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오페라역사 속성정복

2. 바로크 오페라

정준극 2012. 5. 8. 07:34

2. 바로크 오페라

 

오페라는 궁정의 관객들만을 상대하지 않게 되었다. 일반백성들도 오페라를 구경하도록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카니발 시기가 적격이었다.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표를 팔고 오페라를 공연한 것은 1637년 베니스에서였다. 당시의 오페라 작곡가로서는 프란체스코 카발리(Francesco Cavalli: 1602-1676)와 클라우디오 몬테베드리(Claudio Monteverdi: 1567-1643)은 17세기에 오페라의 일반보급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던 작곡가들이다. 몬테베르디는 그의 '오르페오'로서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몬테베르디가 1640년에 내놓은 '율리시스의 조국 귀환'(Il ritorno d'Ulisse in patria)도 '오르페오'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간혹 공연되는 초기 바로크의 오페라이다. 일반대중을 위한 오페라에는 코믹한 내용이 첨가되어야 했다.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스의 조국 귀환'

                                 

그러자 점잖은 것을 중요시하는 지식인들은 오페라가 저렇게 경망스러워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주로 베니스의 아르카디아 아카데미의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했다. 아르카디아 아카데미(Arcadian Academy)는 실제로 건물이 있고 조직이 있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귀족들과 학자들 중에서 옛 아르카디아 풍의 목가적인 생활을 흠모하는 일단의 사람들을 말했다. 당대의 시인으로 오페라 대본의 귀재인 피에트로 트라파시(Pietro Trapassi)는 이들의 사상에 동조하여 심각한 오페라의 도덕적인 톤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피에트로 트라파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유명한 메타스타시오(Metastasio)이다. 메타스타시오의 영향을 받은 오페라들이 사회의 근간으로 부각되자 코미디가 섞인 오페라는 자연히 자기의 갈길을 찾아서 떠날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와 오페라 부파(Opera buffa)가 구분되었다.

 

오페라 부파가 별도의 장르로서 행보를 옮기기 전에도 오페라 세리아에 코믹한 요소가 첨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오페라 안에 오페라가 있는 것이었다. 이유 중의 하나는 신흥부유층인 상인들을 관객으로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번 신흥부자들은 지식인들에 비하여 아무래도 여러면에서 유치하고 부족했다. 오페라를 구경하면서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지를 않나, 도박을 하질 않나, 떠들고 왔다갔다 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이러한 전통 때문인지 아직도 이탈리아의 극장은 소란한 기미가 적지 않다. 오페라에서 코미디가 따돌림을 당하자 갈 길을 찾던 코미디는 당시 유행하던 순회극단(commedia dell'arte)의 주제가 되어 다행히 자리를 찾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순회극단, 또는 유랑극단의 역할은 대단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에서도 순회극단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좋은 예이다.

 

벨리니의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 로미오를 여성이 맡았다.

 

한편, 오페라의 시초인 인터메디가 연극의 막간에 공연되었던 전통을 그대로 살리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주로 나폴리에서였다. 나폴리의 극장들은 기왕이면 코미디를 구박만 하지 말고 일반 오페라 공연의 막간에 공연하면 심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정식으로 막간공연이 도입되었으니 그것을 인터메찌(intermezzi)라고 불렀다. 인터메찌는 인터메쪼의 복수형태로서 간주곡을 인터메쪼라고 하는 것은 다 아는 사항이다. 나폴리에서 인터메찌는 1710년대와 20년대에 특히 유행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격인 오페라 세리아보다도 막간오페라인 인터메찌가 더 인기를 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쩔수 없이 분가를 해야 한다. 인터메찌는 별도의 작품으로서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운동이 기치를 높이 들자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오페라를 수입하거나 또는 모델로 삼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다른 나라의 작곡가들도 이탈리아어로 된 대본으로 오페라를 작곡해야 훌륭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누구라고 궁리할 필요도 없이 대표적인 인물은 헨델이다. 헨델은 런던의 관중들을 위해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를 이탈리아어 대본으로 썼다. 헨델의 '알치나'(Alcina), '리날도'(Rinaldo), '라다미스토'(Radamisto), '플로린도'(Florindo), '알미라'(Almira) 등등 모두 그렇다. 세기말에 비엔나에 있던 모차르트도 이탈리아어 대본에 의한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니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돈 조반니'(Don Giovanni), '여자는 다 그래'(Cosi fan tutte) 등은 모두 이탈리아어 대본이다. 독일 출신의 글룩도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등 이탈리아어 대본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다른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열심히 이탈리아어 대본의 오페라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 파리에서 활동했던 루이지 케루비니, 멀리 북아프리카까지 가서 활동했던 사베리오 메르카단테 등이다.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해외 진출도 눈부셨다. 프랑스의 오페라를 주도하고 프랑스의 오페라 무대를 석권했던 장 바티스트 륄리(Jean Baptiste Lully)도 이탈리아 사람이었며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도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헨델의 '알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