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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세르세(Artaserse) 이야기

정준극 2012. 5. 14. 10:29

아르타세르세(Artaserse) 이야기

 

아르타세르세. 로열오페라하우스 공연.

 

아르타세르세(Artaserse)는 BC 450년경 대제국인 페르시아의 왕이었다. 그는 BC 465년부터 BC 424년까지 무려 40여년간 페르시아제국을 통치하였다. 당연히 세계역사에 있어서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에피소드도 많았다. 그에 대한 에피소드를 이탈리아의 유명한 대본가인 메타스타시오(Metastasio)가 극본으로 만들었다. 메타스타시오의 극본을 가지고 무려 40여명의 극작가와 작곡가들이 연극과 오페라를 만들었다. 이제 오페라로 만든 대표적인 경우만을 짚어보고 그중에서 체코의 작곡가인 요세프 미슬리베체크(Josef Mysliveček: 1737-1781)의 아르타세르세를 간략히 소개코자한다. 다른 작곡가들의 오페라들도 모두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사용한 것이므로 스토리가 같다.

 

메타스타시오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사용하여 '아르타세르세'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를 처음으로 내놓은 작곡가는 이탈리아의 레오나드로 빈치(Leonardo Vinci: 1690-1730)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로마에서 공연되었다. 같은 해인 1730년에 독일의 요한 아돌프 하쎄(Johann Adolph Hasse: 1699-1783)가 '아르타세르세'를 베니스의 무대에 올렸다. 하쎄의 '아르타세르세'는 1760년에 나폴리에서도 공연되었다. 빈치와 하쎄에 이어 독일의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이 '아르타세르세'를 작곡하여 밀라노에서 공연하였고 같은 해에 이탈리아 브레스키아 출신의 피에트로 키아리니(Pietro Chiarini: 1715-1765)가 베로나를 위해 '아르타세르세'를 작곡하였다. 1743년에는 독일의 칼 하인리히 그라운(Carl Heinrich Graun: 1704-1759)의 '아르타세르세'가 슈투트가르트에서 공연되었으며 1744년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으로 로마에서 활동했던 도메네크 테라델라(Domenec Terradella: 1711-1751)의 '아르타세르세'가 베니스에서 공연되었고 1749년에는 이탈리아의 발다싸레 갈루피(Baldassare Galuppi: 1706-1785)의 '아르타세르세'가 비엔나에서 공연되었다. 18세기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거의 모두 신화를 주제로 삼거나 옛날 역사적인 사건들을 내용으로 삼았다. 메타스타시오의 '아르타세르세'도 그러한 추세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요세프 미슬라브체크

 

한편, 1760년에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ohann Christian Bach: 1735-1782)의 '아르타세르세'가 런던에서 공연되었으며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해인 1774년에는 체코의 요세프 미슬리베체크의 '아르타세르세'가 나폴리에서 공연되었다. 그리고 1806년에는 포르투갈의 마르코스 안토니오 다 폰세카 포르투갈(Marcos Antonio da Fonseca Protugal: 1762-1830)의 '아르타세르세'가 리스본에서 공연되었다. 이상의 오페라들은 모두 메타스타시오의 이탈리아어 대본에 바탕을 둔 것이다. 메타스타시오의 이탈리아어 대본을 영어로 번역하여 처음 오페라로 만든 사람은 영국의 토마스 아르느(Thomas Arne: 1710-1778)이었다. 모차르트의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아리아인 Conservati fedele(K 23: 1765)는 메타스타시오의 대본 중에서 첫 장면의 마지막에 나오는 몬다네(Mondane: 아르타세르세의 누이동생)의 이별의 대사를 사용한 것이다. 모차르트는 메타스타시오의 다른 대본들을 사용하여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 1734)와 '목동 왕'(Il re pastore: 1751)을 작곡한바 있다.

 

메가비세가 아르바체가 가지고 있는 피묻은 칼을 발견하고 그를 세르세 왕을 죽인 범인으로 몰고 간다.

                               

'아르타세르세'는 1734년에 파스티시(Pastiche) 작품으로 공연되어 유명해진 일도 있다. 아틸리오 아리오스티(Attilio Ariosti), 니콜라 포르포라(Nicola Porpoa), 리카르도 브로스키(Riccardo Broschi) 등의 노래를 취합하여 만든 작품이었다. 이 공연에서 리카르도 브로스키의 동생인 유명한 화리넬리(Farinelli)가 주역으로 출연하여 Son qual nave ch'anitata(나는 파도를 가르는 배)를 불렀다. 이 노래는 카스트라토로서 화리넬리의 명성을 한껏 높여준 것이었다. 아르타세르세는 Artaxerse(아르타크세르세)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체코의 요세프 미슬라베체크(Josef Mysliveček)의 '아르타세르세'는 1774년 8월 나톨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전 3막의 오페라로서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사용한 작품이다. 메타스타시오의 '아르타세르세'는 원래가 오페라를 위해 만들어진 대본이므로 이를 이용하여 오페라를 작곡하는 일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메타스타시오의 대본(dramma per musica)이 1730년대에 등장하였을 때에는 작곡가들이 그의 대본을 거의 수정하지 않고 사용하였으나 40여년이 지난 1770년대에 들어와서는 내용을 조금씩 수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되었었다. 그래서 어떤 장면은 삭제되기도 하고 어떤 장면은 재편성되기도 했다. 요세프 미슬라베체크의 '아르타세르세'는 나폴리왕국의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공연되었다. 미슬라베체크는 그 전해인 1773년에도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로몰로와 에르실리아'(Romolo ed Ersilia)를 작곡하여 공연한바 있다. 미슬라베체크의 '아르타세르세'는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나폴리왕국은 미슬라베체크에게 다른 오페라의 작곡도 위촉하였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데모폰테'(Demofoonte), '에치오'(Ezio) 등이었다. 모두 나폴리 궁전에서 공연되었다.

 

메가비세가 반란을 획책한다. 현대적 연출.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아르타세르세는 BC 5세기경 페르시아의 왕으로 아르바체(Arbace)의 친구이며 세미라(Semira)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아르타세르세는 소프라노 또는 카스트라토가 맡는다. 아르타세르세는 세르세1세의 아들이다. 마찬가지로 아르바체도 소프라노 또는 카스트라토가 맡는다. 만다네(Mandane: S)는 아르타세르세의 여동생으로서 아르바체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세미라는 만다네의 동생이다. 아르타세르세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아르타바노(Artabano: T)는 만다네와 세미라의 아버지로서 왕궁의 근위대장이다. 메가비세(Megabise: A)는 아르타세르세의 친구로서 페르시아군의 장군이다.

 

만다네

 

세르세 왕의 딸인 만다네와 왕의 근위대장인 아르타바노의 아들인 아르바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러나 세르세 왕은 이들의 결혼을 반대한다. 결국 세르세 왕은 아르바체를 왕궁에서 추방한다. 막이 열리면 세르세궁전의 정원이다. 달빛이 비치는 밤이다. 추방당한 아르바체가 사랑하는 만다네를 만나보기 위해 밤중에 왕궁의 담을 넘어 들어온다. 아르바체와 만다네는 서로 사랑하는 심정을 다시한번 표현한다. 만다네는 아버지인 세르세 왕이 아르바체를 추방한 것에 대하여 크게 절망한다. 이때 아르타바노가 피묻은 칼을 들고 나타난다. 근위대장인 아르타바노는 세르세 왕이 자기 아들과 만다네의 결혼을 반대하고 오히려 자기 아들을 추방한데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으며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으로 세르세 왕을 암살하였던 것이다. 아들 아르바체를 만난 아르타바노는 자기가 세르세 왕을 살해하였음을 고백하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기의 피묻은 칼과 아르바체의 칼과 바꾼다.

 

메가비세가 아르바체를 세르세 왕을 살해한 범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세르세 왕의 젊은 아들인 아르타세르세가 경비병들을 데리고 급히 나타난다. 아르타바노는 아르타세르세에게 세르세 왕이 방금 살해당했다고 말하고 아르타세르세의 형인 다리오가 살인자라고 비난한다. 아르타바노는 '그 누가 왕궁에 침입할수 있단 말인가? 그 누가 왕의 침실까지 들어갈수 있단 말인가? 왕관에 욕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소리친다. 이에 아르타세르세는 근위대장인 아르타바노에게 당장 다리오를 찾아 죽여 부왕의 죽음에 복수하라고 명령한다. 모두들 사라진후 정원에 남은 아르타세르세는 아르타바노의 딸이며 친구의 아르바체의 동생인 세미라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다.

 

왕궁에서 다리오에 대한 처형이 선포된다. 그때 아르타세르세의 친구로서 페르시아군의 장군인 메가비세가 아르바체를 쇠사슬에 묶어 끌고 들어온다. 메가비세는 아르바체가 피묻은 칼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그가 세르세 왕을 살해하였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메가비세도 세미라를 사랑하고 있다. 궁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르바체를 처형하라면서 비난한다. 그러나 아르타세르세는 오랜 친구이며 사랑하는 세미라의 오빠인 아르바체가 부왕인 세르세 왕을 살해하였을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의혹을 품는다. 아르타세르세는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쇠사슬에 묶인 아르바체를 풀어주고 비밀통로를 통해 도망가도록 도와준다. 이에 아르타바노의 부추김을 받은 메가비세가 아르타세르세을 축출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아르타세르세의 무덤 조각

                             

아르타세르세는 태양신의 사원에서 모든 귀족들이 모인 가운데 새로운 왕으로서 서약을 갖는다. 아르타세르세는 법을 준수하고 백성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할 것을 서약하고 이어 서약의 방편으로서 성배에 담긴 술을 마시려 한다. 사악한 아르타바노가 성배에 독을 타놓았다. 아르타세르세가 성배를 들어 마시려 할때 전령이 급히 뛰어 들어와서 메가비세의 반란군이 궁전의 문앞에 당도하여 당장이라도 궁전을 침입코자 한다는 소식을 전한다. 아르타세르세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뜻하지 아니하게도 비밀통로를 통해 왕궁에서 탈출한 아르바체가 반역자인 메가비스를 죽이고 등장한다. 그렇게 하여 상황이 역전된다. 아르타세르세는 아르바체가 무죄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아르타세르세는 아르바체가 무죄임을 확신하기 위해 새로운 왕으로서 자기가 마시려던 성배의 술을 대신 마시도록 한다. 아르타세르세는 성배에 독약이 들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르타바노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인 아르바체가 독약을 마시려고 하자 분연히 앞에 나서서 실은 자기가 세르세 왕을 살해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아르타세르세를 죽이기 위해 성배에 독을 탄 사람도 자기라고 밝힌다. 근위병들이 달려 들어 아르타바노를 쇠사슬에 묶고 감옥으로 끌고 간다. 아르타세르세는 세미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아르바체의 충성심을 깊이 생각하여 비록 부왕을 살해한 중죄인이지만 아르타바노를 사형에 처하지 않고 멀리 추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오페라는 아르타세르세와 세미라, 아르바체와 만다네가 새롭게 사랑으로 결합하여 모든 사람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아르타세르세의 화려한 의상. 알토 크리스토퍼 에인슬리(Christopher Ainslie)

                                    

['아르타세르세' 난동사건]

 

1763년 코벤트 가든에서 토마스 아르느의 '아르타세르세'가 공연되는 중에 일부 관객들이 무대로 올라와 난동을 부리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다. 공연을 잘못했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입장료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공연이 거의 끝날때 쯤해서 입장하는 사람에게는 반값만 받았다. 대개의 경우에 본공연이 끝나면 앙코르 비슷하게 다른 짧은 연극이나 막간 오페라를 마치 뒷풀이 형식으로 공연하는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뒷풀이 공연만을 보기 위해 일부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입장료의 반만 받았다. 그런데 1763년 '아르타세르세'가 공연되었을 때 극장 측은 반값 입장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끝날 때쯤해서 입장하더라도 온값을 내고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응답은 난동이었다. 일부 관중들은 몽둥이를 들고 무대에 올라와 무대장치를 부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극장의 내부시설들을 파괴하였다. 이들은 반값 제도를 부활하라고 요구했다. 극장측이 이들의 요구를 수용했는지, 또는 이들을 난동죄로 고발하여 벌을 받게 했는지에 대하여는 모른다. 다만, 런던의 극장에서는 간혹 그런 난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대부분 극장은 아랫층에 좌석이 없고 모두 서서 관람하는 스타일이었다. 당연히 아랫층의 입장료는 저렴했다. 그런 장소를 Footman's gallery라고 불렀다. 갤러리는 갤러리이지만 하인들이나 수행원들의 갤러리라는 뜻이었다. 18세기 영국의 관객들은 혈기왕성하였다.

 

아르타세르세 공연 중의 난동. 1763년 런던 코벤트 가든 오페라 하우스

 

[한마디 더] 토마스 아르느는 영국인들이 모두 즐겨 부르는 애국적 노래인 Rule Britannia의 작곡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오페라 '알프레드'(Alfred)에 나오는 곡이다.

[한마디 다시 한번] '아르타세르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토마스 아르느가 이탈리아 스타일로 작곡한 가장 야심적인 대표작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대유행이어서 대본도 모두 이탈리아어로 된 것을 사용했다. 그러나 토마스 아느는 이탈리아 오페라로서는 처음으로 영어 대본을 사용했다. 1791년에 런던을 방문했던 하이든은 토마스 아느의 '아르타세르세'를 본후 '이렇게 훌륭한 영어 대본의 오페라가 있다는 것은 생각치도 못했다.'라고 말한바 있다. 한편, 아르타세르세에 대한 이야기가 주전 5세기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를 공연할 때에는 주인공들이 당시의 평범한 의상을 입고 나왔으며 여자들은 18세기의 패셔너블한 의상을 입고 나왔다. 일견 관중들에게는 친밀감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시대적인 배경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의상들이었다.

 

토마스 아르느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음반 커버. 타이틀 롤은 커운터테너인 크리스토퍼 에인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