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참고자료] 데미 몽드(Le demi-monde)

정준극 2012. 5. 19. 09:21

데미 몽드(Le demi-monde)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Alexandre Dumas fils)의 또 다른 소설

 

데미 몽드라는 용어를 그의 작품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는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원작인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ilas)의 저자이다. 그는 '동백꽃 여인'에서는 주인공을 데미 몽드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데미 몽드'(Demi-monde)라는 말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무모하면서도 유별난 행동으로 쾌락적인 생활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데미 몽드'라는 용어는 18세기 후반으로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던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러한 생활스타일이 사회의 일각에 번졌던 시기를 말하고 있다. 한편, 현대에 와서는 부유하거나 상류층이어서 쾌락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제트 셋(Jet-set) 또는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라고 부르는 계층도 일종의 '데미 몽드'에 속하는 부류로 보고 있다.

 

'데미 몽드'라는 용어는 간혹 비판의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과거에 '데미 몽드'라고 불렀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약중독자, 도박중독자, 낭비벽의 사람들, 난잡한 성생활자 등을 '데미 몽드'라고 부른다. 낭비벽의 사람들은 주로 패션을 추구하여서 비싼 돈을 주고 괴상한 의상을 사서 입는 사람들을 말한다. 프랑스어에서 Demimond 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쾌락적인 생활을 즐기는 여성들을 말하지만 Deminondaine 이라는 단어를 만들어서 그런 여성중에서도 특별여성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Demondaine(드미망데인)이라는 단어는 나중에 고급창녀(Courtesan) 또는 매춘여성(Prostitute)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되었다. '데미 몽드'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세상의 반쪽'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반쪽 인간', 특히 사교계에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반쪽만 인정받는 여성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데미 몽드'라는 단어는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Alexandre Dumas fils: 1824-1895)가 1855년에 내놓은 Le Demin-Monde 라는 극본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데미 몽드'라는 단어는 20세기에 들어서서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그 의미도 달라졌다. 여성참정권 운동을 하는 여성들과 플래퍼(Flapper)운동을 하는 여성들을 말하는 단어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플래퍼라는 단어가 아직 사교계에 나오지 않은 어린 아가씨들을 말하지만 1920년대부터는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말괄량이 아가씨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더 자주 사용되었다. 일본사람들이 말하는 '후라빠'가 바로 플래퍼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더 지나자 '데미 몽드'라는 단어는 돈을 벌지 못하여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면서도 예술가라고 자처하며 지내는 사람들을 말하는 단어로 변모하였다. 보헤미안 예술가들이 바로 이런 범주에 들어간다.

 

과거에 대표적인 데미몽드는 어떤 여인들이었을까? 실존인물로서 가장 잘 알려진 데미몽드는 아무래도 코라 펄(Cora Pearl)을 들지 않을수 없다. 코라 펄은 생전에 파리 화류계의 여왕으로 알려졌다. 코라 펄은 그의 돈많은 애인들을 '황금사슬'이라고 불렀다. 줄줄이 엮어져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코라 펄의 애인 중에는 유명한 리볼리공작(Duc de Rivoli)가 있으며 심지어는 나폴레옹 왕자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코라 펄은 파리에서의 생활 중에 수백만 프랑이라는 거금을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코라 펄은 단순한 쾌락주의자, 낭비주의자가 아니었다. 보불전쟁 때에 파리가 프러시아군의 공성을 받아 그야말로 외부로부터 아무것도 지원을 받지 못하였을때(1870-71) 코라 펄은 자기의 저택을 부상병을 위한 병원으로 만들고 직접 부상병들을 간호하였다. 그렇다고 존경할수만은 없는 인물이었다. 코라 펄은 자기만의 비망록을 은밀히 작성해 놓았다. 그것이 그가 세상을 떠난지 한참 후에 독일의 어떤 수집가가 획득하였고 이어 근자인 1983년에 The Memoirs of Cora Pearl: The Erotic Reminischences of a Flamboyant 19th Century Courtesan(코라 펄의 비망록: 19세기 화려한 코티상의 에로틱한 회고록)이라는 제목으로 그라나다출판사가 발간했다. 이 비망록에는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코라 펄이 자기의 애인들의 섹스 취향을 설명했고 아울러 그가 직접 경험했던 섹스 솜씨 및 재능에 대하여 그림까지 그려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가장 흥미를 돋우어 주는 대목은 만찬을 즐길 때에 후식으로 완전 누드에 크림을 발라서 그것을 핧아 먹도록 한 것이었다.

 

코라 펄

 

또 한 사람의 유명한 코티상은 버지니아 올도니(Virginia Oldoni)이다. 올도니는 귀족으로서 카스틸리오네의 백작부인(Countess di Castiglione)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던 여인이었다. 그는 1850년대에 수중에 돈 몇 푼만 지니고 무작정 파리로 올라왔다. 얼마후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정부가 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와의 관계가 끝나자 파리에 있는 부호들과 정부 고관들의 애인이 되었다. 그의 활동영역은 점차 확대되어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내노라하는 왕족들의 정부로서 이름을 떨쳤다. 버지니아 올도니는 여러 코티상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고 고급의 코티상이었다고 한다. 얘기에 의하면 영국의 어떤 귀족은 버지니아 올도니와 다만 12시간을 함께 있는 조건으로 1백만 프랑을 지불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외모가 따라 주지 않자 파트롱들이 하나 둘씩 떠났다. 그리하여 말년에는 몇년 동안 고독하게 정신병을 앓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버지니아 올도니

 

아마도 코트즌(Courtesan)으로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비록 오페라의 주인공이기는 하지만(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비올레타 발레리(Violetta Valery)일 것이다. 하지만 오페라의 주인공인 비올레타도 실은 실존인물이었다. 비올레타의 원래 이름은 마리 뒤플리시스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본 블로그에 별도로 소개되어 있으므로 부디 참고바란다. 아무튼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는 파리 화류계의 뛰어난 인물인 마리 뒤플리시스를 지극히 사랑하였지만 마리 뒤플리시스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애절한 추억만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뒤마 휘스는 자기와 마리 뒤플리시스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을 주제로하여 소설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elias)을 썼고 베르디가 그 소설에 감동을 받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작곡하였던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내용이다. 뒤마 휘스는 그의 소설 '동백꽃 여인'에서 마리 뒤플리시스라는 이름을 직접 사용하지 않고 마게리트 골티에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썼으며 베르디는 소설에 나오는 마게리트 골티에라는 이름을 비올레타 발레리로 바꾸었던 것이다.

 

마리 뒤플리시스가 오페라에 참석하자 남자들이 오페라보다는 마리 뒤플리시스의 모습을 보느라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림. 여자들이 그런 남자들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코트즌(Courtesan)이라는 단어는 원래 궁전에 있는 여인들을 의미했다. 왕이나 왕비의 시중을 드는 여인들을 말했다. 그렇다고 이들은 일반 백성들이 아니었다. 귀족여인들이었다. 백작부인도 있고 남작부인도 있었다. 그런데 옛날에는 왕이나 군주들이 궁전에 공공연히 정부를 두고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아마 '궁전의 여인들'이라는 의미의 코트즌이 '정부'라는 뜻으로 발전하였고 나아가 고급창녀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풀이이다.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궁전이 정부의 기능도 가졌고 군주가 살고 있는 저택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인 생활과 정치적인 생활이 완전히 믹스되는 일이 많았다. 르네상스의 유럽에서 궁전의 여인들은 상류사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아했다. 당시에 왕과 왕비는 떨어져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의 결혼은 솔직히 말해서 자손을 보는 것이라든지 또는 정치적인 연맹을 위해서 부부로서 사는 것 이외에는 별것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왕은 물론이고 왕비도 궁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은밀히 또는 공공연히 가깝게 지내는 일이 많아졌다. 영어에서 To court(구혼하다)라는 말은 사실상 '궁전에서 살고 있다'는 뜻으로부터 비롯된 것을 생각해 보면 무슨 말인지 대강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Court 라는 말은 나중에 '궁전에 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는 뜻이 되었고 그러다가 '다른 사람에게 애정의 감정을 표현하다'는 뜻이 되었으며 결국 '구혼, 청혼하다'는 뜻이 되었다. 왕의 정부를 Courtesan 이라고 부르지만 여러 여인 중에서도 왕이 가장 총애하는 여인은 The Favourite 라고 불렀음은 참고사항이다. 도니체티의 오페라 '라 화보리타'(La Favorita)는 왕의 정부를 말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자주 등장한 단어로서 Cortigiana(코르티지아니)라는 것이 있다. 왕의 신하들이나 궁전에서 왕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Cortigiano(코르티지아노)라는 단어의 여성형이다. 그 단어는 얼마후부터 '군주의 정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또 얼마후 부터는 교육도 잘 받고 자기 주장도 확실한 여성이지만 도덕성에 있어서는 상당히 해이한 여인들을 말하는 단어로 발전하였다. 더구나 그런 여인으로서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면 더욱 환영을 받았다. 대체로 그런 여인들에게는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파트너로 있어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 상류층 사람들의 애인이 되어 신분의 상승을 바라는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탈리아어의 코르티지아니는 프랑스에서 코트즌이 되어 이것이 16세기말에 영국으로 건너와서 코티세인(Courtisane)이 되었다. 코트세인이라는 단어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고상하게 코트레이디(Courtlady)라는 표현으로 승격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코트즌 또는 코티세인이라고 하면 '왕의 정부' 또는 '창녀'를 의미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의 '동백꽃 여인' 연극 포스터

 

코트즌에 대응하여 남자 봉사자는 이탈리아어로 치치스베오(Cicisbeo)라고 불렀다. 프랑스어의 슈발리에 세르방(Chevalier servant), 스페인어의 코르테호(Cortejo) 또는 에스트레코(Estrecho)와 같은 뜻이다. 슈발리에 세르방, 즉 결혼한 여자의 남자 파트너(또는 情夫)는 18세기말까지도 유럽의 상류 사회에서 상당히 유행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 나오는 옥타비안이 대표적인 예이다. 중년에 이른 대원수부인(마샬린)의 젊은 정부인 옥타비안이 슈발리에 세르방에 해당한다. 오늘날 코트즌이라는 단어는 유럽의 웬만한 도시에는 다 있는 에스코트 여성을 말하기도 하고 또는 직설적으로 매춘부(창녀)를 말하기도 한다. 특히 돈많은 고객을 상대로 하는 에스코트 여성을 코트즌이라고 부른다.

 

플래퍼(Flapper)라는 단어는 1920년대에 유행했던 것으로 자유분방한 젊은 여성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지금보면 상당히 길지만 당시로서는 말도 안되는 짧은 스커트(short skirt)를 입고 머리는 잘라서 단발을 했으며 재즈를 즐겨 듣고 심심하면 춤추러 가는 그런 아가씨들을 플래퍼라고 불렀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과감한 생활스타일이었으나 이들은 그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플래퍼들은 일반 여자들보다  짙은 화장을 하고 대낮인데도 버젓이 술을 마시고 정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섹스를 일상적인 행동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담배를 즐겨 피웠으며 멋진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일반적인 사회규법이나 도덕을 비웃었다. 플래퍼를 일본에서는 후라빠라고 불렀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그 영향으로 후라빠라는 말이 한동안 유행했었다. 플래퍼는 파리잡는 채를 말한다. 

  

플래퍼 걸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라는 말은 주로 소련과 동구의 구 공산권 국가에서 사용하던 용어로서 공산당이 임명한 지위에 있는 별도의 계층을 말한다. 이른바 특권계층이다. 공산주의라는 것이 모두 평등하게 잘 살자는 것이라고 하는데 어찌하여 별도의 특권계층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노멘클라투라는 정부, 경제계, 교육계, 산업계 등 폭넓게 포진하고 있어서 일반대중보다 여러모로 특권을 누리면서 지냈다. 러시아어인 노멘클라투라라는 말은 라틴어의 노멘클라투라(Nomenclatura)에서 가져온 것으로 '명단'을 말한다. 노멘클라투라에 속한 사람들은 사실상 모두 공산당원이었다. 소련정권에 반대한 일부 지식인, 특히 작가들은 공산당이 요소요소에 임명한 이들 노멘클라투라를 '새로운 계급'으로 간주하고 바야흐로 진정한 공산주의를 실현하자면 계급투쟁으로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멘클라투라를 인도의 케이스트에 비유하고 그들만이 상류층에 속하며 다른 사람들은 천민에 속한다고 비판하였다. 노멘클라투라라는 말이 대중화 된것은 소련의 반체제인사로서 작가이며 외교관인 미하엘 보슬렌스키(Michael Voslenski: 1920-1997)의 저서인 Nomenklatura: The Soviet Ruling Classe(노멘클라투라: 소련의 지배계급)에서 노멘클라투라라는 용어를 정식으로 사용하고나서부터였다.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서 소련의 사회노동당의 창설 멤버인 토니 클리프(Tony Cliff: 1917-2000)는 그의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 이론에서 노멘클라투라를 바람직하지 않은 새로운 클라스라고 규정하였다.

 

부스 타킹턴의 '줄리아'

 

제트 셋(Jet set)이라는 용어는 뉴욕의 컬럼니스트이며 저널리스트인 이고르 카씨니(Igor Cassini: 1915-2002)가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고르 카씨니는 촐리 니커보커(Cholly Knickerbocker)라는 필명으로 컬럼을 쓴 사람이다. 제트 셋은 국제적으로 이름난 부유층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개인 제트기를 타고 세계 각지를 아무 때나 다니면서 각종 사회적 모임에 참가하고 나타내 보이기를 즐겨한다. 이들은 사회적인 특별한 용무가 없다고 하더라도 제트기를 타고 이국적인 곳, 유행이 넘쳐 있는 곳을 가서 생활을 엔조이하는 특성이 있다. 제트 셋이라는 용어는 그 이전에 유행하였던 카페 소사이어티(Cafe society)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카페 소사이어티는 19세기에 주로 뉴욕, 파리, 런던에서 귀공자 클럽을 만들어서 고급 카페나 레스토랑 등에 모여 한담이나 하던지 무얼 먹고 마시던지 하며 환락을 즐기던 부류들을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 세트 셋이라는 말은 주로 돈많은 연예인들이 공연을 위해 개인 제트기를 타고 순식간에 이곳 저곳을 다니는 경우를 말한다.

 

게이 나인티스 포스터

 

코트즌과 연관되는 또 다른 용어로는 게이 나인티스(The Gay Nineties)라는 것이 있다. 1890년대에 미국에서 유행하던 용어이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게이 나인티스라는 용어에 대하여 일종의 노스탈자(향수)와 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 영국에서는 '형편없는 90년대'(The Naughty Nineties)라고 불렀다. 막되어 먹었고 버릇없으며 재수없는 90년대라는 뜻일 것이다. 게이 나인티스이건 노티 나인티스이건 이러한 풍조에 대표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영국의 화가로서 겨우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Beardsley: 1872-1898), 재치있는 희곡과 풍자로서 유명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 풍미했던 사회적 스캔들과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Suffragette) 등도 게이 나인티스 또는 노티 나인티스의 확산에 일조했다.  

오브리 비어즐리의 'Stomach Dance. 게이 나인티스를 대표하는 그림이다.

                                        

미국에서 게이 나인티스라는 용어가 사회적으로 정착된 것은 1920년대에 화가인 리챠드 컬터(Richard Culter: 1883-1929)의 기여가 컸다. 그는 라이프 잡지에 최초로 '게이 나인티스'라는 타이틀로 그림을 그려 게재하기 시작했다. 여류작가로서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로서 퓰리처상을 받은 에디스 와턴(Edith Wharton: 1862-1937), '줄리아'(Julia)라는 소설로 퓰리처 상을 받은 부스 타킹턴(Booth Tarkington: 1869-1946)은 그들의 작품에서 유산을 많이 상속받아서 화려하고 안락한 생활을 즐기고 있는 부류들을 설명함으로서 게이 나인티스의 성격을 표현하였다. 1930년대에는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으로서 '게이 나인티스'라는 것이 있었다. 1890년대에 헬로 마 베이비(Hello Ma Baby) 등 여러 힛트 곡을 작곡했던 조 하워드(Joe Howard: 1878-1961)가 호스트한 프로그램이었다. 풍족했던 1890년대에 대하여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한편, 1920년대로부터 비교적 최근인 1960년대까지 미국에서는 게이 나인티스에 대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노티 나인티스'(1945), She Done Him Wrong(1933), Belle of the Nineties(1936), The Nifty Nineties(1941 디즈니 만화영화. 미키와 미니 등장), By the Light of the Silvery Moon(1953. 무지컬 영화), Hello, Dolly!(1969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 영화) 등이다.

 

도리스 데이 주연의 '바이 더 라이트 오브 더 실버리 문' 포스터 

                      

지금까지는 일종의 참고자료이며 이제 본론에 들어가서 알렉산드르 뒤마 휘스가 쓴 Le Demi-monde의 줄거리를 소개코자 한다. 수잔느 당즈(Suzanne D'Ange)남작부인은 아무래도 궁금하기 짝이 없는 계층에 속하여 있는 것 같다. 결혼한 여자들의 모임인데 남편들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수잔느에게는 여러 연애사건이 있었다. 최근의 것은 톤느랭 후작(Marquies de Thonnerins)과의 사건이며 더 최근의 것은 올리비에 드 잘랭(Olivier de Jalin)과의 사건이다. 그런데 지금은 매력적인 젊은 장교인 레이몽 드 난자크(Raymond de Nanjac)를 만나고 있다. 레이몽은 북부 아프리카에서 10년동안 근무하다가 프랑스로 돌아온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파리의 사교계, 구체적으로 말하면 화류계의 사정이 어떠한지를 잘 모른다. 다시말하여 수잔느와 같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잘 모른다. 수잔느는 그런 레이몽을 만나자 정말로 이제는 부나비같은 생활을 청산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고 싶었다. 다만, 후작과 올리비에가 조용히만 있어 준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잘될려고 그런지 또는 잘못되려고 그런지 올리비에와 레이몽은 어쩌다가 우연히 만나 금방 친구가 된다. 올리비에는 레이몽이 수잔느와 결혼할 생각인 것을 알고는 친구인 레이몽에게 수잔느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경고를 해 주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레이몽은 처음에는 올리비에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으려고 하지만 올리비에가 수잔느와 주고 받은 편지들을 보여주겠다고까지 말하자 점차 수잔느의 정체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고 결국 수잔느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후회스러운 것인지를 느낀다. 수잔느는 올리비에가 자칫하면 약혼자인 레이몽에게 의심만 심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크게 걱정한다. 수잔느는 올리비에에게 지금까지 보냈던 편지를 돌려달라고 요청한다. 다행이 올리비에는 이미 수잔느와의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받았던 편지를 돌려준다. 수잔느는 올리비에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모두 없애고 새로 다른 사람의 필체로 편지를 써 놓는다. 이어 수잔느는 레이몽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올리비에에게 보냈다고 하는 편지들을 우연히 보도록 한다. 그러면서 이 편지들은 자기가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수잔느는 당즈 남작과 결혼하려고 했던 기록을 보여주며 당즈 남작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에 레이몽은 수잔느에 대하여 의심을 가졌던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한편, 후작은 레이몽이 전부터 집안끼리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인 것을 알게 된다. 그동안 교류가 없었던 것은 레이몽이 아프리카에 10년동안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작은 레이몽이 수잔느와 결혼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수잔느를 만나서 레이몽과 결혼하는 것은 그를 파멸시키는 행위라고 하면서 그러지 말라고 경고한다. 수잔느는 후작에게 레이몽을 깊이 사랑하므로 절대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며 제발 과거에 자기와 함께 살았었다는 것을 비밀로 해 줄것을 눈물로서 간청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를 레이몽이 후작의 집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다. 바로 그날 저녁에는 레이몽이 수잔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올리비에와 결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수잔느와 후작과의 사이를 알게된 레이몽은 후작에게 용서를 구하고 수잔느를 후작이 거두어서 함께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수잔느에게 있어서 올리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분명히 짐작하건대 수잔느는 후작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후작이 수잔느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수잔느와 결혼하게 되면 자기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얘기한 것은 수잔느의 명예를 짓밟는 것이므로 결투를 신청한다.

 

레이몽과 두 사람과의 결투는 올리비에의 아파트의 뒷마당에서 실행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는 수잔느는 다만 이들의 결투를 지켜볼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올리비에의 아파트에 가서 결투의 결과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한참 후에 올리비에가 나타난다. 그러면서 수잔느의 질투가 결국 자기로 하여금 레이몽을 죽이게 했다고 말한다. 그러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기회주의자인 수잔느는 상황을 파악하고서는 올리비에의 품으로 달려 들면서 함께 살자고 간청한다. 그러한 순간에 올리비에가 갑자기 큰 웃음을 터트린다. 이와 함께 죽었다고 하는 레이몽이 나타난다. 레이몽은 수잔느의 그같은 표리부동하고 이중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그동안 수잔느에게 대하여 품고 있었던 열정과 환상을 모두 청산한다. 그러면서 수잔느에게 처음에 결혼하려고 했던 후작에게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내세운다. 결국 수잔느는 레이몽의 도움으로 후작에게 돌아가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이 지낼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