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신동 모차르트

모차르트와 하이든

정준극 2012. 10. 22. 17:30

하이든과 모차르트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요제프 하이든은 친구사이였다. 두 사람은 비록 24세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서로를 존경하였고 특히 서로의 작품을 깊이 찬양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문서로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하이든은 모차르트가 어릴 때에 이미 작곡가로서 유명하였다. '태양' 4중주곡이라고 불리는 하이든의 현악 4중주곡 여섯 곡(작품번호 20: 1772)은 나중에 모차르트의 여섯 현악 4중주곡(K168-173)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이다. 당시 17세의 모차르트는 비엔나를 방문하였을 때 하이든의 현악 4중주를 듣고 감동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 모차르트가 하이든을 만났었다는 기록은 없다. 하이든이 모차르트를 만난 것은 모차르트가 1781년 잘츠부르크를 떠나 비엔나로 옮겨와 살기 시작하고 부터였다. 하이든은 대부분의 시간을 헝가리에 있는 에스터하지 궁전에서 보냈다. 하이든의 고용주이며 후원자인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함께 지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에스터하지 공자는 겨울철에는 주로 아이젠슈타트에 머물렀다. 하이든도 아이젠슈타트에서 함께 지냈다. 이때에 하이든은 비엔나를 잠시잠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모차르트를 만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이젠슈타트는 비엔나로부터 약 40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 하이든이 생애의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1783-84년에 자주 만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이든의 오라토리오인 Il ritorno di Tobia(도빗의 귀환: Die Heimkehr des Tobias)가 비엔나에서 1784년 3월 28일과 30일에 공연되었을 때에 모차르트가 참석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때에도 하이든을 만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에 하이든이 이미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로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반면에 모차르트는 이제 막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던 입장이었다. 모차르트가 비엔나 사회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오페라 '후궁에서의 도주'가 대성공을 거두고 부터였다. 그때 하이든은 52세였고 모차르트는 28세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만남을 연결해준 중심적인 역할은 현악4중주였다. 물론 두 사람이 현악4중주를 함께 작곡했다든지 또는 함께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테너로 유명한 미하엘 켈리(Michael Kelly)가 1826년에 쓴 회고록에 의하면 두 사람이 현악4중주곡을 두고 만났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출신의 작곡가인 스테픈 스토레이스(Stephen Storace: 1762-1796)가 친구들을 초청하여 4중주곡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이때 제1바이올린을 하이든이, 비올라를 모차르트가 연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2바이올린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인 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 남작(Baron Dittersdorf: 1739-1799)이, 첼로는 보헤미아 출신으로 비엔나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 요한 밥티스트 바날(Johann Baptist Vanhal: 1739-1813)이 맡았다. 이 정도의 연주자라면 가히 세계 최상급이 아닐수 없다. 아무튼 이때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함께 연주를 했다면 서로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멜크 출신의 작곡가인 막시밀리안 슈타들러(Maximilian Stadler: 1748-1833)도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함께 참여하는 실내악 연주회에 참석했었다고 말했다. 이때에는 모차르트의 현악4중주곡 K 515, K 516, K 593이 연주되었으며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모두 비올라를 연주했다고 한다.

 

영국 출신의 작곡가인 스테픈 스토레이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서로를 깊이 존경했다. 하이든은 젊은 모차르트에 대하여 하나의 질투심이나 시기심도 없이 솔직하게 찬양하였다. 하이든은 어느때 친구에게 꿈에 모차르트의 작품을 들은 일이 있었다고 고백했었다. 그만큼 모차르트의 작품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작품 중에서도 '피가로의 결혼'을 가장 좋아했다. '피가로의 결혼'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한편,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과도 절친한 사이로 지냈다. 두 사람은 잘츠부르크에서부터 교분을 쌓으며 지냈다고 한다. 그때에도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 예로서 어느날 하이든의 새로운 작품을 연주하는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참가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상당히 독특한 성격이어서 하이든의 작품이 연주되는 중에도 계속 이 부분은 잘못되었고 저 부분도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비난만 늘어 놓으며 자기 같으면 저런 식으로 작곡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는 모차르트도 있었다. 마침내 모차르트는 그 사람의 비난을 견디다 못해 '여보세요.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저렇게 작곡하지 않을 겁니다. 왜그런지 아세요? 어느 누구도 저런 식으로 훌륭하게 작곡할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쏘아주었다고 한다. 이것만 보아도 모차르트가 하이든을 얼마나 존경하는 지를 알수 있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트의 현악4중주곡 중에서 14번 K387(봄: 1782), 15번 K421(1783), 16번 K428(1783), 17번 K458(사냥: 1784), 18번 K464(1785), 19번 K465(불협화음: 1785)는 이른바 '하이든 4중주곡'(1785)이라고 부른다. 모차르트는 이들 하이든 4중주곡들을 하이든과 알고 지내던 초기에 작곡하였다. 이들 작품은 하이든의 작품번호 33번(일명 러시아 4중주곡: 1781)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가 이들 여섯 곡의 4중주곡을 하이든에게 헌정한 것은 당시로서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작품을 주로 귀족이나 왕족들에게 헌정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하이든이 자기에게 헌정된 모차르트의 현악4중주곡들을 처음 들은 것은 1785년 1월 15일이었다. 하이든은 이 작품에 대하여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이때 직접 연주하면서 '나의 친애하는 친구인 하이든과 다른 모든 좋은 친구들에게 이 연주를 바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이든이 두번째로 이들 4중주곡을 들은 것은 약 한달후인 2월 12일이었다. 이번에는 여섯 곡 중에서 마지막 세곡만 연주되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도 참석한 연주회였다. 레오폴드는 비엔나에 있는 아들 모차르트를 만나러 잘츠부르크에서 왔던 터였다. 이때 하이든은 레오폴드에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사람으로서 말씀드리노니 당신의 아드님은 내가 알고 있는 진정으로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당신의 아드님은 음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더구나 중요한 것은 작곡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이 자기 아버지인 레오폴드에게 그렇게 말해 준데 대하여 깊이 감사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레오폴드는 아들 모차르트가 비엔나에 와서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걱정하고 궁금해하고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 모차르트

 

모차르트와 하이든은 모두 프리메이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모차르트가 선배인 하이든을 프리메이슨에 권유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1784년 12월 14일에 프리메이슨의 Zur Wohltätigkeit(자선)이라는 지부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하이든은 같은 해의 며칠 후인 1784년 12월 29일에 Zur wahren Eintracht(진정한 화합)이라는 지부에 가입하였다. 프리메이슨 지부기록에 의하면 모차르트는 Zur wahren Eintract 지부의 모임에 자주 참석했다고 한다. 하이든의 프리메이슨 가입식은 이듬해인 1785년 2월 11일에 거행되었다. 모차르트는 연주회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열렬 멤버였지만 하이든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하이든이 프리메이슨의 멤버로 정식으로 가입하고 나서 지부모임에 정규적으로 참석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다가 2년 후인 1787년에 탈퇴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모차르트보다는 하이든이 프리메이슨으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았다. 예를 들면 파리의 올림피크 지부로부터 상당한 사례비와 함께 작곡을 의뢰받은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저 유명한 하이든의 '파리 교향곡'이다.

 

하이든의 '파리교향곡' 음반 커버. 노트르 담 사원을 표지그림으로 삼았다.

 

하이든이 모차르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790년 12월 그가 런던으로 떠나기 전이다. 하이든의 런던 여행은 에스터하지 공자의 허락을 받긴 했지만 하이든의 친지들은 나이가 나이니만치 런던 여행은 무리가 아니냐면서 만류하였다. 그때 하이든은 이미 60대에 접어든 나이였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에게 '파파'라고 부르면서 '고향을 떠나서 타지에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겁니다. 더구나 말도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라며 만류하였다. 그러자 하이든은 '나의 언어는 세계가 다 이해하는 것이라네'라면서 런던 여행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보내면서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를 하였다. 시인인 잘로몬도 함께 한 자리였다. 모차르트는 '파파, 아마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라며 아쉬워했다. 두 사람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이든은 아마 1년도 지나지 않아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날 것을 짐작이라도 한듯 모차르트와의 작별을 마음 속으로 크게 아쉬워했다. 하이든이 아직도 런던에 있을 때인 1791년 12월 초, 하이든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와도 친구사이인 미하엘 푸흐버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모차르트가 그렇게 빨리 이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다'면서 애석해하였다. 하이든은 또한 콘스탄체에게 편지를 보내어 모차르트의 아들이 적당한 나이에 이르면 음악교육을 시켜주겠다고 제안하였다. 나중에 콘스탄체는 하이든의 제안을 받아 들여서 비록 잠시지만 그의 아들이 하이든의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 후에 작곡한 오라토리오 '사계'(Les Saisons: Die Jahreszeiten: No. 33)를 모차르트에게 헌정하였다.

 

하이든이 모차르트에게 헌정한 오라토리오 '사계'의 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