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정준극 2012. 6. 7. 07:01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은 샤를르 6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보헤미아의 여왕이 되는 문제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대한 문제로서 일어난 분쟁이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라고 하니까 '아하, 오스트리아는 작은 나라인데 거기에서 왕위계승 문제로 전쟁이 있었구나. 별로 할 일도 없었던 모양이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1740년부터 1748년까지 무려 9년동안 유럽에 있는 많은 나라들이 전쟁에 참가한 '리틀 세계대전'이라고 볼수 있는 대단한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5년동안 지속되었고(1914-1918) 제2차 세계대전은 7년동안(1939-1945) 일어났던 것을 생각해 보면 9년간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은 실로 세계대전에 버금하는 대단한 전쟁이라고 볼수 있다. 하기야 유럽에서는 30년 전쟁도 있었고 100년 전쟁까지 있었으니 그런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무슨 놈의 전쟁을 거의 10년 동안 하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곧이어 휴전부터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렇제 못하고 질질 끄는 전쟁을 했으니 말이다.

 

File:Friedrich Zweite Alt.jpg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 마리아 테레지아와는 평생 원수지간이었다.

 

각설하고,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은 여러 전쟁이 혼합된 것이다. 그중에서 두 전쟁은 1740년 10월 20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의 헤드인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다른 하나의 전쟁은 엉뚱하게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과는 관련이 없는데 인도와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벌인 전쟁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기간중에 얽히고 설켜서 일어난 것이르모 그 범주에 포함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만 보면 프랑스는 합스부르크의 영토를 분할해야 한다는 바바리아, 작소니, 스페인의 별로 근거도 없는 주장에 실속도 없이 동조한 것이 큰 몫을 차지했다. 프랑스는 특히 바바리아의 선제후인 샤를르 알버트를 지지하였는데 샤를르 알버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합스부르크 사람들만 해 먹는 것이냐? 나도 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가 그런 주장을 지지한 것은 오스트리아와 해묵은 적국이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한쌍의 전쟁은 제1차 실레지안전쟁(1740-42)과 제2차 실레지안전쟁(1744-45)이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가 프랑스와 연합하여 오스트리아의 영토인 실레지아를 급습하여 자치한 전쟁이다. 실레지아는 서쪽으로 독일, 동쪽으로 폴란드, 남쪽으로 체코에 둘러싸인 전략적인 요충지이기도 했다. 세번째 카테고리의 전쟁은 인도와 북미에서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헤게모니 쟁탈 전쟁이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오스트리아령 네덜랜드에서 프랑스군과의 전투

                         

이상의 여러 전쟁을 통틀어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범주에 집어 넣고 있는데 그것은 1740년 12월 16일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가 합스부르크의 노른자위 영토인 실레지아를 침범함으로서 벌어진 것이다. 프러시아의 공격은 4개월 이상이나 끌었다. 그러다가 1741년 4월 몰비츠(Mollwitz)라는 곳에서 프레데릭의 군대가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하고 실레지아는 짓밟았다. 프레데릭의 승리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게 '아니, 합스부르크는 제 땅도 지키지 못한단 말인가?'라는 의구심을 키워준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잘만하면 합스부르크의 땅을 차지할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그리하여 한달도 되지 못하여서 프랑스의 샤를르 루이 오귀스트 푸케(Charles-Louis-Auguste Fouquet)라는 장군이 앞장서서 바바리아 스페인, 그리고 나중에는 작소니와 프러시아까지 끌여들여서 '타도 오스트리아'를 외치게 되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프랑스는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와 견원지간 처럼 지내왔으므로 '지금이 오스트리아를 박살 낼 기회다'라고 생각했다. 사태가 이쯤되자 세상 떠난 부왕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루지 못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다급해딘 판에 영국에게 "만일 프러시아나 프랑스가 유럽에서 헤게모니를 잡게 되면 영국의 상권이 위협을 받으며 더구나 식민지에서의 영토문제도 골치아프게 될 것이므로 이 참에 우리와 손잡고 프러시아와 프랑스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듭시다"라고 하소연하여 손을 잡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실상 일찍이 1689년부터 비롯한 영국과 프랑스의 헤게모니 쟁탈전의 세컨드 라운드라고 볼수 있으며 이같은 두 나라의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끝난 후에도 67년이나 더 계속되어 1815년에나 겨우 마감되었으니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실레지아를 공략하는 프레데릭 대왕의 프러시아군

                

프랑스와 바바리아 연합군의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공격은 미안하지만 지휘계통의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고 서로 잘난체만 하는 바람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뿐만아니라 오스트리아로서 보면 '프랑스 놈들! 오합지졸들 같으니라구! 네놈들도 별거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로서는 프러시아가 골치꺼리였다. 프러시아가 이미 실레지아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러시아에게 실레지아의 점령을 인정해주는 반면에 다른 전쟁에서는 중립을 지키도록 했다. 그러면서 군대를 취합하여 보헤미아까지 들어온 프랑스와 바바리아 연합군을 몰아냈다. 오스트리아군은 어디서 그런 용맹성이 생겼는지는 몰라도 내친 김에 바바리아까지 들어가서 신나게 짓밟았다. 오스트리아의 연합군인 영국, 하노버 공국, 헤세 공국의 군대는 별도로 바바리아의 데팅겐(Dettingen) 전투에서 프랑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743년에는 사보이 왕국이 오스트리아에 합류하였다. 오스트리아와 사보이 연합군은 프랑스를 자기 영토로 밀어넣었다. 그러는 중에 1745년에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버트(샤를르 7세)가 세상을 떠났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못할 것이 없다면서 나섰던 사람이다. 샤를르 알버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3세는 오스트리아의 프란시스 스테픈(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과 화해를 하고 오스트리아군이 바바리아에서 물러난다면 부왕인 샤를르 알버트가 주장했던 사항을 없던 것으로 하겠다고 제안했다. 즉, 다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겠다느니 또는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의 왕이 되겠다느니 하는 주장을 언급하지도 않겠다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되자 오스트리아의 위상은 한껏 높아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은 오스트리아의 이같은 위상제고가 영 못마땅했다. 그리고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를 공략했다. 이것이 두번째 실레지안 전쟁이었다. 제2 실레지안 전쟁은 1745년 12월 드레스덴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서 일단을 막을 내렸다. 오스트리아는 이 조약을 통해 억울하기가 그지 없지만 실레지아를 프러시아에게 양보해야했다.

 

바바리아의 데팅겐 전투에 참가한 영국왕 조지 3세

 

프랑스가 마지막으로 큰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1745년 5월 퐁트노이(Fontenoy) 전투였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침공하고 이어 퐁트노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 연합군을 무차별하게 격퇴하였다. 1746년부터 1748년까지는 전쟁이 그저 그렇게 진행되었다. 심심하면 총이나 몇방 쏘다가 다시 진지에 돌아가서 쉬는 형식이었다. 병사들로서야 죽어라고 싸워보았자 돌아오는 것은 죽음 아니면 부상일 뿐이며 영토니 헤게모니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열심으로 전투를 할 이유가 없었다. 영국에서도 사정이 복잡했다. 왕위 계승자인 젊은 챨스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전투를 접어두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챨스 에드워드로서는 스튜어드 왕조를 수호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1748년 10월에 액스 라 샤플르(Aix-La-Chapelle) 조약이 마련되었다. 프랑스를 주축으로한 측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을 전적으로 용인하였다. 프러시아는 계속 실레지아를 점거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간의 식민지 문제를 둔 분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상이 간단하나마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전쟁의 일말이었다. 액스 라 샤플르는 독일의 아헨(Achen)이다.

 

Image Detail

액스 라 샤플르 조약을 축하하는 영국 테임스강에서의 축제.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는 이때를 위해 작곡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