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세기의 왕비 씨씨

엘리자베트(씨씨) 약력

정준극 2012. 5. 29. 23:26

엘리자베트(씨씨) 약력을 다시 소개함

 

엘리자베트 왕비.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 작품

 

2012년으로 탄생 175주년을 기록하는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왕비는 1837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뮌헨의 루드비히슈트라쎄(Ludwigstrasse)에서 아버지 막시밀리안 공작과 어머니 루도비카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식구들은 엘리자베트를 씨씨(Sisi)라고 불렀다. 1837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헌종이 임금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해였으며 세계적으로는 영국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해이다. 씨씨는 막시밀리안과 루도비카의 여덟 자녀 중에서 셋째였다. 어머니 루도비카는 촌수로 보면 아버지 막시밀리안의 조카였다. 유럽의 왕가에서는 사촌간 결혼은 보통이고 조카와의 결혼도 자주 있는 일이다. 루도비카는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 1세의 공주였다. 씨씨는 뮌헨과 포센호펜(Possenhofen)에서 자랐다. 포센호펜은 막시밀리안 공작의 시골궁전이었다. 씨씨의 어머니인 루도비카의 언니, 즉 씨씨의 이모인 조피(Sophie)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란츠 칼 대공과 결혼하였으며 프란츠 요셉을 낳았으니 그가 나중에 무려 68년이나 오스트리아 제국(나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통치한 프란츠 요셉 1세 황제이다. 자매간인 조피와 루도비카는 프란츠 요셉이 젊은 나이에 황제가 되자 배우자로서 루도비카의 큰 딸 헬렌(애칭 네네: Néné)을 내정하였다. 헬렌은 엘리자베트(씨씨)의 언니이다. 그런데 일이 참으로 묘하기 되느라고 프란츠 요셉이 헬렌에게 청혼하기 위해 주선된 모임에서 프란츠 요셉이 당시 16세이던 씨씨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 결국 언니 대신에 동생과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황제의 결정이니 아무도 말릴수 없었지만 황제의 어머니인 조피는 속이 상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씨씨 서거 100주년 기념 우표. 오스트리아 정부 발행

 

프란츠 요셉 황제와 씨씨의 결혼식은 1854년 4월 24일 비엔나의 성아우구스틴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예전에 마리아 테레자와 샤를르 프란츠가 결혼식을 올렸던 황실교회이다. 씨씨는 비엔나 궁정에서의 엄격한 법도에 익숙하지 않아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결혼후 이듬해인 1855년 씨씨는 큰딸 조피를 낳았다. 시어머니인 조피가 어린 조피를 직접 기르겠다고 하여 데려갔다. 이어 1856년에는 둘째 딸 지젤라를 낳았다. 어린 조피는 1857년에 두살로서 부다페스트에서 사망했다. 1858년에는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다. 황태자인 루돌프였다. 결혼한지 5-6년이 지나서 결혼생활은 위기에 빠졌다. 비엔나에서는 프란츠 요셉 황제가 다른 여자와 스캔들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씨씨는 아이들 문제로 시어머니(실은 이모)인 조피와 자주 다투었다. 드디어 1859년 씨씨는 둘째 딸 지젤라를 데리고 고향집인 포센호펜으로 떠났다. 이어 1860년에는 비엔나의 집에는 돌아가지 않고 저 멀리 대서양의 마데이라 섬과 지중해의 말타 섬, 그리고 그리스의 코르푸 섬을 돌아다니며 지냈다. 씨씨가 집을 떠나 돌아다니는 통에 남편 프란츠 요셉은 비엔나에서 혼자서 지내야 했다. 물론 정무에 바뻐서 한가할 틈이 없었지만 그래도 젊은 사람이 부인이 없이 지내자니 힘든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비엔나의 성아우구스틴교회에서의 결혼식. 우리나라에서는 강화 도령이 철종이 되어 임금의 자리에 있던 때였다.

 

1861년 씨씨는 비엔나로 돌아왔다. 아이들의 교육문제는 아직도 분쟁의 항목이었다. 시어머니인 조피는 아이들을 씨씨에게서 떼어 놓고 교육을 하겠다고 나섰다. 속이 상한 씨씨는 또 다시 비엔나를 떠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지냈다. 1862년에 베니스에 있을 때 친정어머니와 친정집의 주치의인 피셔 박사가 찾아왔다. 피셔박사는 씨씨의 건강이 극도로 약해진 것을 발견하고 온천에서의 요양을 적극 권장하였다. 씨씨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키싱저 온천에 여러번 갔었다. 1863년에 비엔나로 다시 돌아온 씨씨는 호프부르크에서의 무도회에 3년 만에 처음으로 참석하였다. 사람들은 씨씨의 건강이 좋아진 것으로 생각하여서 기뻐하고 축하를 보냈다. 씨씨는 헝가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여행을 다녔다. 그래서 비엔나에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씨씨는 비엔나를 떠나 지내면서 몇 명의 애인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씨씨가 어린시절을 보낸 포센호펜성

 

1864년에 씨씨는 조카가 되는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를 만났다. 루드비히 2세라고 하면 바그너를 후원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루드비히 2세는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씨에 대하여는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그때쯤해서 씨씨의 아름다움은 유럽 전역에서 전설로 남게 되었으며 유명한 화가인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가 그린 씨씨의 유명한 초상화는 이때에 완성한 것이다. 1866년에 오스트리아군이 프러시아에 패배를 하자 씨씨는  합스부르크를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부다페스트로 갔다. 씨씨는 헝가리 말을 유창하게 했으며 헝가리 사람들을 사랑했고 헝가리를 사랑했다. 헝가리의 귀족과 평민들은 한결같이 씨씨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씨씨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탄생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1866년에 씨씨는 부다페스트 인근의 괴델뢰성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헝가리 국민들은 씨씨에게 감사의 뜻으로 괴델뢰 성을 선물했다.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라고 하면 바그너와 신데렐라 성과 같은 노이슈반슈타인성을 연상케 한다. 그러한 루드비히 2세는 씨씨의 조카였다. 설경이 아름다운 노이슈반슈타인성.

 

1867년 6월 8일 프란츠 요셉과 씨씨는 헝가리의 왕과 왕비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씨씨는 남편 프란츠 요셉이 비록 헝가리를 합스부르크의 제국에 두었지만 헝가리에 군대를 보내는 대신에 여러 면에서 자주적인 통치를 하도록 허용한데 대하여 깊이 감사했다. 이와 함께 부부는 화해를 하여 예전의 남편과 아내로 돌아갔다. 1868년에 씨씨는 괴델레성에서 셋째 딸 마리아 발레리를 낳았다. 그러나 아직도 씨씨의 건강을 완전하지 못하여 딱딱한 비엔나의 궁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씨씨는 비엔나에서 남편과 함께 지내지 못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심지어 남편 프란츠 요셉에게 정부와 지내는 것을 용인하였다. 프란츠 요셉의 정부는 연극배우인 안나 나호브스키였다. 씨씨는 마리아 발레리를 너무 사랑하여서 이번에는 아이를 비엔나로 보내어 교육을 받지 않도록 하고 직접 기르기로 했다. 씨씨는 오스트리아의 권위주의적이며 지나치게 뷰로크라틱한 체제를 극히 싫어했다. 씨씨는 비엔나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비엔나를 떠나 지내는 동안에 하이네의 시에 심취하여 하이네의 시집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기까지 했다. 아울러 직접 시를 쓰기도 했다. 씨씨의 미모는 모든 사람들의 선망과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씨씨는 체중이 늘어 죽게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씨씨는 몸을 날씬하게 유지하기 위해 무한한 노력을 기울였다. 금식을 하고 하루에도 몇시간씩 마치 군대가 행진을 하듯 걸어다녔으며 체조를 하기도 했다. 오늘날 씨씨의 건강상태를 얘기할 때에 신경성 식욕부진(Anorexia nervosa)라고 하는 것은 그로부터 생긴 표현이다.

 

헝가리국민들이 씨씨에게 선물한 헝가리의 괴될뢰성. 씨씨는 이곳을 가장 좋아했다.

 

1874년에 씨씨는 가장무도회에서 프리드리히 리스트 파허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후 씨씨는 그와 비밀편지를 주고 받았다. 가장무도회가 있은지 10년 후에 씨씨는 자기의 시에 그를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1875년에 씨씨는 노르망디에서 말을 타고 가다가 떨어져서 큰 부상을 입었다. 1876년에는 영국을 방문하였고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따듯한 환대를 받았다. 씨씨는 지칠줄 모르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계속 방문하기 위해 여행하였다. 1899년에 비극이 닥쳤다. 황태자인 루돌프가 비엔나 근교의 마이엘링에서 자살한 것이다. 루돌프의 시신은 카이저그루프트(황실영묘)에 안치되었다. 사람들은 씨씨가 카푸친교회의 지하에 있는 카이저그루프트를 홀로 찾아가서 루돌프의 관을 붙잡고 '루돌프, 루돌프'라면서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카이저그루프트에서 나온 씨씨의 모습을 평상시처럼 평온하였다. 그후 씨씨는 다시는 루돌프의 관을 찾아가지 않았다. 씨씨가 카이저그루프트에서 루돌프를 다시 만난 것은 관에 담겨 루돌프의 옆에 놓여진 때였다.

 

비엔나 시내의 카푸친교회 지하에 있는 카이저그루프트(황실영묘)에 있는 씨씨의 관

 

1898년, 씨씨는 제네바에 머물고 있었다. 가명을 쓰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멀리서 보고서도 그가 씨씨인줄을 알았다. 9월 10일 초저녁, 씨씨는 제네바 호수의 건너편으로 가려고 배를 타러 가다가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라고 하는 루케니라는 불량배와 같은 청년으로부터 뜻하지 아니한 공격을 받아 그가 찌른 송곳과 같은 흉기에 찔려 숨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루케니라는 사람은 프랑스의 오를레앙 가문의 사람이 제네바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를 죽이려 했으나 그를 찾지 못하여 대신 귀부인처럼 보이는 씨씨를 살해하였다는 것이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씨씨의 죽음은 프란츠 요셉 황제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누가 무어라해도 프란츠 요셉 황제는 오로지 씨씨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씨씨의 시신은 제네바에서 비엔나로 옮겨져 장엄한 장례식을 치룬후 합스부르크의 관례에 따라 시신은 카이저그루프트에 놓여지고 심장은 성아우구스틴교회에 보관되었으며 장기는 슈테판대성당의 지하에 보관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씨씨가 제상을 떠난후 18년을 더 살다가 1918년 세계 1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세상을 떠났다.

 

왼쪽으로부터 씨씨, 마리아 발레리 공주, 프란츠 요셉 황제, 루돌프 황태자, 프란츠 요셉 황제의 남동생과 그의 가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