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베치르크 점검

비엔나 구의 변천사

정준극 2012. 8. 24. 21:51

비엔나 구의 변천사

 

반복되는 이야기여서 미안하지만, 비엔나는 23개 구(Bezirk)로 구성되어 있다. 1구 인네레 슈타트(Innere Stadt)로부터 23구 리징(Liesing)까지이다. 구청은 마기스트라티셰스 베치르크스암트(Magistratisches Bezirksamt) 라고 하지만 간단히 베치르크스암트라고 부른다. 시장은 뷔르거마이스터(Bürgermeister)라고 하며 구청장은 베치르크스하우프트만(Landeshauptmann)이라고 부른다. 비엔나에서는 시장이 모든 행정업무를 관장하지만 경찰만은 예외이다. 비엔나 경찰서장은 내무장관에게 직접 보고한다. 일찍이 1919년에 비엔나를 비롯한 각 주에서 주민들이 주의회 의원들을 선출하고 이들 의회의원들이 주지사를 선출하는 계획이 세워졌으나 사정상 실천되지 못하였다. 만일 이 제도가 실시되었다면 비엔나를 포함한 오스트리아는 시도 때도 없이 선거에만 시간을 빼앗길뻔했다.

 

국회의사당인 팔라멘트의 밤

                        

1구 인네레 슈타트는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비엔나의 심장이다.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지역이다. 인네레 슈타트는 원래 외적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중세의 요새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실상 협소한 지역이었다.  처음에는 슈테판스돔(성스데반대성당)도 비엔나 성곽의 외부에 있을 정도였으니 시내 센터가 그다지 크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인네레 슈타트에는 건물들이 숨쉴틈도 없이 들어차고 아울러 사람들이 몰려들어와서 살게되어 그야말로 포화상태가 되었다. 특히 바벤버그 왕조에 이어 합스부르크 왕조가 시내 한복판에 호프부르크를 짓고 거주하게 되자 귀족 등등도 왕궁 주변에 집을 짓고 몰려서 살기 시작했으니 이야말로 비엔나의 포화상태에 불을 붙인 격이었다. 이와 함께 성벽 밖의 마을들도 점차 번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성벽 안의 생활과 성벽 밖의 생활에 별다른 구별이 없게 되었다. 결국 1850년, 비엔나시는 프란츠 요셉 황제의 허락을 받아서 인네레 슈타트의 주변, 즉 비엔나 성벽 밖에 있는 34개 마을을 비엔나의 경계선 안으로 맞아 들였다. 이들 마을들을 포아슈태테(Vorstädte)라고 불렀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구시가지의 경계선을 이루는 성벽과 요새가 필요없게 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1857년에 오리지널 비엔나 성벽을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를 따라 거대한 링슈트라쎄를 조성하였다. 이렇듯 비엔나를 확장하다보니 전에는 인네레 슈타트의 성벽 밖에 있었던 슈테판스돔이 새로운 비엔나의 센터로서 우뚝 서게 되었다. 아무튼 대단한 역사(役事)였다. 이런 광대한 토목공사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결국 제국 정부는 비엔나시개혁자금(Wiener Stadterreneuerungsfonds)을 조성하였다. 자금은 주로 개인 투자자들에게 링슈트라쎄에 조성된 건축부지를 매각하여 마련했다. 그리하여 개인부호들은 링슈트라쎄에 조성된 건축부지를 사서 시내궁전(Palais)들을 건설하였다. 팔레(Palais)라고 이름붙은 건물들은 거의 모두 그런 사연으로 완성되었다. 아무튼 그리하여 링슈트라쎄의 틀이 잡혔다.

 

1900년대 초반, 링슈트라쎄의 슈타츠오퍼 앞길.

                                  

1850년부터 1890년에 이르기까지 비엔나에는 서남쪽으로 새로운 성벽이 조성되었다. 넓어진 비엔나를 외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새로운 성벽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를 리니엔발(Linienwall)이라고 불렀다. 선처럼 연결된 성벽이란 의미이다. 리니엔발을 따라서 그 바깥 쪽에 새로운 길이 생겼다. 1873년부터 생긴 귀어텔이었다. 귀어텔이란 말은 잘 아는대로 허리띠(벨트)라는 뜻이다. 귀어텔의 바깥 쪽에도 마을들이 생기고 거리가 조성되었다. 이런 지역들을 포아오르테(Vororte)라고 불렀다. 교외라는 의미이다. 포아오르테를 기존의 비엔나에 포함시킬 필요가 생겼다. 1892년 1월 1일을 기하여 포아오르테에 속한 33개 교외 마을들이 비엔나에 통합되었다. 오늘날의 11구 짐머링으로부터 19구 되블링까지이다. 10구 화보리텐은 이미 1874년에 비엔나에 합류되어서 해당되지 않았다. 리니엔발 외부의 마을들, 즉 포아오르테가 비엔나에 포함되자 리니엔발의 존재가 의미가 없게 되었다. 리니엔발은 1894년부터 철거되기시작했다. 이와 함께 귀어텔이 확장되었다. 오늘날의 귀어텔은 그렇게 해서 조성되었다. 1900년에는 2구 레오폴드슈타트가 하도 크기 때문에 분할하여 상당 부분을 따로 떼어 20구 브리기테나우로서 독립시켰다.

 

비엔나는 도나우의 동남쪽으로 더욱 확장되어가고 있다.

                             

1850년부터 1904년까지 비엔나는 도나우 우안으로만 확장되었다. 더구나 1868-1875년간 도나우의 흐름을 조정하는 대공사가 완성되어 새로운 도나우가 생기자 이와 관련하여 도나우 우안에 마을들이 적극 조성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알테 도나우와 카그란 지역이다. 1904년에 플로리드스도르프, 카그란, 슈타들라우, 히르슈슈테텐, 아슈페른 및 도나우의 좌안에 있는 일부 마을까지 통합하여 21구 플로리드스도르프를 만들었다. 1910년에는 슈트레버스도르프(Strebersdorf)도 플로리드스도르프에 합류되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1938년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치는 그해 3월에 비엔나를 접수하자 말자 얼마 후인 10월 15일에 비엔나를 26개 구로 나누고 거리의 이름도 마음 내키는대로 고쳤으며(특히 유태인과 관련된 거리이름은 모두 고쳤음) 이어 비엔나 외곽의 97개 마을들을 합쳐서 이른바 대비엔나(Great Vienna)를 창설하였다. 이때 대비엔나로 흡수된 97개의 마을 중에서 80개는 전쟁이 끝난지 한참 후인 1954년에 니더외스터라이히주로 이관되었다. 비엔나가 현재의 23개 구로 정리된 것은 바로 이 당시였다. 산업지대는 대부분 비엔나의 남부와 동부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영세중립국을 표방한 오스트리아는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슬로간을 내걸고 유엔기구들을 유치하였다. 그 유엔기구의 청사들이 들어선 구역도 도나우 건너편이었다. 1구 인네레 슈타트는 도나우의 주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나 도나우 운하가 만들어져서 그나마 도심에서도 도나우의 분위기를 느낄수 있게 되었다. 도나우 건너편의 21-23구는 비엔나의 새로운 파트이다.

 

새로 조성된 도나우의 가운데에는 도나우인젤(섬)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