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왕위계승, 그리고 그 이후

정준극 2012. 6. 8. 00:29

왕위계승, 그리고 그 이후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난 아우가르텐 궁전

 

1740년 10월 20일 샤를르 6세가 비엔나의 화보리타 궁전(Palais Favorita: 현재의 아우가르텐)에서 세상을 떠났다. 독이 든 버섯을 먹어서 죽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것은 모른다. 샤를르 6세는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이겐 공자는 샤를르 6세에게 '국서조칙'에 다른 나라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 물질과 시간을 들이지 말고 그 돈으로 군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충고했었다. 사실상 샤를르 6세는 그의 말년을 국서조칙을 합리화하고 다른 나라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결과, 오스트리아의 재정은 피폐해 졌다. 더구나 최근의 터키전쟁과 폴란드 왕위계승 전쟁의 여파로 파산지경이 되었다. 왕실의 재정은 고작 10만 플로린이었다. 그나마도 샤를르 6세의 미망인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가 자기 몫이라고 내 놓으라고 하는 바람에 곤란한 지경이었다. 대제국의 군대는 8만명 정도였다. 문제는 군대의 대부분이 제때에 봉급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군대는 제국에 대하여 헌신하였고 샤를르 이후의 새로운 군주에 대하여도, 즉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도 충성을 서약하였다. 

 

샤를르 6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 헬덴플라츠에 있는 기마상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앞에는 난관만이 가로 놓여 있었다. 그는 국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 시대의 장관들의 무능함에 대하여도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 시대에 구성되어 있던 자문위원회를 십분 활용키로 했다. 그리고 남편 프란시스 스테픈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남편 프란시스 스테픈이 여러 면에서 경험도 많고 유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문위원회와 남편의 조언은 대개 형편없는 것들이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럭저럭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0년을 회고하는 백서(Political Testament)를 내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과인은 돈 한푼도 없었고 신용도 없었고 제대로 된 군대도 없었고 내 자신이 경험도 없었고 지식도 없었다. 그리고 자문이라는 것도 없었다. 자문을 해야 할 사람들은 우선 과인의 눈치를 살피고 과인의 결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자 했다."

 

여왕이 되고나서의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변하였다. 다른 나라들이 호시탐탐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를 넘보고 있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서 '해볼테면 해보아라 가만 두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군주로서의 위상과 위엄을 만방에 내보이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여자는 신성로마제국의 여제가 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는 남편을 황제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남편 프란시스 스테픈은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어떠한 지위도 없었고 영토도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우선 남편 프란시스 스테픈은 보헤미아의 선제후로 만들어서 황제의 선거권을 갖도록 했고 이어 자기와 함께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의 공동 군주로 만들었다. 그렇게 하여 지위도 생기고 영토도 생기게 되었다. 물론 헝가리에서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프랑스 출신의 프란시스 스테픈을 자기들의 국왕으로 삼을수 없다는 반대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헝가리의 귀족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 설득에 1년여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시스 스테픈을 끔찍히 사랑했고 또한 그의 의견을 존중하기도 했지만 그가 직접 국사에 참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떤 국가적인 사안이 있어서 자문위원회가 열려 토론을 하더라도 비록 공동 통치자이지만 남편을 참석토록 하지도 않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왕으로서의 위상 강화를 위해 소속 영토들이 자기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충성을 맹세토록 하는 의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첫 충성맹세 행사는 1740년 11월 22일에 있었다. 니더외스터라이히가 앞장섰다. 퍼레이드를 가져 여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군사 퍼레이드를 좋아하는 것은 이때부터 비롯한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왕이 된 것은 그가 23세 때였다.

 

그라벤에서의 군사퍼레이드. 마리아 테레지아는 가마를 타고 페스트 조일레 옆을 통과하고 있다. 제국의 위엄을 일반국민들에게 보이는데에는 군사퍼레이드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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