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국사조치 이후의 혼돈

정준극 2012. 6. 8. 06:55

국가조치 이후의 혼돈, 그리고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그리고 7년 전쟁(The Seven Year's War)

 

헝가리 여왕으로서 대관식을 갖는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누구인가?'편에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대하여 소개하였지만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한 이해를 증진코자 한다.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칙'(Progmatic Sanction)이라는 것은 만일 자기에게 아들이 없으면 딸이 왕위를 계승토록 한다는 내용이 골자이다. 이에 의하여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보헤미아의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유럽의 내노라하는 군주들이 반대의 기치를 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샤를르 6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있을 때에 내놓은 '국사조칙'을 인정하여 서명까지 했으면서도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고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하자 배가 아파서인지 참지 못하고 과거의 약속을 깨트리고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그증에서도 스페인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Charles Albert) 선제후가 가장 극심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라는 사람이 누군고 하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촌언니의 남편이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할아버지인 레오폴드 1세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다. 큰 아들이 요셉 1세이고 둘째 아들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삼촌인 요셉 1세가 당연히 할아버지 레오폴드 1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나중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보헤미아의 국왕이 되었던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

 

그런데 할아버지인 레오폴드는 유언장을 통해서 샤를르 6세가 만일 아들이 없다면 큰 아들 요셉의 큰 딸이 왕위를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어쩐 일인지는 모르지만 샤를르 6세는 결혼하고 나서 8년 동안이란 세월 동안 아들은 커녕 딸도 두지 못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형인 요셉 1세의 큰 딸인 마리아 아말리아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나온 것이 '국사조칙'이었다. 앞으로 아들이 태어나기는 하겠지만 만일 아들이 없으면 형의 딸이 아니라 자기의 딸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내용이다. 샤를르 6세는 이 '국사조칙'을 온 동리에 돌려서 대부분 군주들의 서명까지 받아 확실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차에 하늘이 도왔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샤를르 6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레오폴드 존(Leopold Joh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여서인지 이 아들은 태어난지 7개월 후에 돌잔치도 얻어 먹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자연히 '국사조칙'에 따라서 두번째로 태어난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이어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일부 군주들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는 자기 부인인 마리아 아말리아가 오스트리아-보헤미아의 왕위를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찬탈 당했다고 생각하여서 되찾고 싶어 했고 이를 위해 남편 샤를르 알베르가 칼을 뽑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레오폴드 1세의 미망인인 빌헬미네 아말리아의 정신적 지원이 뒤따랐다. 자기 남편인 레오폴드 1세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국사조칙'이니 뭐니를 만들어 유럽을 혼란 속에 빠트린 둘째 아들 샤를르 6세에 대하여 섭섭했기 때문이었다. 일이 그렇게 진행되는 중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국사조칙'의 위상을 한층 높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서 1740년 11월 사르디니아 국왕인 샤를르 에마뉘엘 3세의 인정을 받는데 성공했다. 사르디니아의 샤를르 에마뉘엘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가 재위하는 동안에는 '국사조칙'에 서명하지 않고 버티었던 사람이었다.

 

마스크를 들고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1744년

 

그런데 사태가 이상하게 확장되었다. 1740년 12월에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가 갑자기 실레지아를 공략했던 것이다. 프레데릭 2세라는 사람은 옛날에 마리아 테레지아와 혼담이 있었으나 프러시아가 칼빈파 개신교이기 때문에 없었던 일로 했던 그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그 때 일을 기억하고서 유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프레데릭 2세는 실레지아를 침공하고서는 만일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양보하지 않을 것 같으면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실레지아는 광물자원이 풍부한 곳이어서 합스부르크의 노른자위나 마찬가지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곳을 손도 써보지 못하고 프러시아에게 빼앗긴 다는 것은 바보들이나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러시아와 건곤일척의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의외로 강하게 나가자 프레데릭은 절충안을 내놓았다. 만일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레지아의 일부를 프러시아에게 양도한다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권리를 옹호해 주겠다는 약삭빠른 타협안이었다. 프란시스 스테픈은 그렇게 하자는 쪽이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와 막료들은 그럴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나를 양보하기 시작하면 마치 홍수에 둑이 무너지듯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비엔나에 있는 프러시아 대사가 프레데릭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잘 아시다시피 프랑스에 대하여 말도 못할 증오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에 이익이 된다고 하면 그런 프랑스와도 손을 잡을 사람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폐하(프레데릭)를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폐하의 능력까지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러시아가 실레지아의 일부를 점령한 것을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프러시아와의 전투에서 희생당한 병사들에 대하여 애통함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실레지아를 불법 점거한 프러시아와 건곤일척의 전투가 불가피해진 마리아 테레지아는 누구를 사령관으로 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식으로 오스트리아로서는 이렇다할 장군이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할수 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나이페르크(Neipperg)원수를 석방하고 전선으로 보냈다. 나이페르크 원수는 터키와의 전쟁에서 대실패를 하여 선대왕인 샤를르 6세로부터 중벌을 받아 감옥에 갇혀 있었다. 나이페르트는 1741년 3월에 오스트리아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 달인 4월에 프러시아와의 몰비츠(Mollwitz) 전투에서 그야말로 대패를 당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프러시아, 바바리아, 작소니, 스페인과 나누어 갖는다는 은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이 계획이 실현될수 있도록 벨르 일(Belle-Isle) 원수를 프레데릭 군대와 연합토록 했다. 프랑스가 프러시아와 손잡고 오스트리아를 공략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비엔나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떤 막료들도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배반하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프란시스 스테픈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프러시아와 화해를 하라고 종용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지못해서 협상을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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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년의 몰비츠 전투

 

그런데 참으로 예상 밖으로 헝가리가 마리아 테레지아를 돕겠다고 나섰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하는 대관식은 프러시아와 전쟁 중인 1741년 6월 25일에 프레스부르크(현재의 브라티슬라바)의 성마르틴대성당(St Martin Cathedral)에서 거행되었다. 이 대관식을 위해 마리아 테레지아가 승마연습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그러한 차에 프러시아와의 타협은 물거품이 되었다. 왜냐하면 중립을 지킨다고 생각되었던 작소니가 프러시아 편에 서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적이 되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 편이라고 믿었던 브룬스비크 뤼네브루크(Brunswick-Luneburg)가 중립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헝가리의 도움이 절실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헝가리 귀족들의 협조를 얻어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해 9월에 다시 프레스부르크를 방문했다. 사실 프레스부르크는 비엔나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기 때문에 마차로 몇 시간이며 갈수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프레스부르크 방문 목적은 헝가리 의회로부터 프란시스 스테픈을 헝가리의 공동 통치자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연극적인 효과를 보기 위해 큰 아들 요셉을 데리고 의회에 참석하여 헝가리 귀족들로부터 일종의 동정심을 받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헝가리 귀족들의 요구사항들을 가능하면 모두 들어주었다. 헝가리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해 프러시아와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헝가리여왕 대관식이 열린 브라티슬라바(당시는 프레스부르크)의 성마르틴대성당 내부

 

그러는 중에 참으로 별난 일이 발생했다. 보헤미아 주민들이 자기들의 군주로서 마리아 테레지아보다는 바바리라의 샤를르 알베르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겹치는 정사와 임신-출산으로 인하여 심신이 피로한 때에 그런 소식까지 전해져서 매우 낙심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사촌언니(삼촌의 딸)인 바바리아의 왕비 마리아 아말리아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러다가는 선대께서 남겨 주신 합스부르크의 영토가 남아 나지 않을 것이다'라며 제발 바바리아가 보헤미아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막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말에 바바리아의 선제후, 즉 샤를르 알베르는 보헤미아의 프라하를 점거하고는 이제부터는 자기가 보헤미아의 왕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헝가리에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를 잃은데 대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까워했다. 이듬해인 1742년 1월 24일 샤를르 6세의 서거 이후 그때까지도 정식으로 선출이 되지 않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샤를르 알베르가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선거 과정이 혼란 속에 진행된 것을 이유로 삼아서 군대를 정비하여 샤를르 알베르가 황제로 선출된 바로 그날 바바리아로 진격하여 뮌헨을 점령하였다. 뮌헨은 샤를르 알베르의 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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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프란시스 스테픈)

 

1742년 6월, 브레슬라우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간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역을 기틀로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를 실지회복하였다. 보헤미아에 있던 프랑스 군대는 소리도 없이 물러났다. 이듬해인 1743년 5월 12일, 마리아 테레지아는 성비투스대성당에서 보헤미아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전열을 가다듬고 라인 전선 쪽으로 진격해 오는 것을 걱정했다. 프러시아는 공격이 최대의 방어라고 생각하여 1744년 8월에 군대를 이끌고 프라하로 가서 프라하를 포위하였다. 프랑스는 말썽 많던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가 1745년 1월에 세상을 떠나자 동맹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해 5월에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랜드를 공략하여 초토화시켰다. 한치 앞을 내다 볼수 없었던 것이 당시 유럽의 정세였다.

 

1745년 9월 13일 마침내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시스 스테픈이 프란시스 1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선출되었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제 합스부르크-로레인 가문으로 이어가게 되었다. 프러시아는 앞으로의 더 큰 야망을 가지고 프란시스 1세의 황제 선출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5년 12월의 '브레슬라우 조약'에 의해 실레지아를 프러시아에 양도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지만 프러시아는 마리아 테레지아 치하에서 더 이상 운신을 하지 못하였다. 합스부르크 왕위계승 전쟁은 그 후에도 이탈리아 북부와 오스트리아령 네덜랜드에서 3년을 더 질질 끌었지만 별다른 득실들은 없었다. 8년간의 전쟁을 마무리한 액스 라 샤플레(Aix-La-Chapelle: 독일의 아헨)조약은 결론적으로 프러시아가 실레지아를 차지한다는 것을 재확인하였으며 아울러 마리아 테레지아는 파르마 공국을 스페인의 필립에게 이양한다는 내용이었다.

 

[7년 전쟁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에 별도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참고 바람. 그러므로 이 페이지에서는 기억을 되살리는 심정에서 간단 소개코자 함]

 

[7년 전쟁](The Seven Year's War)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이 1756년 8월에 작소니를 침공하므로서 '7년 전쟁'(1756-1763)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유럽에서는 물론, 북아메리카, 중앙 아메리카, 서아프리카, 인도, 필립핀에 이르기까지 확산된 전쟁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러시아가 작소니를 침공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실지(失地)인 실레지아를 회복고자 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 영국은 프러시아와 손을 잡았다. 포르투갈도 프러시아 편에 섰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는 바람에 많은 군비를 충당해야 해서 결국 국내적으로 재정의 핍박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신대륙에 조성한 뉴 프랑스(New France)를 제대로 지켜내지도 못했다. 영국은 그런 프랑스의 약세를 보고 1758년에 현재는 캐나다에 속한 노바스코샤의 프랑스 요새인 루이부르(Louisbourg)를 점거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막시밀리안 폰 브라운(Maximilian von Browne)이라는 사람이 지휘했다. 폰 브라운 장군은 프러시아와의 첫번째 대접전인 1756년 10월의 로보지츠(Lobositz)전투에서 머뭇거리다가 대패를 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런 폰 브라운을 집에 가서 쉬라고 하고 대신 로레인의 샤를르 알렉산더 공자를 사령관으로 삼았다. 프란시스 스테픈의 동생이며 마리아 테레지아로 보면 서방님이었다. 그는 형인 프란시스 스테픈이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기 위해 비엔나에 오자 함께 와서 그때부터 오스트리아에 봉사하기 시작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런 그가 참으로 믿을만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여서 여동생인 마리아 안나와 결혼토록 주선했다. 그리하여 말하자면 겹사돈이 된 것이었다. 1757년 6월, 프레데릭은 군대를 대편성하여 또 다시 공격해 왔다. 로레인의 샤를르 알렉산더 공자가 공격에 온 프러시아군에게 대단한 타격을 주었다. 프레데릭은 군대의 3분의 1을 잃었다. 전투가 막바지에 오르자 프레데릭은 전장에서 도망가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로레인의 샤를르 알렉산더 공자

 

1759년에 헤이그에서 평화협상이 진행되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는 때에 러시아의 엘리자베스(1709-1762) 여제가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는 1741년부터 제정 러이사의 여제였다. 생페터스부르크의 유명한 겨울궁전은 그가 지은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제의 뒤를 이어 표트르 3세(페터 3세: 1728-1762)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을 대단히 존경하였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프랑스-러시아의 동맹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프랑스군도 그동안 손실이 많아서 지지부진하던 터였다. 프러시아는 작소니를 점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일거에 몰아냈으며 헤쎄-카셀에서 프랑스군을 쫓아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프레데릭이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본토를 공격할것 같아서 걱정이 태산 같게 되었다. 후버르투스부르크와 파리에서 각각 평화협상이 진행되었다. 오스트리아도 그렇지만 프랑스도 힘든 조건들을 들어주어야 했다. 프랑스는 미국에 있는 대부분 식민지에서 철수해야 했다. 오스트리아는 모든 것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려 놓기로 했다. 이를 status quo ante bellum(the state in which things were before the war)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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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이사의 엘리자베스 여제. 그의 서거는 7년 전쟁이 스테이터스 쿠오 안테 벨룸(Status quo ante bellum)으로 돌아가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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