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의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후원자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정준극 2012. 4. 4. 19:52

모차르트의 후원자 고트프리트 프라이헤르 반 슈비텐(Gottfried, Freiherr van Swieten)

하이든, 베토벤도 후원

모차르트의 장례식 주선, 미망인 돕기 위한 레퀴엠 연주회 개최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

 

고트프리트 프라이헤르 반 슈비텐(Gottfried, Freiherr van Swieten)은 비엔나의 모차르트를 후원해 준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 이전의 하이든도 후원했고 모차르트 이후의 베토벤도 후원한 사람이었다. 반 슈비텐은 평소에 모차르트를 이모저모로 도와주기도 했지만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정성으로 모차르트를 위하고 그의 가족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는 1791년 12월 5일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누구보다도 먼저 그날 밤으로 모차르트의 집을 방문하여 상심해 있는 콘스탄체를 비롯한 유가족을 위로했다. 반 슈비텐은 모차르트의 장례식을 경비를 내어 치루어주었다. 반 슈비텐은 1793년 1월 2일 비엔나에서 콘스탄체를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하였다. 모차르트의 유작으로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가 완성한 '진혼곡'이 연주되었다. 반 슈비텐은 작곡가이기도 했다. 외교관으로서 파리에 체류하고 있을 때에 오페라와 교향곡을 작곡했다. 물론 그의 작품들은 그가 전문적인 작곡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숙한 점이 있어서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거의 공연되지 않고 있지만 음악학자들은 어떤 작품은 상당히 우수하다는 평을 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반 슈비텐의 코믹 오페라는 Les talens a la mode, Colas, toujours Colas, 그리고 하나는 스코어가 분실된 La chercheuse d'esprit 이다. 교향곡은 10편을 작곡했지만 남아 있는 것은 7편이다.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은 외교관이었으며 도서관장이었고 작곡가였다.

 

반 슈비텐이 모차르트를 처음 만난 것은 1768년이었다. 당시 반 슈비텐은 33세였고 모차르트는 겨우 11세의 소년이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와 누이 난네를과 함께 두번째로 비엔나를 방문하였다. 명성을 얻고 돈도 벌기 위해서였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에 따르면 반 슈비텐은 모차르트의 초기 오페라인 La finta semplice(가짜 약)의 작곡을 격려하였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를 떠나 1781년에 비엔나에서 지내기 위해 왔다. 모차르트는 툰(Thun)백작부인의 살롱에서 그의 근작 오페라인 '이도메네오'의 발췌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때 반 슈비텐도 참석했다. 당시 반 슈비텐은 요셉2세의 궁정에서 요직에 있었기 때문에 요셉2세 황제가 모차르트에게 새로운 독일어 오페라의 작곡을 의뢰토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모차르트 최초의 성공작인 '후궁에서의 도주'였다. 그로부터 반 슈비텐과 모차르트는 비록 나이 차이는 많았지만 서로 존경하며 친밀하게 지내게 되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장면. 살리에리의 뒤에 있는 사람이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이다.

 

반 슈비텐은 바흐와 헨델의 팬으로서 이들의 악보를 다수 소장하고 있었다. 어떤 작품은 비엔나에서 한번도 연주된 일이 없는 귀중한 것이었다. 반 슈비텐은 모차르트에게 이들의 악보를 검토하여 정리하고 또한 피아노 연주로 들려 줄 것을 부탁했다. 물론 사례는 넉넉히 주었다. 그가 바흐와 헨델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다수 보관할수 있었던 것은 오스트리아의 대사로서 베를린에서 지낸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인 레오폴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저는 매 일요일마다 12시에 반 슈비텐 남작의 저택을 방문합니다. 저는 그곳에서 다른 것은 하나도 연주하지 않고 오직 바흐와 헨델만을 연주합니다. 현재 저는 바흐의 푸가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세바스티안의 것뿐만 아니라 엠마누엘과 프리데만의 것들도 정리하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이처럼 모차르트와 반 슈비텐은 연배는 차이가 났지만 음악적으로는 가까운 사이였다.

 

모차르트가 반 슈비텐의 배려로 바로크의 위대한 음악가인 바흐와 헨델의 음악을 비엔나에서 차분하게 정리하고 연주하였던 것은 그의 작품 활동에 두가지로 큰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첫째는 모차르트가 자기의 작품에 그들의 후가와 조곡을 모방하여 작곡한 것이다. 대부분이 대위법에 의한 작품이었다. 상당수가 미완성이어서 거의 연주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비록 완성된 것이라고 해도 모차르트의 다른 음악에 비해서 건조한 느낌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주 연주되지 않고 있다. 또 하나의 과정은 모차르트가 바흐와 헨델의 음악을 자기 스타일로 동화시킨 것이다. 모차르트의 작품 중에서 그러한 면모를 느낄수 작품들이 더러 있다. 예를 들면 1784년의 C 단조 미사,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두 남성이 부르는 합창전주곡 등이다.

 

반 슈비텐은 그의 저택의 응접실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하프시코드와 같은 키보드 악기의 반주로 연주하는 모임을 자주 가졌다. 반 슈비텐과 그의 동료 음악 애호가들은 응접실에서만 연주하지 말고 다른 연주회장에서 본격적으로 여러 사람들을 위해 연주되기를 바랐다. 이와 관련하여 반 슈비텐은 1786년에 귀족음악애호가들의 모임인 '신사 협회'(Gesellschaft der Associierten: Society of Associated Cavaliers)를 결성하였다. 반 슈비텐은 이 단체의 재정지원으로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풀 스케일로 연주하는 모임을 주선할수 있었다. 처음에는 다른 회원들의 저택이나 궁전에서 연주회를 가지다가 나중에는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에서 일반을 위한 연주회로 발전시켰다.

 

모차르트는 1788년에 헨델 오라토리오 연주회의 지휘를 맡았다. 귀족들의 '신사 협회'는 모차르트에게 지휘를 의뢰하였을 뿐만 아니라 헨델의 음악을 당시의 스타일로 바꾸어 만드는 일도 위탁하였다. 그리하여 모차르트는 헨델의 '아치스와 갈라테아'를 수정하고 보완하였으며 오라토리아 '메시아'는 오케스트라 파트에 여러 악기를 추가하여 연주하도록 편곡하였다. 또한 '성세실리아축일찬가'(Ode for St Cecilia's Day), '알렉산더 축연'(Alexander's Feast)도 수정하였다. 반 슈비텐은 이들 작품의 영어 대본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책임을 맡았다. 훗날 그는 하이든을 위해서도 번역 일을 하였다. '신사 협회'의 연주회는 모차르트에게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행사였다. 이렇듯 반 슈비텐은 모차르트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반 슈비텐은 1791년 12월 5일 밤중에 모차르트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밤중인데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집을 급히 방문하였고 모차르트의 장례식을 준비해 주었다. 그후에도 모차르트의 가족들을 위해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더구나 1793년 1월 2일에는 콘스탄체를 돕기 위해 모차르트의 '진혼곡' 연주회를 주선해 주었다. 콘스탄체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인 3백 두카스를 받았다고 한다. 반 슈비텐은 모차르트의 아들인 칼을 프라하에 보내 교육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반 슈비텐은 1733년 네덜랜드의 레이덴(Leiden)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곳에서 11세까지 살다가 아버지인 게라르트 반 슈비텐(Gerard van Swieten)이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주치의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비엔나로 가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 게라르트 반 슈비텐은 비엔나에서 궁정도서관장으로도 봉사했다. 어린 반 슈비텐은 엘리트 예수회 학교인 테레지아눔에서 공부했다. 어린 반 슈비텐은 공부를 잘 하였으며 특히 어학에 재능이 많아서 여러나라의 말을 능숙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외교관으로서 적합했다. 반 슈비텐은 브뤼셀(1755-1757), 파리(1760-1763), 바르샤바(1763-1764),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를린에 있는 프레데릭 대제의 궁정에 신성로마제국의 대사로서(1770-1777) 봉사했다. 반 슈비텐은 베를린 파견근무를 끝내고 1777년에 비엔나로 돌아오자 제국도서관장에 임명되었다. 도서관장의 직분은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5년이나 공석으로 있었다. 반 슈비텐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국도서관에 봉사하면서 살았다. 도서관인으로서 그는 세계에서는 처음으로(1780) 카드 카탈로그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반 슈비텐의 카드 카탈로그는 다른 도서관에서도 곧이어 적용하기 시작했다. 반 슈비텐이 제국도서관장으로 있을 때에 도서관의 장서가 크게 확장되었다. 왜냐하면 요셉2세가 수도원의 장서를 정비하고 다량의 도서를 비엔나의 제국도서관으로 옮겼기 때문이었다.

 

화보리텐에 있는 테레지아눔. 귀족 자제들의 엘리트 학교였다. 반 슈비텐도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하이든과의 관계]

반 슈비텐은 베를린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다가 1776년에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는 당시 43세였던 하이든을 만나 격려하고 도와줄 일이 있으면 기꺼이 돕겠다고 약속했다. 하이든의 베를린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대하여 별로 환영하지 않고 오히려 적대적인 감정까지 갖고 있어서 심적으로 큰 번민을 하고 있었다. 하이든은 반 슈비텐이 베를린에 있으면서 자기의 작품을 위해 여러가지로 좋은 반응을 얻도록 도와준데 대하여 감사했다. 하이든은 1790년에 그가 오래동안 봉사했던 에스터하지의 니콜라우스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차제에 아이젠슈타트를 떠나 비엔나로 왔다. 그렇게 하여 하이든은 거의 반독립적으로 활동할수 있었다. 비엔나에 온 하이든을 반 슈비텐이 재정적으로 도와주었다. 하이든으로서는 감사한 노릇이었다. 하이든은 '신사 협회'가 주선한 헨델의 오라토리오 연주회에 자주 참석하였다.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모차르트도 만났다. 반 슈비텐은 이미 1793년에 하이든에게 오라토리오의 작곡을 권면했다. 그런데 하이든은 이듬해인 1794년 두번째로 런던여행을 떠났다. 반 슈비텐이 제공한 마차를 타고 영국으로 갔다.

 

1년 동안 런던에 머물렀던 하이든은 1795년에 비엔나로 돌아왔다. 반 슈비텐과 하이든은 더욱 가깝게 지냈다. 반 슈비텐은 하이든의 예술자문 및 대본가로서 활약했다. 그렇게 하여 우선 탄생한 것이 비록 소규모이지만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마지막 칠언'(The Seven Last Words of Christ)이었다. 이 작품은 하이든이 1785년에 오케스트라 작품으로 만들었다. 하이든과 반 슈비텐은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키로 했다. 오라토리오 '천지창조'(The Creation: 1798)와 '사계'(The Seasons: 1801)이었다. 반 슈비텐이 영국의 제임스 톰슨(James Thomson)이라는 사람이 쓴 대본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반 슈비텐은 독일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영어로 번역하였다. 하이든의 음악에 리듬이 맞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반 슈비텐은 하이든이 '천지창조'를 작곡할 때에 음악적으로도 많은 조언을 하였다. 하이든의 반 슈비텐의 조언을 충실하게 반영하였다. 그러므로 세계의 문화유산인 하이든의 '천지창조'에는 반 슈비텐의 기여도 담겨 있다. 뿐만 아니다. 하이든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칠언' '천지창조' '사계'는 모두 '신사 협회'의 후원으로 공연되었다.

 

하이든의 '천지창조' 연주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이든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가운데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하이든. 반 슈비텐도 분명히 어딘가는 와서 있을 것이다. 비엔나학술원 연주회장.

                    

[베토벤과의 관계]

반 슈비텐은 베토벤이 비엔나에 정착하던 초기에 베토벤의 파트론이었다. 베토벤은 반 슈비텐의 저택에서 열리는 바흐와 헨델의 연주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므로 이 때에 모차르트도 만났을 것이다. 베토벤은 반 슈비텐의 음악회에서 바흐의 후가를 피아노로 연주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의 저택에서 하루나 이틀밤을 지내기도 했다. 반 슈비텐이 베토벤에게 하루나 이틀밤을 지내기 위해 준비하고 오라고 할 때에는 편지에 다른 얘기는 하지 않고 나이트캡(잠잘 때 쓰는 모자)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베토벤이 바흐나 헨델의 음악에 접하게 된것은 모차르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베토벤은 모든 작곡가 중에서 모차르트와 헨델을 가장 존경했다. 다음이 바흐였다. 베토벤의 집에 가서 보면 책상이든지 어디든지 이들 세사람의 악보가 항상 놓여 있었다. 베토벤은 1801년에 그의 교향곡 제1번을 반 슈비텐에게 헌정하였다.

 

링슈트라쎄의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의 한쪽 면에 있는 게라르트 반 슈비텐(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주치의)의 기념상. 그 뒤로는 주조전문가인 요제프 힐라리우스 에크헬(1737-1798), 제국역사학자로 임명된 기요르기 프라이(1723-1801),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 요제프 하이든, 그리고 어린아이는 모차르트이다. 모차르트는 게라르트 반 슈비텐의 아들인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 인연으로 모차르트의 모습이 이 자리에 보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