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신동 모차르트

미하엘 푸흐버그는 누구인가?

정준극 2012. 10. 22. 05:41

미하엘 푸흐버그는 누구인가?

 

모차르트의 길지 않은 생애에 있어서 미하엘 푸흐버그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함은 모차르트 연구가들로서 유의해야할 일이다. 미하엘 푸흐버그는 모차르트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당장 먹고 살 일이 힘드니 돈 좀 빌려달라고 하면 별로 군소리도 없이 잘 빌려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푸흐버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 요한 미하엘 폰 푸흐버그(Johann Michael von Puchberg)는 1741년 니더외스터라이히 지방에서 태어나서 1822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으로  옷감장사로 돈을 번 상인이었다. 그래서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푸흐버그는 모차르트보다 15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그런 그가 어찌하다가 모차르트와 친구사이가 되었으며 모차르트가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면 두말하지 않고 빌려주는 아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푸흐버그는 장사꾼이었다. 모차르트에게 빌려준 돈을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미망인인 콘스탄체를 통해 거의 모두 돌려 받았다. 푸흐버그는 모차르트에게 모두 합해서 1,400 플로린 정도를 빌려 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오늘날의 가치로는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략 추산해보면 약 2천만원 정도가 될 것으로 짐작된다.

 

모차르트가 푸흐버그에게 돈을 꾸어 달라고 하며 보낸 편지

 

모차르트가 생활비가 없어서 곤궁했던 1788년은 터키와의 전쟁이 끝난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래서 모두의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비단 모차르트 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가들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수입도 거의 없는 주제에 상당히 낭비적인 생활을 했다. 결국 돈이 없으니까 친구들에게 손을 벌리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푸흐버그였다. 적게는 30 플로린으로부터 많게는 3백 플로린까지 빌렸다. 모차르트 연구자들에 의하면 모차르트는 푸흐버그로부터 돈을 빌리기 위해 여러 편지를 썼는데 남아 있는 것은 21 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최소한 20번 이상이나 푸흐버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것임을 알수 있다. 모차르트는 푸흐버그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지금까지의 유대관계를 강조하고 감정에 호소하는 내용을 썼다고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저는 지금 저를 형제처럼 여기고 있는 분에게 제 마음을 모두 열고 가장 중요한 문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당신을 친형제처럼 생각하고 제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를 솔직히 말씀 드리고자 하오니 제발 좋은 답변을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당신을 저의 진정한 친구로서 저에게 큰 도움을 주실 분이라고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만일 진정으로 저의 형제와 같다고 생각하신다면 바라옵건대 제가 어려운 순간을 지나갈수 있도록 돈 좀 빌려 주십시오...."이다. 그 다음에 보낸 편지는 보다 절박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시여 바라옵건대 그대께서 나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며 형제라고 한다면 제발 나를 도와주소서. 불행하게도 나의 아내와 아이들이 아파서 누워있으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다가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위대한 모차르트가 자기의 자존심마저 버리고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낸 일도 있다. "한 주일쯤 지나면 사정이 좋아질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돈이 필요합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도와 주십시오. 아주 적은 돈이라도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음악학자인 미하엘 로렌츠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이처럼 푸흐버그를 비롯한 친지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돈을 빌려 쓰면서도 실제 생활은 씀씀이가 커서 감당이 불감당일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렇게 돈을 빌려 쓰면서도 알저그룬트에 월세가 상당히 비싼  큰 아파트를 빌려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차와 말까지 별도로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푸흐버그에게 보낸 편지는 과장된 내용이며 목적은 오로지 돈을 빌리려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겠느냐는 얘기이다.

 

모차르트가 세를 들어 살고 있던 알저그룬트 하우스 지도. 대로변 가운데의 큰 집이다. 돈이 없으면서도 비싼 월세 집에 살았던 것을 알수 있다.

 

모차르트의 경제사정은 1791년에 들어서서 조금 나아졌다. 그래서 일단 푸흐버그의 빚을 갚아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모차르트는 푸흐버그로부터 빌린 돈을 다 갚지는 못하고 그해 12월 초에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빚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 몇년에 걸쳐 부인인 콘스탄체가 갚았다. 콘스탄체는 비즈네스에 상당한 재능이 있어서 모차르트 추모음악회를 개최하거나 유고 출판을 하여 돈을 모을수가 있었다. 푸흐버그는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모차르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돈을 빌려주는 푸흐버그에게 피아노 3중주곡 E장조(K 542: 1788) 또는 현악 3중주곡 E 플랫 장조(K 563: 1788)을 작곡하여 헌정했다고 한다. 푸흐버그는 하이든과도 친구사이였다. 모차르트가 1790년에 '여자는 다 그래'의 리허설을 할 때에 초청한 사람은 두명이었는데 바로 하이든과 푸흐버그였던 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는 일이었다. 1791년 12월에 런던에 있던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서거 소식을 듣자 다른 누구보다도 푸흐버그에게 즉시 편지를 보내어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돔가쎄에 있는 모차르트하우스 비엔나. 이 집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다. 그래서 '피가로하우스'라고도 부른다. 슈테판성당 뒷길에 있는 돔가쎄 5번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