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의 모차르트

'스웨덴의 모차르트' 요셉 마르틴 크라우스

정준극 2013. 8. 27. 07:40

'스웨덴의 모차르트' 요셉 마르틴 크라우스(Joseph Martin Kraus)

 

요셉 마르틴 크라우스

 

독일에서 태어나서 독일에서 음악가로서의 공부를 했지만 스웨덴에서 활동했고 스웨덴에서 세상을 떠난 요셉 마르틴 크라우스(Joseph Martin Kraus)를 '스웨덴의 모차르트'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는 가장 큰 이유는 크라우스와 모차르트의 생애가 거의 같기 때문이다. 크라우스는 모차르트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1756) 모차르트보다 겨우 1년 후인 1792년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은 비엔나에서 서로 만나서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되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다. 다만, 크라우스가 비엔나에서 머무는 동안 모차르트가 속하여 있는 프리메이슨의 지부에 멤버로 가입했다는 기록은 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해서 서로 만났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만일 서로 만난 일이 없다고 해도 크라우스와 모차르트는 서로에 대하여 많은 얘기를 들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크라우스가 모차르트를 크게 존경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크라우스는 스웨덴의 계몽왕이라고 하는 구스타브 3세의 요청으로 귀족원을 위한 곡을 작곡하게 되자 모차르트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Idomeneo)에 나오는 음악을 인용하였다. 아무튼 스웨덴에서는 크라우스를 '스웨덴의 모차르트'라고 하며 대단히 자랑하고 있다. 사실, 크라우스의 작품들을 자세히 들어보면 모차르트 스타일이어서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마인강변의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도시인 밀텐버그. 요셉 마르틴 크라우스가 태어난 곳이다.

                                                        

요셉 마르틴 크라우스는 독일 중부 프랑코니아 지방의 밀텐버그 암 마인(Miltenberg am Mai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인츠 추기경령에 속한 어느 군청의 서기인 요셉 베른하르트 크라우스였고 어머니는 안나 도로테아라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아버지는 원래 아우그스부르크 출신으로 봐일바흐라는 마을에서 작은 식당을 경영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밀텐버그의 도목수인 요한 마르틴 슈미트의 딸이었다. 요셉 마르틴 크라우스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에서 요셉을 가져왔고 외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마르틴을 가져와서 지은 것이다. 요셉 마르틴 크라우스에게는 13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으나 어릴 때 일곱 명이 세상을 떠나서 여섯 명만 남았다. 당시에는 유아사망율이 대단히 높았었다. 크라우스의 식구들은 크라우스가 다섯 살 때에 바덴 뷔르템버그의 부헨(Buchen)이란 곳으로 이사를 갔다. 크라우스의 아버지가 부헨시청의 서기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크라우스는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크라우스의 첫 음악 선생은 루터교 목사님인 게오르그 피스터라는 분이었다. 크라우스는 유태교 칸토인 베른하르트 프란츠 벤들러라는 분으로부터도 음악을 배웠다. 크라우스는 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오덴발트(Odenwald)라고도 하는 부헨. 크라우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크라우스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음악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어머니는 크라우스의 음악적 재능을 살리기 위해 크라우스가 12살 때에 만하임으로 보내어 예수회 김나지움과 음악 세미나르에 다니며 음악공부를 하도록 했다. 크라우스는 이곳에서 대단히 엄격한 음악공부를 했다. 특히 바이올린에 있어서 그러했다. 그러나 공무원인 크라우스의 아버지는 크라우스가 법률을 공부해서 변호사나 검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크라우스가 17세 때에 그를 마인츠대학교에 보내어 법률을 공부하도록 했다. 그러난 크라우스는 마인츠대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적응하지 못했다기 보다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인츠에서 겨우 1년을 보낸 후에 에어푸르트(Erfurt)대학교로 자진해서 옮겼다. 에어푸르트는 전통적으로 개신교 음악은 물론이고 가톨릭 음악이 크게 활발한 도시였다. 오늘날에도 에어푸르트 오페라 페스티발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다. 크라우스는 에어푸르트대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음악과 문학을 공부할수 있었다.

 

현재의 에어푸르트대학교 입구

 

그러던 중에 부헨에 살고 있던 아버지가 명예훼손죄에 걸려 직장을 잃게 되었다. 크라우스는 더 이상 에어푸르트대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부헨으로 돌아와 집안 살림을 도와야 했다. 크라우스는 부헨의 성오스발트 교회를 위해 성곡을 작곡하기도 하고 드라마 대본을 쓰기도 했다. 이때 쓴 드라마가 Tolon(톨론)이라는 3막의 비극이었다. 교회음악으로는 Te Deum(테 데움)과 모테트인 Fracto Demum  Sacramento(프락토 데뭄 사크라멘토) 등을 작곡했다. 그렇게 1년을 지내다가 아버지가 다시 직업을 갖게 되자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기로 마음 먹고 이번에는 괴팅겐으로 가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괴팅겐에는 '괴팅겐 하인분트'(Göttingen Hainbund)라는 시인들의 모임이 있었다. 크라우스는 괴팅겐 하인분트의 취지에 크게 동조하여 이 모임에 참가하여 젊은 시인들과 함께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괴팅겐 하인분트는 2년 동안만 활동하다가 해체되었지만(1772-1774) 크라우스는 이 기간에 시집을 하나 발간하였다. Versuch von Schäfersgedichte(전원시의 탐구)라는 제목의 시집이었다. 안되었지만 이 시집은 그런 것이 있었다는 기록만 있을뿐 내용은 분실되었다. 그건 그렇고 크라우스는 괴팅겐에 있으면서 점차 독일 청년 문학가들의 Sturm und Drang(질풍노도)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문학작품과 음악작품이 질풍노도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괴팅겐의 마르크트플라츠(Marktplatz)

 

1775년, 크라우스가 19세 때에 레퀴엠(진혼곡)을 작곡했다. 크라우스가 어째서 그런 젊은 시절에 진혼곡을 작곡했는지에 대하여는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인 관심에서 작곡했는지, 또는 질풍노도의 영향을 받아서 작곡했는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크라우스의 진혼곡은 아무래도 미숙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틱한 힘과 대담한 아이디어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크라우스는 진혼곡에 이어 두 편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다. Der Tod Jesu(예수의 죽음)과 Die Geburt Jesu(예수의 탄생)이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은 악보가 분실되어 어떤 것인지 알수가 없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을 주제로 하여서는 여러 작곡가들이 오라토리오 또는 칸타타를 작곡했지만 크라우스의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인간적인 감정을 충분히 표현했다는데서 큰 반응을 받았다. 한편, 크라우스는 괴팅겐에 있을 때에 스웨덴에서 공부하러 온 칼 스트리드스베리(Carl Stridsberg)라는 사람과 특별히 친하게 지냈다. 칼 스트리드스베리는 크라우스에게 스톡홀름에 가서 구스타브 3세 궁정의 상주 음악가로서 응모해 보라고 권고하였다.

 

스웨덴의 계몽군주라고 불리는 구스타브 3세

 

크라우스는 1778년, 22세 때에 친구의 말을 따라서 스톡홀름으로 갔다. 그러나 구스타브 왕을 만날수가 없어서 특별히 하는 일이 없이 지냈다. 괴팅겐으로 돌아갈까라는 생각도 하루에 몇번씩이나 했다. 구스타브 왕의 예술사랑은 대단하여서 유럽의 각지로부터 음악가들을 포함한 많은 예술가들이 스톡홀름을 찾아왔다. 크라우스가 드디어 구스타브 왕을 만나게 된 것은 스톡홀름에 온지 3년만의 일이었다. 그 3년동안 크라우스는 형편없는 생활을 견디며 지내야 했다. 크라우스는 스톡홀름에서 첫 오페라인 Azire(아지레)를 작곡하였으나 스웨덴왕립음악원은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그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크라우스에게 다시한번 기회를 주었다. 크라우스는 Proserpina(프로세르피나)를 작곡했다. 대본도 직접 썼다. 크라우스의 '프로세르피나'는 1781년 6월 6일, 구스타브 왕과 여러 왕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울릭스달 궁전(Ulriksdal slott)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그후 크라우스는 오래 기다리던 끝에 마침내 왕립오페라의 부음악감독 겸 왕립음악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크라우스는 1년에 6백 길더라는 상당히 후한 보수를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구스타브 왕의 특별배려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여행할수 있게 되었다.

 

크라우스의 오페라 '프로세르피나'가 초연된 울릭스달 궁전

 

크라우스는 구스타브 3세 왕의 특별배려로 5년에 걸친 유럽 대여행을 갈수 있었다. 목적은 다른 나라 극장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워오라는 것이었다. 크라우스는 여행 중에 비엔나에서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 요한 게오르그 알브레헤츠버거, 파드레 마르티니, 요제프 하이든을 만났다. 크라우스는 하이든을 위해 교향굑 D 장조를 작곡하여 에스터하지 궁전에서 연주했다. 이 작품은 후에 하이든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하이든은 훗날 크라우스가 자기를 위해 작곡한 교향곡에 대하여 '앞으로 수세기 동안 이 교향곡은 걸작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같은 교향곡을 작곡할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크라우스는 1787년에 파리에서 교향곡 E 단조를 작곡했다. 이 작품도 후에 주세페 캄비니(Giuseppe Cambini)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캄비니는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던 작곡가였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크라우스는 비엔나에 체류하는 중에 모차르트가 소속되어 있는 프리메이슨의 지부에 멤버로서 가입하였다. 그러므로 이를 계기로 모차르트와도 교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크라우스는 유럽 여행 중에 유명한 플루트 5중주 D 장조를 작곡했다. 그 이전에도 플루트 중주곡이 있었지만 크라우스의 작품은 모든 면에 있어서 가장 뛰어나다는 얘기를 들었다. 크라우스는 비엔나에서 지내다가 이어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을 차례로 방문했다. 영국에서는 1785년에 마침 헨델(1685-1759)의 탄생 1백 주년 기념음악회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리는 것을 직접 참관하였다. 크라우스는 1787년에 스톡홀름으로 돌아가서 구스타프 3세를 위해 더욱 봉사하였다.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 크라우스가 하이든을 위해 작곡한 교향곡 D 장조가 초연되었다.

 

크라우스는 스웨덴에 돌아가자 마자 왕립음악원장으로 다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마침내 궁정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되었다. 당시 구스타브 왕은 건축가인 에릭 팔름스테드(Erik Palmstedt)에게 스톡홀름에 왕립오페라하우스(Kungl. Operan)를 건축할 것을 지시하였다. 에릭 팔름스테드는 스웨덴 문화예술을 주도하는 서클을 만들어서 자주 모임을 가졌으며 크라우스도 그 모임의 멤버가 되었다. 구스타브 3세는 1789년에 그의 개혁정책을 좀더 실현시키기 위해 귀족원과의 관계를 원활히 하고자 했다. 구스타브 3세는 크라우스에게 성니콜라스 교회에서 열리는 귀족원(Ståndriskdagen)의 개원식을 위한 곡을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크라우스의 곡에는 행진곡도 포함되는데 크라우스는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에 나오는 사제들의 행진곡을 바탕으로 하였다. 귀족원은 국왕의 개혁정책을 승인하였다. 구스타브 3세의 개혁정책의 주요 골자는 노동조합과 안전보장에 대한 법을 제정하는 것으로서 이들 법이 통과되므로서 개혁을 위한 정부의 행정권이 더욱 강화되었다. 

 

스톡홀름의 왕립오페라극장(오페란)과 구스타브 4세 기마상. 그의 아버지인 구스타브 3세는 이 극장에서 가면무도회를 여는 중에 정적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그래서 구스타브 4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장소가 오락과 여흥의 장소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여 한때 극장을 폐쇄했었다.

 

크라우스는 볼테르의 Olympie(올림피)의 공연을 위한 서곡과 행진곡과 간주곡을 작곡했다. 크라우스는 여러 편의 무대음악을 작곡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Aeneas i Cartago(카르타고의 이니아스)이다. 하지만 이 오페라는 크라우스의 생전에 공연되지 못하였다. 1792년 3월 16일에 구스타브 3세가 왕립오페라극장에서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는 중에 암살당했다. 구스타브 3세의 서거로 인하여 그가 박차를 가해온 문화예술 정책도 상당한 난관을 겪어야 했다. 크라우스로서도 커다란 후원자를 잃은 셈이었다. 크라우스는 구스타브 3세의 장례식을 위해 '장송 칸타나'와 '장례교향곡'(Symphonie funebre)를 작곡했다. 이 곡들은 4월 13일의 구스타브 3세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다. 구스타브 3세의 서거로 심적인 충격을 받은 크라우스는 그 후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몇 달 후인 1792년 12월 15일 폐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36세였다. 크라우스의 시신은 스톡홀름 교외인 티볼리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여기 크라우스의 육신이 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천상에 있다'라고 적혀 있다. 모차르트의 장례식도 12월 하순에 있었다.

 

크라우스의 묘지. 스톡홀름 교외인 티볼리에 있다. 12월 하순, 크라우스의 장례식은 어둡고 추운 날씨에 횃불을 든 일단의 사람들이 얼어 붙은 브룬스비켄 강을 건너며 운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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