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칙(國事詔勅)

정준극 2012. 6. 6. 16:14

국사조칙(國事詔勅) - Pragmatic Sanction of Emperor Charles VI in 1713

마리아 테레지아를 여제로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

 

마리아 테페지아의 아버지인 샤를(칼) 6세

 

마리아 테레지아(M.T.)의 풀네임은 마리아 테레지아 봘부르가 아말리아 크리스티나(Maria Theresia Walburga Amalia Christina)이다. 지체가 높은 사람일수록 이름의 길이도 길어지는 모양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유일한 여자 군주(통치자)이다. 그는 또한 저 유명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인물이다. 로레인의 프란츠와 결혼했기 때문에 자손들은 당연히 남편의 성을 따라서 로레인 가문이 되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를 버릴수는 없으므로 합스부르크-로레인 가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되지는 못하였다.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스스로 신성로마여제(Holy Roman Empress)라고 호칭하였다. 남편의 섭정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정치를 관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호칭이 '신성로마여제'가 전부가 아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헤미아, 만투아, 밀라노, 로도메리아 및 갈리치아(Lodomeria and Galicia: 현재의 헝가리에 속한 중세의 공국), 오스트리아령 네덜랜드, 파르마의 군주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인 샤를르 6세가 1740년 10월에 세상을 떠나자 장장 40년에 걸치는 대통치를 시작하였다. 샤를르 6세는 결과적으로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합스부르크의 군주로 만들기 위해 1713년 저 유명한 국서조칙(Progmatic Sanction)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간단히 말해서 아들이 없으면 딸도 황제가 될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후 샤를르 6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럽 여러 나라들이 이 국서조칙을 유효하게 인정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자 샤를르 6세의 생전 중에는 가만히 있던 작소니, 프러시아, 바바리아, 프랑스가 국서조칙을 거부한다고 나섰다. 나아가서 프러시아는 합스부르크의 풍요로운 영토인 실레지아를 침공하였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9년에 걸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까운 실레지아를 프러시아가 가져가도록 할수 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은 불구대천의 원수로 지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훗날 '7년 전쟁'을 통하여 실레지아에 대한 실지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원통하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로레인의 프란시스 스테픈과 결혼하여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프란시스 스테픈은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9년 연상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혼 당시에 19세였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중에서 마리 앙뚜아네트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고 마리아 카롤리나는 나폴리의 왕비가 되었으며 마리아 아말리아는 파르마의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아들 중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2명이나 배출하였으니 요셉 2세와 레오폴드 2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시스 스테픈과 결혼하고서 남편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려 했으나 섭정으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큰 아들인 요셉이 황제가 되자 역시 모든 권력을 넘겨주려 했으나 섭정으로 남아 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의 경우에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처음에는 프란시스 1세의 공식적인 섭정으로, 나중에는 아들인 요셉 2세의 공식적인 섭정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과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자문관들을 활용하여 제국을 다스렸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요셉 2세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승인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들인 요셉 2세와 레오폴드 2세에 비하여 지식수준과 능력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으며 신하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프란시스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제일 오른쪽의 남자가 레오폴드 2세이다. 그림에는 11명만 등장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재정과 교육개혁안을 공포하고 시행하였다. 여기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하우그비츠 백작과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의 도움이 컸다. 외교관과 국립도서관장을 지낸 반 슈티텐(Van Swieten)은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을 후원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를 통하여 상업을 증진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오스트리아의 허약하기 그지 없는 군대를 재정비하였다. 이 모든 것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크게 높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종교에 있어서는 관용적이지 아니했다. 그리하여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출범한 개신교는 용인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의 다른 나라에서는 인기가 많지 않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젊은 통치자로서 두 차례에 걸친 큰 전쟁을 치루었다. 그로 인하여 국가경제에도 영향을 컸지만 합스부르크의 위상이 크게 손상되기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러한 이유가 자기 때문이 아니라 신하들이 잘못해서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기의 잘못으로 그런 난관들이 생겼다고 믿었다.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칙이란 무엇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샤를르 6세는 가족운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왕족들은 일찍 결혼하는 습성이 있어서 샤를르도 23세에 결혼했다. 신부는 17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로서 독일 브룬스비크-볼펜뷔텔 공국의 공주였다. 결혼식은 바르셀로나에서 있었다. 당시 스페인도 합스부르크의 우산 아래에 있었다. 신부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리를 보냈다. 아마 독감이라도 걸렸던 모양이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미인이었다. 설명에 따르면 '섬세한 미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닮으라는 어머니는 닮지 않고 합스부르크의 전통을 닮아서 생긴 것이 아니올시다였으니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오묘한 것이 아니라 할수 없다. 얼마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비엔나로 와서 남편 샤를를 6세와 신혼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몇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샤를르 6세는 초조했다. 그래서 결혼 5년 후인 1713년에 저 유명한 '국사조칙'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샤를르 6세가 1713년 4월 19일에 발표한 '국사조칙'의 내용을 보면 우선 신성로마제국을 주도하고 있는 합스부르크의 왕국들과 영토들은 분할되지 않고 종합적으로 계승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것만 보아서는 공자말씀으로 생각되어 별 문제가 없다. 다음이 문제였다. 분할되지 않은 제국은 자기에게 첫 아들이 태아난다면 당연히 그에게 계승되지만 만일 아들을 얻지 못한다면 큰 딸에게 돌아가며 만일 큰 딸에게 후사가 없게 된다면 이미 세상을 떠난 자기의 형인 요셉 1세의 딸들과 그 후손들에게 계승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결국 딸들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될수 있으며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등의 여왕이 될수 있다는 얘기였다. 신성로마제국에 속하여 있는 제국의 제후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면서 반대를 하였으나 워낙 샤를르 6세 황제가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으냐?'면서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수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샤를르 6세가 '아니, 우리 집 사람이 아직 나이가 젊은데 아들을 낳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좀 기다리면 아들을 낳을 테니 걱정들 하지 말라!'고 말하기 때문에 제후들은 두고 보기로 했던 것이다.

 

드디어 1716년에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 결혼 8년만의 경사였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여서인지 첫 아들 레오폴도 존은 7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다가 다행인지 무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듬해인 1717년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났고 그 다음해인 1718년에는 둘째 딸인 마리아 안나가 태어났다. 일이 그렇게되자 샤를르 6세는 1713년에 발표했던 '국가조칙'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아예 이를 1720년에 공식적으로 공포했다. 샤를르 6세는 '국사조칙'을 공포함에 있어서 신성로마제국에 속하여 있는 모든 왕국과 공국의 서명을 받아 놓았다. 끽 소리도 내지 말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렇게하여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칙은 신성로마제국의 법이 되었으며 합스부르크 왕조와 신성로마제국에 속하여 있는 나라들간의 유대를, 특히 오스트리아-보헤미아와 헝가리에 속한 국가들간의 결속을 다지는 것이 되었다.

 

샤를르 6세가 '국사조칙'을 공식적으로 공포한 이후, 그는 유럽의 주변 국가들로부터도 동의를 얻기 위해 모든 외교적 노력을 다 기울였다. 샤를르 6세의 형 요셉 1세의 두 딸은 각각 작소니와 바바리아의 선제후들에게 시집을 갔으므로 우선 이들 조카사위들로부터 동의를 받아 놓았다. 이어 제국의회의 동의를 받았고 나아가 러시아, 스페인, 영국, 프랑스, 프러시아, 네덜랜드, 덴마크, 사르디니아의 동의를 받아 놓았다. 이로써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칙'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엄중한 것이 되었고 그후 20년 동안 아무런 분쟁도 없이 조용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세상 인심은 조변석개라는 말이 있듯이 샤를르 6세가 1740년에 세상을 떠나자 당장 '국가조칙'인지 무언지는 무효이며 받아들일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칼 알베르트)와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이었다. 결국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는 노릇이지만 자기들도 선제후들이 선출만 해 준다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못 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리하여 프러시아는 합스부르크를 아예 물 먹이고자 합스부르크의 노란자위 땅인 실레지아를 침공하여 점거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쌍두의 독수리인 오스트리아는 실레지아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아울러 밀라노 공국의 일부, 파르마와 피아첸자 공국을 넘겨 주어야 했다. 이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의 나머지 영토를 소유토록 되었으며 남편인 프란시스 스테판을 프란시스 1세로 하여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인정키로 했다. 이상이 샤를르 6세의 국가조칙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대하여는 다음 페이지에 그나마 자세히 설명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