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참고자료] 최초의 비올레타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

정준극 2012. 5. 26. 10:41

[참고자료]

비올레타의 이미지를 창조한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Fanny Salvini-Donatelli)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Fanny Salvini-Donatelli: 1815-1891)는 19세기에 유럽에서 이름을 떨쳤던 이탈리아의 오페라 소프라노이다. 그는 1853년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가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을 때 타이틀 롤인 비올레타를 맡아서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이 되었다.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는 베르디의 다른 오페라들의 주역들도 맡아 놀랍도록 훌륭하게 해석함으로서 베르디 전문 성악가, 즉 초창기의 베르디아나(Verdiana)로서 크게 인정을 받았다. 물론 도나텔리는 베르디 뿐만 아니라 도니체티 등의 작품 등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어 찬사를 받았다. 그는 베르디의 오페라로서는 '아롤도'(Aroldo)에서 미나, '해적'(Il corsaro)에서 굴나라, '두 사람의 포스카리'(I due Foscari)에서 루크레치아, '에르나니'에서 엘비라, '조반나 다르코'(Giovanna d'Arco)에서 타이틀 롤, '롬바르디의 첫 십자군'(I Lombardi alla prima crociata)에서 지셀다, '맥베스'에서 레이디 맥베스, '산적'(I masnadieri)에서 아말리아,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 '리골레토'에서 질다, '일 트로바토레'에서 레오노라를 맡았으며 도니체티의 오페라로서는 '돈 파스쿠알레'에서 노리나, '샤무니의 린다'에서 린다, '람메무어의 루치아'에서 루치아,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에서 루크레치아, '로한의 마리아'에서 마리아, '폴리우토'에서 파올리나를 맡았다. 이어 벨리니의 작품으로서는 '청교도'에서 엘비라, '텐다의 베아트리체'에서 베아트리체를 맡았고 다른 오페라에도 여러번 출연하였다.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는 당대 최고의 오페라 소프라노였다.

 

'라 트라비아타' 포스터.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의 원래 이름은 프란체스카 루키(Francesca Lucchi)였다. 플로렌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는 배우가 되어 돈을 벌려고 했다. 1830년에 그는 배우인 주세페 살비니의 두번째 부인이 되었다. 나중에 유명한 배우가 된 토마소 살비니는 전처의 소생으로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가 길렀다. 그러나 결혼생활을 불행한 것이었다. 특히 전처의 자녀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결국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는 가출을 하였고 그로 인하여 남편 주세페 살비니는 아내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가 불륜을 저질러서 가출했다고 뒤집어 씌어서 법원으로부터 별거허락을 받았다. 그러한 사건이 있은지 2년 후에 남편 주세페 살비니는 세상을 떠났다.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가 결혼생활을 통해서 유일하게 얻은 것은 성악공부를 할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는 1839년에 베니스의 테아트로 아폴로에서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로 데뷔하였고 그로부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오페라 소프라노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비올레타의 모델이 된 마리 뒤플르시스의 초상화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는 주로 베니스의 라 페니체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1850년대에는 파르마에서도 오페라에 출연했다. 파르마에서의 인기는 대단했다. 파르마의 유명한 시인인 아르타세르세 폴리는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를 찬양하는 시를 써서 바치고 오페라를 보런 온 관객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아직까지도 기억되는 에피소드이다.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는 또한 밀라노의 라 스칼라, 토리노의 테아트로 레지오, 볼로냐의 테아트로 코뮤날레, 트리에스테의 테아트로 그란데 등에서도 오페라에 출연했다. 이탈리아 이외에서는 파리, 바르셀로나, 비엔나, 런던 등에서 오페라에 출연했다. 1843년 비엔나에서 베르디가 직접 지휘하는 '나부코'에서는 아비가일레를 맡았으며 1858년 런던 드러리 레인에 있는 로열 극장에서는 영국초연의 '일 트로바토레'에서 레오노라를 맡았다.

 

'라 트라비아타'가 초연된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 오디토리엄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는 비올레타의 이미지를 창조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밖에도 네 역할에서 초연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조반니 파치니의 '알란 카메론'에서 에디타(1851. 파르마의 테아트로 레지오), 살바토레 사르미엔토의 '엘미나'에서 타이틀 롤(1851 파르마의 테아트로 레지오), 카를로 에르콜레 보소니의 '라 프리지오니에라'(La prigioniera: 포로: 1853. 라 페니체)에서 엘레오노라의 이미지를 창조한 것이다.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는 일반적으로 1860년에 무대에서 은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877년에 브뤼셀의 모네극장에서 오페라에 출연했다는 기록이 있다.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는 1891년 향년 76세로서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라 트라비아타 초연 당시의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와 관련한 피아스코(Fiasco)는 음악계의 에피소드로 남아 있다. 피아스코는 원래 목이 좁고 긴 병을 말하지만 해학적으로는 실패를 의미한다. 1853년 베니스에서의 '라 트라비아타' 초연는 일반적으로 피아스코였다. 당시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가 38세의 중년이었으며 체구도 우람한 편이었다. 폐병으로 체력이 소모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는 비올레타의 모습으로서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문에 베르디 자신도 '라 트라비아타'(당시 타이틀은 '비올레타')가 피아스코로 끝난 것은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제3막에서 의사가 비올레타의 병세가 대단히 악화되어 이제 살아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선언하자 관중석에서 어떤 사람이 '폐병환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마 몸이 부은 모양이다'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린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실제로 베르디는 공연을 앞 둔 두어달 전에 비올레타로서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본가인 마리아 피아베를 통하여 라 페니체 극장장에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비올레타 역의 마리아 칼라스

 

비록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의 겉모습이 비올레타라는 병약한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을 그의 노래에 대하여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1막에서 비올레타가 Sempre libera 라는 대단히 어려운 곡을 부르자 모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튿날 La Gazzetta di Venezia(베니스신문)는 평론을 통해서 '살비니 도나텔리는 마에스트로(베르디를 말함)가 만들어 놓은 여러 부분의 어려운 콜로라투라 파싸지를 놀랄만한 기교와 완벽함으로 훌륭하게 소화하였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의 아리아만 박수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서곡에 대하여도 사람들은 많은 박수를 보냈다. 서곡이 끝나자 사람들은 베르디의 이름을 연호하면서 박수를 보냈다. 제1막의 막이 올라가기도 전에 관중들이 박수를 보낸 일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그러므로 '라 트라비아타'의 초연이 피아스코였다는 주장은 상대적인 얘기라고 할수 있다. 문제는 제2막에서 발생하였다. 특히 바리톤 펠리체 바레시와 테너 로도비코 그라치아니의 노래가 관중들의 핀잔과 조소를 받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라 트라비아타'는 초연 이래 상당한 사랑을 받았다. 베니스에서만 초연이후 한 시즌에 10회의 공연이 더 있었던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라 트라비아타'는 베르디의 라 페니체에서 공연되었던 두 편의 오페라에 비하여 수입도 많았다. 라 페니체에서 초연된 오페라들은 '에르나니'와 '일 코르사로'였다. 그 두편의 수입보다도 '라 트라비아타'의 입장수입이 거의 배나 많았다.

 

베르디는 초연의 스코어를 수정하여서 이듬해에 역시 베니스에서 다시 무대에 올렸다. 이번에는 산 베네데토 극장(Teatro San Benedetto)에서였다. 그리고 비올레타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던 마리아 스페치아(Maria Spezia)가 맡았다.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보다 13세나 젊었고 보기에도 상당히 갸냘픈 모습이어서 비올레타로의 이미지를 보여주기에는 적격이었다. 대성공이었다. 그후 마리아 스페치아는 콘스탄티노플, 볼로냐, 런던에까지 가서 비올레타를 불렀다.

 

라 트라비아타의 수정버전에서 비올레타를 맡은 마리아 스페치아(알디기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