볼테르였다. 볼테르는 라모의 대단한 팬이었다. 두 사람은 1733년 12월에 합동하여 '삼손'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종교적인 주제의 오페라는 교회로부터 엄밀한 검토를 받아야 했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성서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어서 일반을 위해 공연된 것은 1732년 몽테클레어의 '입다'였다. 그러나 '입다'는 몇차례 공연된 후 교회의 압력으로 거두어 들여야 했다. 라모와 볼테르는 1734년 10월에 '삼손'의 거의 모든 파트를 완성하여 개인적으로 콘서트 형식의 연주회를 가졌다. 이 연주회가 끝난후 라모는 '삼손'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여 아예 전체를 완성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라모는 오페라 발레인 Les indes galantes에 치중키로 했다. 볼테르는 '삼손'이 라모의 최대 걸작이 될 것으로 믿었으나 라모가 포기하는 바람에 크게 실망하였다. 오늘날 볼테르의 대본은 남아 있지만 스코어는 실종되었다. 다만, 라모는 '삼손'에서 사용했던 음악의 일부를 훗날 다른 오페라에 사용하였다. 볼테르의 희곡은 생-생의 오페라인 '삼손과 델릴라'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다. 오페라-발레인 Les Indes galantes(친절한 인도신사)도 작곡을 했으나 스코어가 분실되었다.
- Linus(리누스): 1752년에 2막으로 작곡하였다. 라모의 후원자인 빌르로이(Villeroy)후작의 집에서 리허설하였으나 후작이 병에 걸려 들어눕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라모는 더 이상 공연을 주장하지 않고 악보를 회수하여 파기하였다. 더구나 '리누스'는 그가 작곡했던 Daphnise et Elge 와 흡사하기 때문에 굳이 무대에 올리고자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었다.
- Lysis et Delie(리시스와 델리): 1753년 11월 6일에 퐁텐블루에서 공연될 예정이었으나 별다른 이유없이 취소되었다. 그후 다시는 얘기를 들을수 없었고 악보는 실종되었다. 대본은 장 프랑수아 마르몬텔(Jean-Francois Marmontel)이 썼다. 라모가 이 오페라를 만들어 놓고 철수한 것은 아마도 이 오페라가 그 전에 만들어 놓았던 Dafnis et Egle와 너무 흡사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목동인 리시스와 델리는 오래동안 친하게 지내지만 친구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큐피드가 이들에게 사랑의 감정을 심어 주어서 결국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는 얘기이다.
장 필립 라모
'오페라 이야기 > 오페라 더 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르타세르세(Artaserse) 이야기 (0) | 2012.05.14 |
---|---|
신데렐라 오페라 이야기 (0) | 2012.04.21 |
영화를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 (0) | 2012.03.29 |
오페라 세계의 기록들 - 믿거나 말거나 4 (0) | 2012.02.27 |
오페라 세계의 기록들 - 믿거나 말거나 3 (0) | 2012.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