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세기의 왕비 씨씨

프란츠 요셉의 여친 카타리나 슈라트

정준극 2013. 2. 7. 06:16

카타리나 슈라트(Katharina Schratt)

프란츠 요셉 황제의 막역한 여자친구(칸피댕트)

 

잠옷의 카타리나 슈라트

 

엘리자베트 황비(씨씨)는 비엔나의 궁전을 떠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는 여행을 자주 다녔다. 그렇게 집을 떠나서 객지에서 지내는 일은 아들 루돌프가 자살하자 더 빈번해 졌다. 비엔나에 혼자 남아 있는 프란츠 요셉 황제는 말동무라도 할 친구가 필요했다. 예쁘고 젊은 여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상냥하고 명랑하며 재치가 있고 지성이 있는 여자친구라면 더 말 할 나위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어느덧 50대 후반에 이른 프란츠 요셉은 씨씨가 집을 떠나 어디론가 돌아다니고 있는 날이면 심심해서 저녁에 연극이나 오페라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프란츠 요셉은 어느날 밤에 그날도 호프부르크의 극장에서 연극을 보았다. 카타리나 슈라트(Katharina Schratt)라는 여배우가 주역이었다. 당시 슈라트는 20대 후반의 젊은 여인이었다. 프란츠 요셉과는 무려 23년의 나이차이가 있었다. 사진이나 초상화를 보면 알겠지만 슈라트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물론 씨씨보다는 못하지만 아무튼 상당한 미인이었다. 게다라 지성적이며 유머와 위트가 있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카타리나 슈라트에게 흠뻑 빠졌다. '아니, 세상에 저렇게 예쁘고 착하게 생긴 여배우도 다 있단 말인가?'라면서 큰 관심을 보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카타리나 슈라트에게 며칠 후에 비엔나를 방문하는 러시아의 알렉산더 3세 짜르를 위해서 연극을 공연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카타리나 슈라트는 프란츠 요셉 황제의 동반자적인 여친이 되었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카타리나 슈라트의 모습

 

카타리나 슈라트와 친구가 되어 지내기 시작한 프란츠 요셉 황제는 인생을 다시 사는 것과 같았다. 슈라트를 만나면 그저 기분이 좋았다. 속을 털어 놓을수 있는 말동무가 있다는 것은 노년의 황제에게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씨씨는 허구헌날 집 밖으로 나돌아다니기나 하고, 더구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루돌프가 자기 부인은 제쳐놓고 웬 어린 여자를 죽어라고 좋아하다가 결국은 동반자살을 택한 끔찍한 사건까지 일어나서 말로 표현할수 없는 상심에 빠져 있는 때에 여친이 생겼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프란츠 요셉과 카타리나 슈라트의 관계는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 되었다. 프란츠 요셉도 더 이상 슈라트를 비밀스럽게 만나거나 남의 이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함께 산책을 즐기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었다. 공식 석상에도 함께 나타났다. 사정이 그렇게 되자 씨씨로서는 모른채 하고 남편 프란츠 요셉이 마음대로 하도록 가만히 있을수 밖에 없었다. 그런가하면 씨씨가 오히려 프란츠 요셉을 위해 여친과 지내는 것을 권장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프란츠 요셉과 슈라트의 관계는 다른 경우처럼 육체적인 열정이 저변에 깔려 있는 정부(미스트레스), 또는 애인이라는 개념은 아니었다고 한다.

 

비엔나의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에 출연한 슈라트의 모습. 무슨 연극인지는 몰라도 점장이 여인으로 나왔다.

                               

프란츠 요셉과 슈라트의 관계는 1898년 씨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프란츠 요셉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30여년간 계속되었다. 다만, 1900년에 1년 동안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지낸 일은 있었다. 어떤 문제에 대하여 의견이 서로 달라서 말다툼을 하고나서 1년 동안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다가 도저히 그럴수가 없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슈라트는 일개 여배우에서 '오스트리아의 무관의 황비'(The uncrowned Empress of Austria)로서 영화 속에서 지냈다. 황제는 슈라트에게 쇤브룬에서 가까운 곳에 저택을 하나 마련해 주었다. 되도록이면 가깝게 있으면서 언제라도 쉽게 만날수 있기 위해서였다. 슈라트의 저택은 오늘날 13구 히칭의 글로리에테가쎄(Gloriettegasse)에 있었다. 황제는 바드 이슐의 황실 별장(카이저 빌라)에서 지낼 때에도 슈라트를 자주 만나기 위해 카이저 빌라에서 가까운 곳에 슈라트를 위해 별도의 저택을 하나 마련해 주었다. 나중에 빌라 슈라트라고 불리게 된 저택이었다. 바드 이슐의 황실 별장과 빌라 슈라트 사이에는 오솔길이 있어서 사람들의 눈에 별로 띠지 않고 쉽게 왕래할수 있었다. 오늘날 그 오솔길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현재 빌라 슈라트는 여관 겸 식당이다. 황제는 슈라트에게 비엔나의 종심가인 오페른링에 3층 짜리 시내 저택을 선사했다. 슈타츠오퍼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현재의 오페른링 1번지 건물이라고 한다. 당시의 건물은 전쟁 중에 파손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거의 새로 복구한 건물이다. 1990년대에 KAL 사무실이 있었다.) 슈라트는 약간의 끼가 있어서인지 도박도 즐겨 했는데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슈라트가 그동안 도박을 하며 진 빚을 모두 갚아주었다. 황제와 슈라트의 관계는 정확히 34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동안 슈라트는 프랑스의 퐁파두나 멘트농과 같은 막강한 위치의 여인으로서 지냈다. 그래서 한때는 제국의 모든 길은 슈라트를 거쳐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퐁파두(Jeanne Anntoinette Poisson, Marquise de Pompadour: 1721-1764)는 루이 15세의 정부였으며 멘트농(Francois d'Aubigne, Marquise de Maintenon: 1635-1719)은 루이 14세의 두번째 부인이었다. 그런데 멘트농과 루이14세의 결혼은 공식적으로 발표도 되지 않았고 인정도 받지 못했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산책하고 있는 슈라트. 비엔나의 부르크가르텐.

                              

카타리나 슈라트는 도대체 어떤 여인인가? 카타리나 슈라트는 1853년 9월 11일 비엔나 교외의 바덴 바이 빈(Baden bei Wien)에서 태어났다. 온천장 마을이다. 슈라트의 아버지는 사무집기를 공급하는 사업을 했다. 예쁘고 발랄한 성격의 슈라트는 여섯 살때부터 극장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혹시라도 슈라트가 여배우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여 극장의 근처에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그럴수록 어린 슈라트의 무대에 대한 관심을 점점 커지기만 했다. 슈라트는 10대 중반에 가출하여서 어떤 극단의 단원이 되었다. 그때부터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이곳저곳에서 순회공연을 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독일의 어떤 귀족의 관심을 끌어 베를린의 궁정극장에서 연극에 출연할수 있게 되었다. 그때 슈라트는 불과 18세였다. 바덴 바이 빈의 이름없는 아가씨가 베를린의 궁정극장에서 공연하게 되었으니 대단하기는 대단했다. 베를린에서 슈라트는 미모에다가 연기력도 있어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비엔나의 시립극장 사람이 베를린에서 슈라트의 연극을 보고 비엔나 출신이면 비엔나에 와서 비엔나 사람들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슈라트를 비엔나의 시립극장으로 초청하였다. 비엔나에서 슈라트의 인기는 베를린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슈라트는 외국 순회 공연을 갖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당시에 뉴욕까지 가서 공연했다. 그리고 비엔나로 돌아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궁정극장(부르크테아터)의 고정 멤버가 되었다. 슈라트는 프란츠 요셉 황제의 제안에 의해 1900년에 무대에서 은퇴할 때까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배우였다.

 

카타리나 슈라트

 

슈라트는 1879년, 그가 26세 때에 헝가리의 귀족인 니콜라우스 키스 폰 이테베(Nikolaus Kiss von Ittebe)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안톤이라는 아들이 태어났지만 두 사람은 결혼 2년만에 헤어졌다. 성격차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슈라트가 프란츠 요셉이라는 노인과 재혼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저 아주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슈라트는 1916년에 프란츠 요셉 황제가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나자 캐른트너 링에 있던(현재의 오페른 링) 화려한 아파트에서 나와 살아야 했다. 슈라트는 프란츠 요셉 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히칭의 저택에서만 지냈다. 그저 조용히 지냈다. 그렇게 30 몇년을 살다가 1940년 4월 17일,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카타리나 슈라트는 1차 대전을 지켜보았으며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경험하였고 2차 대전의 참화도 경험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카타리나 슈라트의 무덤은 히칭 공동묘지에 있다.

 

히칭공동묘지의 슈라트 묘지. 남편인 이테베의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엘리자베트(씨씨)는 프란츠 요셉과 결혼하여 44년을 살았다. 하지만 그 기간동안 사실상 4년 동안만 함께 살았다. 그렇다고해서 두 사람의 애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란츠 요셉은 씨씨에게 충실하였고 평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가 여배우인 카타리나 슈라트와 가깝게 지냈지만 황제와 씨씨와의 애정이 식어서 그랬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황제는 씨씨가 동화 속에서나 나올수 있는 왕자와 공주의 사랑을 꿈꾸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현실과 맞지 않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카타리나 슈라트는 다른 귀족들이나 마찬가지로 여름이면 비엔나를 떠나 잘츠카머구트 지역에서 지냈다. 슈라트는 주로 장크트 볼프강 부근에 있는 슐로스 프라우엔슈타인(Schloss Frauenstein)에서 지냈다. 황제는 판들(Pfandl)로 가는 길에 있는 빌라 펠리시타스(Villa Felicitas)를 슈라트가 마음대로 사용토록 했다. 그후로 이 집은 빌라 슈라트로 알려지게 되었다.

 

바드 이슐에 있는 빌라 슈라트. 카타리나 슈라트의 바드 이슐에 오면 지내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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