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탄생과 어린시절

정준극 2012. 6. 7. 08:26

운명의 수레바퀴 - 탄생과 어린시절

 

소녀시절의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의 어머니요 나아가서 유럽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운명은 참으로 복잡다단한 것이었다. 아버지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르 6세는 결혼 8년이 지났는데도 자녀가 없자 내심 무턱 초조하였다. 샤를르 6세는 형인 요셉 1세가 뜻하니 아니하게 세상을 떠나자 뜻하지 아니하게 황제가 되었다. 샤를르 6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 1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유언을 통해서 만일 큰 아들 요셉 1세가 죽으면 둘째 아들인 샤를르 6세가 황제가되지만 샤를르 6세에게 아들이 없으면 형인 요셉 1세의 딸들 중에서 대를 잇는다고 해 놓았다. 요셉 1세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그러므로 만일 샤를르 6세에게 자녀가 생기지 않으면 조카들인 형의 딸들에게 왕위가 돌아갈 입장이었다. 그러던 중에 드디어 하늘이 점지하셨는지 1716년에 아들이 태어났다. 레오폴드 존(Leopold John)이었다. 그러나 이 무슨 하늘의 심술인지 또는 하늘의 섭리인지 그렇게도 기다렸던 아들은 생후 7개월만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다행히도 샤를르 6세의 부인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두번째 아이를 임신하였다. 그리하여 1717년 5월 13일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났다. 비엔나의 호프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크게 섭섭하여 이름을 섭섭이라고 지으려고 했지만 그럴수 없어서 마리아 테레지아라고 이름을 짓고 태어난 그날 저녁에 아우구스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호프부르크의 미하엘러토르.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난 궁전의 정문이다.

 

세례 받을 때의 대모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숙모, 즉 큰 삼촌인 요셉 1세의 미망인과 할머니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세례는 그가 삼촌인 요셉 1세의 딸들보다 왕위계승 서열에서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미 세상을 떠난 요셉 1세의 미망인과 할머니의 앞에서 인정받도록 한 것이다. 하기야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적자이므로 그런 사람의 딸이 다음 태어나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샤를를 6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다음번에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들이 아니고 딸인 것에 대하여 무척 섭섭해 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태어나는 순간, 다음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인 요셉 1세의 큰딸 마리아 요제파를 대신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것은 1713년의 국사조치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가 마리아 요제파보다 왕위 계승의 우선 순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1713년의 국사조치를 인정한 국가들은 영국, 프랑스, 작소니-폴란드, 유나이티드 프로빈시스(United Provinces: Republic of the Seven United Netherlands: 더치 공화국), 스페인, 베니스, 교회 국가들(States of the Church: Papal State(s): 이탈리아 북부지방의 국가연합), 프러시아, 러시아, 덴마크, 사보이-사르디니아, 바바리아,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의회였다. 하지만 프랑스, 스페인, 작소니-폴란드, 바바리아, 프러시아는 약속을 어기고 나중에 이 국가조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난 다음 해에 또 딸이 태어났다. 마리아 안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후에 또 아이가 태어났다. 역시 딸이었다. 마리아 아말리아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족 그림을 보면 마리아 테레지아가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무척 닮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어린 시절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귀엽고 예쁘게 생긴 소녀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파란 눈에 약간 빨간색이 도는 갈색 머리칼을 가졌으며 입이 컸다고 한다. 전반적으로는 체격이 튼튼한 소녀였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격은 신중하고 침착한 것이었다. 노래와 활쏘기를 좋아했다. 아버지인 샤를르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말을 타는 것을 절대로 금지하였다. 만일 말을 타고 달리다가 떨어져서 죽으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나중에 헝가리 여왕의 대관식을 위해 말타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족들은 오페라를 즐겨했다. 간혹 직접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 샤를르 6세는 오페라를 공연할 때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면 마리아 테레지아와 동생도 무대에 올라가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교육은 예수회가 맡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라틴어를 능숙하게 했다고 말했다. 예수회의 교육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카롤리네 폰 푹스-몰라르트(Karoline von Fuchs-Mollard) 백작부인과 특별히 친밀하게 지냈다. 마치 자매처럼 지냈다. 푹스 부인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녀였다. 푹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를 제국영묘(카이저그루프트)에 안치하도록 했다. 사람들이 카이저그루프트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람들만이 안치될수 있다고 말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푹스 백작부인은 나와 자매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하여 카이저그루프트에 안치될수 있도록 했다. 푹스 부인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궁정 에티켓을 가르쳤다. 그러나 푹스 부인은 마치 여제의 배우자처럼 모든 교양과 학문을 마스터했다. 예를 들면 그림, 댄싱, 음악 등이었다. 샤를르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14세 때부터 제국 각료회의에 참석토록 했다. 일종의 군왕수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르 6세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아들을 가질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왕위 계승자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Image Detail

카롤리네 폰 푹스-몰라르트 백작부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진정한 반려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