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참고자료] 마리 뒤플르시스(Marie Duplessis)

정준극 2012. 5. 21. 20:34

[참고자료] 마리 뒤플르시스(Marie Duplessis)

'라 트라비아타'의 실제 주인공

 

에두아르 비에노가 그린 마리 뒤플르시스. 20대 초반의 여인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성숙하고 고귀하게 보였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인 비올레타 발레리의 실제 인물은 마리 뒤플르시스라고 한다. 마리 뒤플르시스는 1824년 1월 15일에 태어나서 23세의 젊은 나이로 1847년 2월 3일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유명한 코트즌(Courtesan: 고급창녀) 겸 부유하고 저명한 인사들의 정부였다.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의 소설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elias)의 주인공인 마르게르트 고티에(Marguerite Gautier)는 마리 뒤플르시스를 모델로 삼은 것이며 베르디가 이 소설을 읽고 감동하여서 오페라로 만들었던 것이다. 베르디는 오페라의 제목을 '라 트라비아타'(방황하는 여인, 타락한 여인)로 고쳤으며 소설에 나오는 이름인 마르게리트 고티에도 비올레타 발레리로 고쳤다.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는 마리 뒤플르시스의 애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뒤마 휘스는 마리 뒤플르시스를 깊이 사랑하였으나 여러 사정으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였다. 뒤마 휘스는 상심을 달래기 위해 3년 동안 북아프리카에서 지내고 파리로 돌아왔다. 뒤마 휘스가 파리로 돌아와보니 마리 뒤플르시스는 그동안 폐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다. 뒤마 휘스는 마리 뒤플르시스의 삶이 너무나 애처롭고 또한 자기와의 잊을수 없는 사랑을 회상하여서 '동백꽃 여인'을 썼다.

 

오페라극장에서의 마리 뒤플르시스. 마리가 오페라극장에 나타나면 뭇 남자들이 마리를 바라보느라고 정신들이 없었다. 함께 온 여자들이 그런 남자들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다.

               

마리 뒤플르시스는 1824년 노르망디 지방의 노낭 르 팽(Nonant-le-Pin)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도 실은 1824년에 태어났다. 1824년이라고 하면 비엔나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이 처음 연주되었던 해이다. 원래 이름은 로즈 알퐁생 플르시스(Rose Alphonsine Plessis)였다. 그러다가 파리로 와서 로즈라는 이름을 마리로 바꾸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마리 뒤플르시스는 돈을 벌기 위해 12살 쯤 되던 해에 마을에서 몸을 파는 창녀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사실상의 포주였다. 3년 동안 그런 생활을 하던 마리 뒤플르시스는 15세 때에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으로 무작정 파리로 상경하였다. 파리에 가면 의상실에서 일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리는 유행의 도시였기 때문에 의상실이 많았으며 웬만한 의상실에서는 서너명의 직원(우리가 보통 말하는 시다)을 두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일자리를 구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마리 뒤플르시스는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떤 사람이 마리 뒤플르시스의 모습을 기록한데 의하면 마리 뒤플르시스는 비록 10대의 소녀에 불과했지만 대단히 성숙하고 매력적인 여자였다고 한다. 키는 자그만했으며 매혹적인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파리에 온지 1년 정도가 지나자 마리 뒤플르시스는 어느덧 파리 사교계(실은 화류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돈많은 사람들이 마리에게 돈을 주고 데이트를 하거나 또는 파티의 참석토록 하여 분위기를 끌어 올리는 역할을 맡도록 했다.

 

가슴에 하얀 카멜리아(동백꽃)를 단 마리 뒤플르시스. 생리중일 때에는 빨간 카멜리아 꽃을 달았다고 한다.

 

지체 높은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들의 애인역할을 하기 시작한 마리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자기도 머리에 무언가 든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쓰고 읽는 법은 물론, 예술과 사교에 대하여도 폭넓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마리의 주가는 더욱 높아졌다. 어느 파티에서든지 마리가 등장하면 분위기가 온화해 진다. 마리와 얘기를 나누면 그의 문화예술적인 지식에 대하여 감탄을 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마리는 몸뚱아리 하나를 유일한 재산으로 삼아서 파리 사교계의 코트즌으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마리는 그의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Du를 사용하기도 했다. 마리의 그의 성에 Du 를 붙여서 Marie Duplessis 로 만든 것이다.

 

마리 뒤플르시스 초상화

 

마리 뒤플르시스는 유명 정치인, 부호, 귀족, 예술가 들의 후원을 받아 상류층의 생활을 하였다. 파리에는 커다란 아파트가 있어서 자주 연회를 열었다. 수십명이 만찬을 즐길수 있으며 무도회와 여흥을 가질수 있는 넓은 아파트였다. 마리 뒤플르시스는 볼로뉴숲에서 말을 타고 다니기를 즐겨했고 오페라에도 자주 갔다. 파리의 모든 남자들이 마리 뒤플르시스와 한번이라도 얘기를 나누고 싶어할 정도였다. 불과 10여년전에 노르망디의 시골에서 가난에 찌든 생활을 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화려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생활을 했다. 당시 유명한 화가인 에두아르 비에노(Édouard Viénot)에게 부탁하여 자기의 초상화를 그리게도 했다.

 

몽마르트 공동묘지에 있는 마리 뒤플르시스의 묘지. 어릴 때의 이름은 알퐁신 플레시스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라고 적혀 있다.

 

마리 뒤플르시스는 1844년 9월부터 1845년 8월까지 거의 1년 동안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의 정부였다. 그 후에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의 정부였다고 한다. 리스트는 마리 뒤플르시스와 정식으로 살림을 차리고 싶어했다고 한다. 리스트는 '롤라 몽드는 만인을 사랑할수 있다. 하지만 마리 뒤플르시스는 만인의 사랑을 받을수 있다'고 말했다. 마리 뒤플르시스는 여러 애인들 중에서 두명과 잠시나마 결혼했었다고 한다. 귀족인 에두아르 드 프르고(Édouard de Perregaux) 백작과 스웨덴의 폰 스타켈베리히(Von Stakelberg) 백작이었다. 그러므로 마리 뒤플르시스는 한때 백작부인의 호칭을 가지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마리 뒤플르시스는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성이었다. 연인과 헤어졌다고 해도 따듯한 관계를 유지하여 미움을 받지 않았다.

 

마리 뒤플르시스로서 이름을 떨친 배우 엘레오노라 뒤스

                       

마리 뒤플르시스는 1847년 2월 3일, 23세의 나이로 결핵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임종 때에는 전남편들인 드 프르고 백작과 폰 스타켈베르히 백작이 옆에 있었다. 몽마르트에서의 장례식에는 수백명의 조객들이 참석했다. 어느 이름난 인사도 그런 장례식을 가지지 못했다. 마리 뒤플르시스는 자녀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빚은 남기고 갔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몇 주후에 그의 소지품들이 경매에 붙이게 되었다. 뒤마 휘스의 소설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élias)은 마리 뒤플르시스가 세상을 떠난지 1년 후에 발간되었다. 소설에서는 마리 뒤플르시스가 마르게리트 고티에라는 이름으로, 뒤마 휘스는 아르망 뒤발(Armand Duval)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동백꽃 여인'은 저 유명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이외에도 수많은 연극, 영화, 발레로 만들어졌다. 마리 뒤플르시스의 역할을 가장 뛰어나게 맡았던 배우로서는 당대의 사라 베른하르트를 비롯하여 엘레오노라 뒤스(Eleonora Duse), 릴리안 기슈(Lilian Gish), 비비안 리, 이사벨 아자니(Isabel Adjani) 등을 꼽을수 있다. 프란츠 리스트는 발레음악을 작곡했다. 마그레트 화운틴과 루돌프 누레예프가 창조하였다. 영화로는 수없이 제작되었으나 고전으로서는 1936년에 그레타 가르보와 로버트 테일러가 주연한 것이 있다. 그 이전의 영화로서는 1911년에 사라 베른하르트가 주연한 것이 있고 1921년에 루돌프 발렌티노가 아르망 뒤발을 맡은 작품이 있다. 아무튼 세계역사에 있어서 이만큼 이름을 남긴 여자도 없을 것이다.

 

마리 뒤플르시스의 역할을 맡아했던 배우들. 좌로부터 사라 베른하르트, 릴리안 기슈, 비비안 리, 이사벨 아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