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신동 모차르트

프라하,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베를린 여행

정준극 2012. 10. 21. 06:26

프라하,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베를린 여행

 

모차르트는 어릴 때에 주로 타의에 의해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1789년 봄에 비엔나의 북쪽으로 이어져 있는 프라하,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베를린을 여행한 것이 아마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가진 가장 긴 여행이었을 것이다.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남들처럼 낭만적이고 여유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차르트는 그 즈음에 생활이 무척 곤궁하였다. 그러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일꺼리를 찾아 나선 여행이었다. 모차르트가 여행을 다녔으면 다녔지 무얼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모차르트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여행이 그냥 간과할수 없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므로 차제에 소개코자 하는 것이다. 최종 목적지는 베를린이었다. 베를린에는 모차르트에게 작품을 의뢰할 것 같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있었다. 만일 일이 제대로만 풀린다면 모차르트는 상당한 사례금을 받고 작곡을 의뢰받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당장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엔나의 마리아 테레지엔 플라츠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기념상 하단에 있는 조각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의 모습이다. 가운데의 어린 소년이 모차르트이다. 앞에 있는 사람은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이다.

 

모차르트가 베를린 여행을 감행한 1789년이라고 하면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2년전이다. 그 즈음에 모차르트는 연주로서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고 있었다. 1789년이라고 하면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여 유럽이 흉흉하던 때였다. 모차르트는 오페라를 작곡하여 사례금을 받는 것도 별로 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모차르트는 당장 생활비가 부족해서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며 지내야 했다. 예를 들면 미하엘 푸흐버그(Michael Puchberg)로부터 돈을 빌려 썼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미하엘 푸흐버그가 어떤 사람이며 모차르트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하여는 별도로 설명코자 한다. 다시 모차르트의 베를린 여행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우선, 모차르트의 베를린 여행은 칼 리히노브스키(Karl Lichnowsky) 공자의 후의로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났기 때문에 여비가 한푼도 들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칼 리히노브스키 공자는 프리메이슨 회원이기 때문에 평소에 모차르트와 친분이 있었다. 그런데 리히노브스키 공자가 마침 베를린에 업무차 가는 일이 있어서 모차르트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에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는 일이 있더라도 지체 높은 리히노브스키 공자로서 모차르트에게 자기가 먹은 밥값은 자기가 내야한다고 주장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에 모차르트로서는 눈치야 보이지만 공짜 여행을 즐길수

있는 기회였다.

 

모차르트와 함께 1789년에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여행했던 칼 리흐노브스키 공자

 

모차르트와 리히노브스키는 1789년 4월 8일 아침 일찍 비엔나를 떠났다. 당시에 비엔나에서 베를린까지 가는 여행은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는 장기여행이었다. 이들은 이틀후인 4월 10일에 프라하에 도착했다. 모차르트가 프라하에 도착하여 부인 콘스탄체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모차르트는 마침 베를린에서 온 오보주자인 프리드리히 람(Friedrich Ramm)이라는 사람을 프라하에서 만났는데 프러시아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베를린에서 모차르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모차르트는 이번 여행이 상당히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여 기분이 좋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이탈리아오페라단장인 도메니코 과르다소니라는 사람을 만나 새로운 오페라 작곡을 합의하였으며 작곡료는 250 두카트(약 1천 플로린스)를 받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250 두카트라고 하면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할 때에 약 4천만원이 되는 거금이었다.

 

모차르트의 생애 마지막 초상화를 스케치한 도라 슈토크

 

다음 기착지는 드레스덴이었다. 4월 12일에 도착했다고 되어 있다. 일행은 폴로뉴 호텔(Hotel de Pologne)에 투숙했다. 다음날 이 호텔은 모차르트의 연주회장이 되었다. 오르가니스트 안톤 타이버와 첼리스트 안톤 크라프트와 함께 현악3중주곡 K563번을 연주했다. 이와 함께 모차르트의 반주로 소프라노 요제파파 두셰크(Josepha Duschek)의 독창도 있었다. 프라하의 요제파 두셰크는 드레스덴까지 모차르트와 함께 여행을 왔다. 그만큼 절친한 사이였다. 요제파 두셰크에 대하여는 이미 본 블로그에서 별도로 소개한바 있으니 참고 바란다. 아무튼 소프라노 요제파 두셰크는 폴로뉴 호텔에서의 '모차르트 초청 특별 연주회'에서 '피가로의 결혼'과 '돈 조반니'의 소프라노 아리아들을 불러 박수를 받았다. 다음날은 또 다른 음악회를 가졌다. 작소니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와 영부인인 아말리에를 모시고 연주회를 가진 것이다. 첼리스트 안톤 크라프트의 아홉살 난 아들인 니콜라우스 크라프트가 언제 배웠는지 모르지만 첼로 솜씨가 훌륭하여서 함께 등장하여 연주했다. 물론 요제파 두셰크도 출연하여 노래를 불렀다. 모차르트는 새로 작곡한 '대관식 협주곡'(Coronation Concerto: K 537)을 연주했다. 연주회가 끝난후 모차르트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선제후로부터 황공하옵게도 코로 들여마시는 담배상장에 담은 100 두카의 사례금을 받았다. 다다음 날인 4월 15일에 모차르트는 러시아 대사인 알렉산더 벨로브셀스키 베롤세르키와 점심을 함께 했다. 점심 후에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보여주는 여흥이 있었다. 모차르트는 처음에는 오르간을, 그 다음에는 피아노를 연주하여 오찬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다음날인 4월 16일쯤헤서 모차르트는 의회의원인 크리스티안 고트프리트 쾨르너라는 사람을 만났다. 프리드리히 쉴러와는 오랜 친구사이인 사람이었다. 쾨르너의 처제인 도라 슈토크(Dora Stock)라는 여인은 재능이 많은 화가였다. 그래서 모차르트를 만난 김에 초상화를 그렸다. 비록 완성하지 못하고 스케치한 것이지만 이 초상화가 아마도 모차르트의 생전의 모습을 그린 마지막 작품일 것이다.  

 

도라 슈토크가 스케치한 1789년의 모차르트. 드레스덴에서. 생전의 모차르트의 모습을 그린 마지막 작품일 것이다.

 

4월 18일에 리히노부스크와 모차르트는 라이프치히로 떠났다. 이틀 후에 도착했다. 오늘날 같으면 자동차로 두시간 남짓 걸린 거리였지만 당시에는 이틀이나 걸리는 장거리였다. 모차르트는 라이프치히에서 3일을 보냈다. 모차르트는 수십년 전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봉사하였던 토마스교회(Thomaskirche)를 방문하였다. 모차르트는 비엔나에서 후원자인 고트프리드 반 슈비텐의 영향을 받아 바흐에 대하여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바흐가 연주했던 토마스교회의 오르간을 즉흥적으로 연주하였다. 이때 마침 토마스학교 합창단이 바흐의 모테트인 Singet dem Herrn ein neues Lied(새 노래로 주께 찬양하라: BWV 225)를 연주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이 곡의 악보를 찬찬히 검토할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바흐가 활동했던 라이프치히의 토마스키르헤

 

4월 23일에 모차르트는 라이프치히를 떠나 포츠담으로 향하였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모차르트는 이틀 후에 포츠담에 도착했다. 모차르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크게 환영할 줄 알았다. 모차르트는 그런 기대감을 콘스탄체에게 보낸 편지에서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상황은 그렇지 못하였고 모차르트는 크게 실망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모차르트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국왕을 알현코자 신청한 쪽지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비엔나에서 온 지휘자(카펠마이스터)라고 하는 모차르트라는 사람이 리흐노브스키 공자와 함께 폐하를 알현코자 원하였나이다. 이 사람은 자기의 재능을 폐하의 발 아래 엎드려 보이고자 원하였나이다. 이 사람은 폐하께서 만나 주실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은 이 메모지를 보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렇다면 왕실악단장인 장 피엘 뒤포르(Jean-Pierre Duport)를 만나보라고 메모지에 휘갈겨 썼다. 말하자면 만나볼 필요조차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음악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뒤포르라는 사람과 별로 기분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모차르트는 뒤포르가 작곡한 미뉴엣을 유치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또는 뒤포르에게 잘 보이려고 그랬는지 아홉곡의 피아노 변주곡으로 만든 일이 있다. K573 이다. 모차르트의 본심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뒤포르는 모차르트의 행동을 건방지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뒤포르인지라 모차르트가 굳이 만나서 부탁해야할 입장은 아니었다. 결국 모차르트는 왕실의 어느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설수 밖에 없었다.

 

포츠담의 산쿠씨 궁전

 

5월 8일에 모차르트는 잠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왔다. 그리고 5월 12일에 게봔트하우스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모차르트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연주회였다. 피아노 협주곡 K456과 K 503이 프로그램에 올랐다. 두곡의 소프라노 아리아(K 505, K 528)도 들어 있었다. 소프라노는 프라하에서 온 요제파 두셰크였다. 여기에 피아노 솔로를 위한 판타지(K 475)와 어떤 작품인지는 모르지만 교향곡도 한곡 들어 있었다. 교향곡 연주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처음에 두개의 악장을 연주하고 쉬었다가 중간 휴게시간 전에 나머지 두개의 악장을 마저 연주하였다. 이 연주회는 광고할 시간이 없어서 참석자들도 적었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주회는 더할수 없이 훌륭하였지만 소득은 빈약했다'라고 적었다.

 

모차르트가 1789년에 연주회를 가졌던 라이프치히 게봔트하우스(사진은 1884년의 모습). 현재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모차르트와 함께 줄곧 여행을 했던 리흐노브스키 공자는 5월 중순쯤해서 라이프치히를 떠났다. 따라서 그 후로 모차르트의 여행경비는 모차르트가 부담해야 했다. 모차르트는 여행을 하면서 리흐노부스키 공자로부터 돈을 빌렸다. 기록상으로는 1,415 플로린이라고 되어 있다. 리흐노브스키 공자는 빌려준 돈을 받아내기 위해 나중에 비엔나에 와서 소송을 걸었고 결국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두달전인 1791년 10월에 다 받아냈다. 모차르트는 5월 17일까지 라이프치히에 머물렀다. 요한 레오폴드 노이만과 그 부인, 요제파 두셰크 등이 그때까지도 라이프치히에 머물고 있으므로 이들과 이럭저럭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아서 머물러 있었다. 모차르트는 다시 베를린으로 떠나서 5월 19일에 도착하였다. 두번째 베를린 방문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국왕과 왕비의 앞에서 연주를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국왕은 모차르트에게 여섯 곡의 현악4중주를 의뢰하고 프리데리케 공주를 위해 쉬운 피아노 소나타도 여섯 곡을 의뢰했다. 그리고 약 800 플로린스를 하사하였다.

 

모차르트가 베를린에 도착한 날 저녁에는 마침 '후궁에서의 도주'가 공연되었다. 모차르트는 이 사실을 알고 극장을 찾아갔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한참후인 1856년에 발간된 비망록에 따르면 그날 저녁에 나중에 독일의 위대한 시인이 된 루드비히 티크(Ludwig Tieck: 1773-1853)가 '후궁에서의 도주'를 구경하기 위해 극장에 일찍 갔다가 모차르트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티크는 어떤 젊은 사람이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고 누군지 궁금하게 생각하여 그를 찾아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티크에게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자주 구경 오십니까? 참 좋은 일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얼마후에 무대에서 누군가가 '모차르트씨, 어서 이리 오세요'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궁금하게 생각했던 젊은 사람이 다름아닌 모차르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5월 28일에 베를린을 떠나 드레스덴과 프라하를 거쳐 6월 4일에 마침내 비엔나에 돌아왔다. 이로써 모차르트는 4월 8일에 비엔나를 떠나서 거의 두달동안 여행을 하다가 비엔나에 돌아온 것이다.

 

오페라 '후궁에서의 도주' 무대. 모차르트가 베를린을 방문한 날 밤에 어느 극장에서 공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