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결혼, 그리고 그 이후

정준극 2012. 6. 7. 19:39

결혼, 그리고 그 이후

 

프란시스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문제는 유럽의 왕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어린시절부터 거론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처음에 로레인의 레오폴드 클레멘트와 약혼하였다. 샤를르 6세는 강대국의 왕자에게 딸을 시집보내면 그 나라의 영향력이 커질수 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작은 공국의 왕자를 염두에 두었고 그래서 후보자고 지정된 사람이 로레인(Lorraine: Lothringen)이라는 작은 공국의 레오폴도 클레멘트 왕자였다. 레오폴드 클레멘트는 데릴 사위로서 비엔나에 와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궁전에 머물면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약혼식을 올리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약혼식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갸를르 6세는 도 아니면 모 라는 심정으로 레오폴드 클레멘트의 동생인 프란시스 스테픈 왕자를 마리아 테레지아의 배우자로 점지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강대국과 결혼을 성사시켜서 단단한 동맹국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다른 가능성을 찾아 보았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왕자가 먼저 거론되었다. 조그만 공국인 로레인보다는 대국인 프러시아와 정책적으로 결혼을 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왕자는 개신교의 칼빈파였으므로 골수 로마 가톨릭인 합스부르크로서는 종교적으로 맞지 않았다. 샤를르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스페인의 카를로스와 약혼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인 마리아 안나는 스페인의 카를로스와 결혼하는 것으로 추진하였다. 합스부르크와 스페인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보다 더 믿을만한 혼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소식을 접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이구동성으로 만일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이 결합하여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게 된다면 유럽의 힘의 균형이 파괴된다고 주장하고 그같은 결혼 정책을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비록 어린 소녀에 불과했지만 무얼 안다고 그럭저럭 멋지게 생긴 프란시스 스테픈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열국들이 마리아 테레지아와 스페인의 카를로스와의 결혼을 반대하자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샤를르 6세도 어찌할수 없이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시스 스테픈의 약혼을 추진하지 않을수 없었다.

 

프란시스 스테픈(프란츠 슈테판)

                         

비엔나에 온 프란시스 스테픈은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지내면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지냈다. 그러기를 거의 5년동안 하다가 1729년에 아버지가 로레인 공국의 국왕이 되는 바람에 대관식을 위해 로레인으로 돌아갔다. 프란시스 스테픈은 비엔나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린 것은 아니었다. 로레인으로 돌아간 프란시스 스테픈도 편하게만 지내지는 못했다.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프란시스 스테픈에게 로레인의 왕관을 폴란드 왕으로 추방된 자기의 장인인 스타니슬라브 레츠친스키에게 되돌려 주라고 요구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무력사용도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더구나 프란시스 스테픈은 메디치 가문의 자인 가스토네(Gian Gastone) 대공이 무자식으로 세상을 떠나자 투스카니 공국을 상속받기로 되어 있었다. 약간의 위기의식을 느낀 프란시스 스테픈은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 6세 황제가 살아 있을 때 그의 후계자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얼른 결혼하여 든든한 빽을 가지고자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1736년 1월 31일에 약혼식을 거행하고 보름 후인 1736년 2월 12일에 날씨는 비록 추웠지만 비엔나의 아우구스틴 교회에 난로를 켜 놓고 역사적인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는 19세였고 프란시스 스테픈은 28세의 둔둔한 청년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시스 스테픈이 결혼식을 올린 비엔나의 아우구스티너키르헤(아우구스틴 교회)

                         

마리아 테레지아는 로레인 공국의 프란시스 스테픈과 결혼했기 때문에 일단은 로레인 공작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려졌다. 로레인 공작부인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인 프란시스 스테픈을 끔찍이도 아끼고 집착했다. 다시 말하여 자기 소유로 만들고 꼼짝 못하게 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란시스 스테픈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구구절절이 어서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반면에 프란시스 스테픈의 답장은 형식적인 안부 정도였다. 결혼 후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의 외도에 대하여 무척 질투가 많았다. 특히 아우슈페르트 공주인 마리아 빌헬미나라는 여인과의 스캔들은 세상이 다 아는 것이었다. 마리아 빌헬미나는 프란시스 스테픈보다 30세 연하였다. 마리아 빌헬미나는 프란시스 스테픈의 여러 정부(情婦) 중에서 한 사람이었다.

 

프란시스 스테픈의 정부였던 마리아 빌헬미나 폰 아우어슈페르크 공주

 

결혼 아듬해인 1737년에 메디치의 지안 가스토네 대공이 세상을 떠나자 프란시스 스테픈은 로레인을 양보하고 투스카니 대공국을 승계하였다. 프란시스 스테픈은1738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투스카니로 가서 왕위를 받았다. 이때 세운 개선문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플로렌스 체류는 며칠 가지 못했다. 샤를르 6세가 급히 호출했기 때문이다. 샤를르 6세는 자기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감하고 왕위를 계승할 사람들이 멀리 가서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해 여름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오토만 터키의 전쟁(1735-39)의 결과 상당한 손실을 보았다. 오토만 터키는 오스트리아가 장악하고 있던 세르비아, 봘라키아(Wallachia: 현재의 루마니아 일부), 보스니아를 원위치 시켰다. 이때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를 은근히 미워하여서 오토만 터키편을 들었다. 비엔나 사람들은 너무나 분해서 폭동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들은 프란시스 스테판을 비난하였다. 프랑스의 스파이라는 이유였다. 프란시스 스테픈에 대한 인기는 바닥을 해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