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신동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진혼곡 집중탐구

정준극 2012. 3. 19. 19:33

모차르트의 진혼곡(Requiem) 집중탐구

 

모차르트의 진혼곡(Requiem: K626)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종교음악 중의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차르트의 '진혼곡'에 대하여 집중 탐구코자 한다. 미사곡인 '진혼곡'은 D 단조로 되어 있다. 잘 아는대로 모차르트는 미지의 사람으로부터 '진혼곡'의 작곡을 의뢰받고 1791년 여름부터 비엔나에서 작곡을 시작하여 상당부분을 완성했으나 전체적으로는 완성하지 못하고 그해 12월 초에(5일) 세상을 떠났다. 미완성 파트는 모차르트의 제자 겸 동료 겸 조수인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Franz Xaver Sussmayr: 1766-1803)가 완성하였다. 쥐쓰마이르는 모차르트와 함께 일하면서 그의 오페라인 '티토의 자비'와 '마술 피리'의 악보를 정사(精寫)하였으며 모차르트가 바덴에서 요양할 때에도 동행하여 돌본 사람이었다.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는 모차르트보다 꼭 10살이 어리지만 모차르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모차르트는 아들의 이름도 프란츠 사버라고 지었으며 큰 아들인 칼 토마스를 쥐쓰마이르에게 보내어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다. 한편, 모차르트에게 진혼곡을 작곡해 달라고 요청한 사람은 익명이었으나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 프란츠 폰 발제그(Franz von Walsegg: 1763-1827) 백작이라는 것이 밝혀져 쥐쓰마이르가 완성한 진혼곡은 일단 폰 발제그 백작에게 전달되었다. 폰 발제그 백작은 1791년 2월에 세상을 떠난 그의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진혼곡을 부탁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대강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면 조금 더 전문적으로 분석해 보자.

 

비엔나 부르크링의 부르크가르텐에 있는 모차르트 기념상

 

[어느정도 완성했는가]

모차르트의 '진혼곡'은 모차르트의 전체 작품 중에서 가장 신비스럽고 논란이 많은 작품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많으며 수많은 모차르트 애호가들이 지금까지고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작품이다. 우선,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문제의 진혼곡을 어느 정도까지 작곡해 놓았느냐는 것이 논란의 쟁점이다. 모차르트의 친필 악보에 의하면 모차르트는 초입경(初入經: Introit)의 오케스트라 파트까지 완성하였으며 이와 함께 키리에(Kyrie)와 그 다음의 디에스 이라에(Dies Irae)의 세부사항까지 초안을 잡아 놓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라크리모사(Lacrimosa)와 제헌경(祭獻經: Offertory)은 처음의 아홉개 음표까지 그려 놓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다음의 악보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도무지 어디 있는지 찾을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모차르트가 어느 정도까지 완성했고 어디까지 스케치를 해 놓았으며 어느 파트까지 음표를 그려 넣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다. 더구나 나중에 쥐쓰마이르가 어느 분량만큼 완성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쥐쓰마이르는 상투스(Sanctus)와 아누스 데이(Agnus Dei)는 분명히 자기가 작곡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아마도 모차르트는 상투스와 아누스 데이의 일부 음표까지 그려 놓지 않았겠느냐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이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쥐쓰마이르의 진혼곡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음반

 

모차르트에게 진혼곡을 의뢰했다는 폰 발제그 백작에 대한 사항도 의문이 남는다. 폰 발제그 백작은 다른 작곡가들에게 돈을 주고 작곡을 의뢰하여 가져온 작품들을 마치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생색을 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폰 발제그 백작은 아마도 모차르트에게 진혼곡의 작곡을 의뢰하고 완성해서 가져오면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자랑할 요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폰 발제그 백작의 그러한 의도는 모차르트의 미망인인 콘스탄체에 의해 무산되었다. 모차르트의 파트론이었던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얼마후에 콘스탄체를 위해 자선 연주회를 주선하였다. 이때에 비록 미완성이지만 진혼곡이 연주회되었다. 그러므로 모차르트가 미완성으로 남겨 놓은 진혼곡을 폰 발제그 백작이 미리 확보하여 자기가 작곡했다고 선전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피터 섀퍼(Peter Shaffer)의 1979년도 연극과 1984년도 영화인 '아마데우스'를 보면 그 진혼곡을 마치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의뢰한 것처럼 그려 놓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데에 있다. 영화에서는 분명히 살리에리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가면을 쓰고 모차르트를 찾아가 선금을 주고 진혼곡을 의뢰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진혼곡을 의뢰한 사람이 과연 정말 누구인지 전혀 몰랐을까? 아무튼 살리에리도 모차르트가 진혼곡을 완성하여 건네주면 자기가 작곡했다고 선전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영화가 픽션이라고 해도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는 하지 않는 법이므로 살리에리가 진혼곡을 의뢰했다는 것도 어느정도 근거가 있는 얘기가 아닐수 없다.

 

모차르트의 둘째 아들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제자 겸 조수인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의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삼을 만큼 쥐쓰마이르를 믿고 의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설에는 프라하의 모차르트 열렬 팬인 프란츠 사버 니메체크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고 한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후 콘스탄체는 모차르트 추모 음악회를 주선하러 출장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어린 프란츠 사버를 프라하의 니메체크 집에 잠시 맡겨 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전에 콘스탄체는 큰 아들 칼 토마스를 그 집에 보낸바 있다.

 

[진혼곡의 구성]

모차르트의 진혼곡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우선 모차르트의 진혼곡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부터 알아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쥐쓰마이르가 완성한 진혼곡은 14개 장면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설명하자면 Requiem 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안식(Rest)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보통 진혼(곡)이라고 부르고 있다.

 

I. 초입경(Introitus) - Requiem aeternam(영원한 안식) - 합창과 소프라노 솔로

II. 키리에(Kyrie eleison: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 합창

III. 세퀜티아(Sequentia: 부속가: 연속적으로 노래함: Sequenz)

- Dies irae(진노의 날에, 최후의 심판일에라는 뜻) - 합창

- Tuba mirum(놀라운 나팔소리) - 소프라노, 콘트랄토, 테너, 베이스 솔로

- Rex tremendae majestatis(위엄으로 떨게하는 왕이시여) - 합창

- Recordare, Jesu pie(자비로우신 예수시여) - 소프라노, 콘트랄토, 테너, 베이스 솔로

- Confutatis maledictis(악인들을 쳐부수시고) - 합창

- Lacrimosa dies illa(눈물의 날에) - 합창

IV. 제헌경(Offertorium: 봉헌송)

- Domine Jesu Christe(주 예수 그리스도) - 합창과 솔로 4중창

- Versus: Hostias et preces(우리 주를 찬양함) - 합창

V. 상투스(Sanctus)

- Sanctus Dominus Deus Sabaoth(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나님) - 합창

- Benedictus(축복 있으라) - 솔로 4중창, 합창

VI. 아누스 데이(Agnus Dei: 하나님의 어린양) - 합창

VII. 영성체송(Communio: 성찬예식)

- Lux aeterna(영원한 빛) - 소프라노 솔로와 합창

 

게오르그 솔티 경이 지휘하는 빈필하모닉과 빈슈타츠오퍼합창단, 그리고 오거, 바르톨리, 콜, 페이프의 솔로. 모차르트 서거 200 주년 기념의 진혼곡 연주회 음반. 비엔나의 슈테판성당에서 연주되었다. 슈테판성당은 모차르트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며 자녀들의 세례미사를 올린 곳이고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 영결미사를 올린 곳이다. 커버의 사진은 슈테판성당에서의 진혼곡 연주회 장면.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1791년 12월 5일에 진혼곡은 오프닝 파트인 Requiem aeternam(영원한 안식)만이 오케스트라와 성악 부분이 완전히 작곡되어 있었고 그 이후의 Kyrie와 Sequence의 대부분, 즉 Dies irae로부터 Confutatis까지는 다만 성악 파트와 콘티누오(continuo: 통주(通奏) 저음 파트. 화성은 변하지만 저음은 일정한 것), 그리고 일부 곡에서는 오케스트라 파트가 부분적으로 표시되어 있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Confutatis의 바이올린 파트, Recordare의 경과부(브릿지 파사지) 정도가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Sequence의 마지막 노래인 Lacrimosa는 첫 여덟 음표만이 그려져 있었다. 그 다음의 Offertorium의 두 곡도 일부만 완성되어 있었다. 즉, Domine Jesu Christe는 성악파트와 콘티누오 파트, 그리고 Hostias 는 성악 파트만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Sanctus, Agnus Dei, Communio 파트는 아무것도 되어 있는 것이 없었다. 혹시 모차르트가 스케치를 해 놓았는데 다른 곳에 두었기 때문에 찾지를 못했거나 또는 누가 집어 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은 다만 가능성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초입경(Introit)는 D 단조로 되어 있으며 마지막 파트에는 키리에로 직접 옮겨가도록 하프 카덴스로 끝나게 되어 있다. 키리에는 더블 푸가이다. 하나의 주제는 Kyrie Eleison 에 응답하도록 했으몀 다른 하나의 주제는 Christe Eleison 에 응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Tuba miram은 베이스를 반주로 하여 트럼본이 솔로를 하도록 되어 있다. Confutatis는 현악 반주가 유명하다. 시작할 때에는 베이스와 테너가 분노에 넘친 소리를 내지만 두번째 파트에서는 소프라노와 알토가 부드러운 소리로서 아르페지오를 이끌어 간다.

 

모차르트가 침대에 누워서 진혼곡을 작곡하고 있는 그림. 모차르트의 손을 잡고 있는 여인은 콘스탄체.

                             

[콘스탄체와 진혼곡]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유별난 사람인 프란츠 폰 발제그 백작이 중간에 사람을 통해서 모차르트에게 진혼곡을 작곡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그러면 폰 발제그 백작은 그것을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해서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자기 부인을 추도하는 모임에서 연주한다는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착수금으로 주겠다는 금액의 반을 받았다. 모차르트가 진혼곡을 미완성으로 남겨 놓은채 세상을 떠나자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는 약속된 금액의 나머지 반도 어떻게 해서든지 받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누구를 시켜서 미완성 파트를 완성해서 백작에게 주고 나머지 돈을 받아낼 생각을 했다. 콘스탄체는 우선 작곡가로서 모차르트의 친구인 요셉 폰 아이블러(Joseph von Eybler: 1765-1846)를 후보자로 삼고 접촉했다. 요셉 폰 아이블러는 모처럼 모차르트의 미망인인 콘스탄체의 요청이므로 일단 승낙을 하고 Dies irae 로부터 Lacrimosa까지 스코어를 완성했다. 폰 아이블러는 Domine Jesu Christe의 첫 시작 파트도 작곡했다. 아이블러와 모차르트의 스타일은 매우흡사했다. 만일 제3자가 들어본다면 모차르트가 모두 작곡한 것으로 믿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콘스탄체는 폰 아이블러에게 나머지 파트도 모두 완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이블러는 나머지 파트를 완성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악보를 콘스탄체에게 다시 돌려 주었다.

 

모차르트의 두 아들. 형인 칼 토마스 모차르트와 동생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

 

콘스탄체는 또 다른 작곡가를 생각했다. 모차르트와 친하게 지낸 제자 겸 동료인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를 후보자로 생각했다. 쥐쓰마이르로서는 스승의 미망인의 부탁이므로 들어주지 않을수 없었다. 쥐쓰마이르는 미완성 파트를 완성하기 위해 폰 아이블러가 작곡한 부분의 악보를 빌려왔다. 그리고는 Kyrie 이후 파트의 오케스트라 파트를 완성했고 Lacrimosa 도 완성했으며 진혼곡으로서 갖추어야 할 파트, 즉 Sanctus 와 Benedictus, Agnus Dei 를 추가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파트로서 Lux aeterna 를 추가하였다. Lux aeterna에서는 모차르트가 첫 두 곡에서 사용했던 음악을 상당 부분 사용하였고 가사는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체와 쥐쓰마이르는 '진혼곡 완성하기 작전'을 완수하였다. 믿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만일 모차르트가 살아 있어서 진혼곡을 완성해야 했다면 마지막 파트인 Lux aeterna 에서 분명히 첫 두 곡의 음악을 반복해서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쥐쓰마이어의 기막힌 재치와 재능은 가히 놀랄만한 일이 아닐수 없다.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모차르트가 진혼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쥐쓰마이르에게 완성토록 하고 마치 모차르트가 1792년에 작곡한 것처럼 서명을 대신하여서 의뢰자인 폰 발제극 백작에게 전달하여 작곡료의 잔금을 받아냈다고 한다.

                 

쥐쓰마이르가 진혼곡을 완성하는 데에는 다른 작곡가들도 도와 주었다는 얘기가 있다. Agnus Dei 는 모차르트가 스케치 해 놓은 지시에 근거하여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Agnus Dei 에 나오는 음악은 모차르트가 전에 작곡했던 '참새 미사'(K 220: Spatzenmesse: Missa Brevis No 10 c major)의 Gloria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었다. 사족이지만 '참새 미사'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이 미사곡의 호산나, 상투스, 베네딕투스에서 바이올린 연주가 마치 참새가 지저귀는 듯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Agnus Dei의 합창에서 베이스 파트는 첫 번째 곡인. Introitus에서 인용한 것이 틀림없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은 이른바 쥐쓰마이르가 완성한 파트에서 어떤 부분이 모차르트의 음악을 인용한 것인지를 지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론적으로 그 음악이 매우 우수하면 모차르트가 스케치 해 놓은 것을 인용한 것이고 미스테이크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건 쥐쓰마이르가 창작한 것이 분명하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차르트 친필의 악보. 디에스 이라에(분노의 날에)의 시작부분

 

또 하나의 논란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날 것을 예견하고서 나머지 파트를 이러저러하게 완성하라는 내용의 메모를 적어 놓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사실 이같은 주장은 콘스탄체의 입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콘스탄체는 비록 쥐쓰마이르가 미완성 파트를 완성하기는 했지만 진혼곡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차르트의 지시에 의해 완성했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인 새 해에 들어서서 콘스탄체는 쥐쓰마이르가 거의 모두를 완성한 진혼곡에 1792년이라는 연도와 함께 모차르트의 서명을 대신하여 폰 발제그 백작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 진혼곡으로 말씀드리자면 순전히 모차르트가 완성한 것이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진혼곡을 모차르트가 온전히 완성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콘스탄체로서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비록 폰 발제그 백작에게 제공하기는 했지만 앞으로 출판을 하거나 연주를 할 때에 사용료를 받아 낼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모차르트가 완성한 것이 아니라 쥐쓰마이르라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완성한 것이라고 하면 누가 사용료를 내고 연주할것인가도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었다.

 

아무튼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위대한 진혼곡을 돈 몇 푼을 받기 위해 폰 발제그 백작을 찾아가서 전달했다는 것은 우습지도 않은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런데 더 웃기는 일은 그후로 미완성 스코어가 이곳저곳에서 나타나서 "이것이 진짜 모차르트가 미완성으로 남기고 간 악보올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 그런 악보를 손에 넣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우물우물하며 대답이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진혼곡의 얼마만큼 부분을 모차르트가 완성했느냐는 것이 상당한 논란으로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쥐쓰마이르가 완성한 것을 모차르트의 진혼곡으로서 인정하여 그런줄 알고 세계 모든 곳에서 그것을 연주하고 있다. 그래서 혹시 다른 작품을 가지고 '이것이 진짜 모차르트가 미완성으로 남긴 것을 내가 완성한 것이요'라고 나서는 사람이 있더라도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인 지기스문트 폰 노이콤(Sigismund von Neukomm: 1778-1858)의 주장이었다. 요셉 하이든의 제자였던  잘츠부르크 출신의 노이콤은 마지막 파트에 Lux aeterna 대신에 Libera me, Domine(주여 나를 자유롭게 하소서)를 작곡하여 넣고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산타체칠리아 축일에 연주했다.

 

모차르트의 초상화 중 마지막 작품. 사후에 그의 처남이 기억을 살려 그린 것이다. 모차르트를 그린 초상화 중에서 가장 비슷한 모습이라고 한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둘러싸고 야기된 논란과 의구심과 궁금증은 모두 콘스탄체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콘스탄체에 의하면 모차르트는 누가 자기를 독살코자 하여 독이 몸에 퍼졌기 때문에 얼마가지 못해서 죽을 것 같으며 그래서 자기를 위해 진혼곡을 작곡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당시 모차르트는 몸이 붓고 열이 높아서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진혼곡의 작곡을 계속 서두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에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에게 진혼곡을 어떻게 완성하는지에 대하여 설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튼 모차르트가 진혼곡을 얼마만큼 작곡했으며 언제 어떻게 완성되었는지에 대하여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후 10년이 넘도록 여러 의견만 분분할 뿐 정확한 사실이 정리되지 않았다. 1798년에 독일의 전기작가이며 아마추어 작곡가인 프리드리히 로흘리츠(Friedrich Rochlitz)는 모차르트에 대한 일화집을 발간한바 있다. 그는 1796년에 콘스탄체를 만나 인터뷰를 한 결과 여러가지 일화를 수집할수 있었다고 말했다. 로흘리츠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정리하여 발표했다.

 

- 모차르트는 누가 진혼곡의 작곡을 의뢰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 진혼곡을 언제까지 완성해야 한다는 기한도 없었다.

- 모차르트는 진혼곡을 완성하려면 4주는 걸려야 한다고 말했다.

- 모차르트는 작업을 착수하기 전에 100 두카를 요청하여 받았다.

- 모차르트는 착수금을 받자마자 작곡을 시작했다.

- 모차르트의 건강은 외견으로 보아도 좋지 않았다. 그는 작곡을 하면서 여러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와 함께 프라하를 방문하러 갔을 때에는 작곡을 하지 않았다.

-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에게 진혼곡을 자기의 장례식을 위해 작곡한다고 말했다.

- 모차르트는 진혼곡을 의뢰한 사람의 모습과 태도가 대단히 괴이했다고 말했다.

- 모차르트는 레오폴드 황제가 대관식을 위해 프라하로 떠날 날이 가까워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과 같은 코멘트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논란은 마지막 항목으로 레오폴드 황제에 대한 것이었다. 로흘리츠에 의하면 레오폴드 황제는 모차르트에게 어떤 미지의 메신저가 찾아와서 진혼곡을 부탁하기 훨씬 전에 프라하로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차르트가 진혼곡의 작곡을 부탁 받고나서 레오폴드 황제의 프라하행이 가까워 오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레오폴드 황제는 1791년 7월 중순에 프라하로 떠났다. 그리고 콘스탄체는 6월 한달 내내와 7월 중순까지 바덴에 있었다. 그러므로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진혼곡의 작곡을 의뢰 받았을 때 비엔나에 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7월 중순에는 '마술 피리'가 서곡과 사제들의 행진곡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완성되었다. 또한 7월 중순에는 '티토의 자비'의 작곡을 의뢰받았다. 그러므로 모차르트가 대곡인 진혼곡의 작곡을 시작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진혼곡 연주 음반. 소프라노 안나 토모와 신토브,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 테너 베르너 크렘, 바리톤 호세 반 담이 솔리스트였고 비엔나 합창연맹이 합창들 맡았다. 모차르트의 진혼곡 음반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다.

 

또한 1798년에는 콘스탄체가 프라하의 프란츠 사버 니메체크(Franz Xaver Niemetschek)라는 사람과 인터뷰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니메체크는 모차르트가 작고한 후 모차르트의 두 아들인 칼 토마스와 프란츠 사버를 프라하의 자기 집에서 맡아 길렀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 추모음악회를 주선하느라고 출장이 많았다. 모차르트의 큰 아들인 칼 토마스는 니메체크의 집에 3년 동안 있었으며 동생 프란츠 사버는 나중에 6개월 동안 지냈다. 니메체크는 모차르트의 아이들의 대부와 같은 존재였다. 니메체크는 모차르트에 대한 또 다른 전기를 발간하기 위해 콘스탄체를 만났다고 한다. 니메체크는 1808년에 모차르트의 전기를 발간했다. 여기에서 그는 모차르트가 진혼곡을 의뢰받은데 대하여 몇가지 새로운 사항들을 제시했다.

 

- 모차르트는 신성로마제국 레오폴드 황제의 대관식이 끝난 직후에 진혼곡의 작곡을 의뢰받았다. 그리고 그가 프라하를 방문하기 전이었다.

- 모차르트는 미지의 메신저의 청탁을 그 자리에서 수락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의뢰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작곡료를 제안했고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완성해야 한다는 기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모차르트는 누가 의뢰했는지를 알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 모차르트를 찾아왔던 메신저가 얼마후에 다시 찾아와 모차르트가 요구했던 금액을 지불하였으며 진혼곡을 완성하면 보너스를 주겠다는 메모지도 가져왔다.

-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진혼곡의 작곡을 시작했다.

- 모차르트는 진혼곡의 작곡을 시작할 때에 이미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있었다.

-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에게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분명히 누군가 나에게 독을 준 것 같다.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릴수가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진혼곡 때문에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사를 불렀고 악보를 다른데다 치워놓았다.

- 모차르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침대에 누워 진혼곡의 스코어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미지의 메신저가 찾아와서 미완성된 진혼곡의 스코어를 가져갔다.

- 콘스탄체는 진혼곡의 의뢰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비엔나의 성미하엘교회. 이곳에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5일 후인 1791년 12월 10일 테아터 안 데어 빈(비엔나강변극장)의 멤버들이 주관하여 추모음악회를 열었다. 어떤 곡이 연주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성미하엘교회는 호프부르크 궁전의 정문 앞 미하엘광장에 있다. 유서 깊은 교회이다.

 

하지만 이상과 같은 진술도 정확하지 않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동안의 편지를 보면 콘스탄체는 누가 의뢰자인지 알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수 있다. 그리고 모차르트가 죽은 직후에 메신저가 와서 미완성이지만 진혼곡의 스코어를 가져 갔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는 얘기다. 이상의 진술에서 그나마 믿을수 있는 얘기는 모차르트가 진혼곡을 작곡하는 중에 콘스탄체가 스코어를 다른 곳을 치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인터뷰 내용이 있다. 바로 콘스탄체와 재혼한 덴마크 사람 게오르그 니콜라우스 폰 니쎈(Georg Nikolaus von Nissen: 1761-1826)의 기록이다. 니쎈은 모차르트의 부인이었던 여자와 결혼했지만 모차르트를 대단히 존경한 사람이었다. 니쎈은 모차르트의 전기를 썼다. 콘스탄체는 니쎈이 1826년에 세상을 떠나자 1828년에 니쎈이 쓴 모차르트 전기를 발표했다. 그중에서 진혼곡에 대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 모차르트는 레오폴드 황제의 대관식 직후에 진혼곡의 작곡을 의뢰받았다. 그것은 그가 프라하를 방문하기 전의 일이었다.

- 모차르트는 메신저의 청탁을 당장 수락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의뢰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작곡료를 제안했고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완성일자에 대하여는 약속을 할수 없다고 말했다.

- 모차르트를 찾아왔던 메신저가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모차르트가 요청한 금액을 전달했으며 아울러 진혼곡을 완성하면 보너스까지 주겠다고 약속했다.

 

모차르트의 진혼곡 중에서 모차르트가 완성한 부분을 사람들이 불러보고 있다. 라크리모사를 불렀는데 모두 슬픔을 감출수 없었으며 더러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 장면을 상상한 그림이다.

 

[현대에서의 시도]

1960년의 어느때에 모차르트가 작곡한 Amen 푸가가 발견되었다. 음악학자들은 이 곡이 진혼곡의 Sequence 중에서 마지막 곡인 Lacrimosa 다음에 넣어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더구나 Amem 푸가는 D 단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학자는 Amen 푸가가 D 단조로 된 다른 미사곡에 사용하기 위해 작곡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Kyrie K 341도 바로 그 미사곡에 포함되어 있는 곡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Amen 푸가의 스코어가 적혀 있는 종이는 1791년에 '마술 피리'의 서곡을 스케치한 곳에 함께 있었다. 그러므로 Amen 푸가를 1791년에 작곡했다는 것이 타당하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모차르트에게 진혼곡의 작곡을 의뢰한 장본이며 모차르트가 진혼곡을 미완성인채 세상을 떠나자 미완성 부분을 완성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러시아의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통해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하여서 독살했다는 내용을 그렸다. 아무튼 모차르트의 진혼곡 이야기가 나오면 바늘에 실 가듯 따라 나오는 이름이 살리에리이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어느덧 모차르트의 진혼곡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게 되었다. 음악학자들은 물론이고 일부 작곡가들은 '쥐쓰마이르 버전'의 진혼곡에 대하여 신통치 않게 생각하고 다시 완성코자 시도하였다. 그 중에는 프란츠 바이어(Franz Beyer: 1922- 독일 음악학자), 던칸 드루스(Duncan Druce: 1939-2015: 영국 작곡가), 리챠드 먼더(Richard Maunder), H.C. 로빈스 랜던(Robbins Landon), 라버트 레빈(Robert Levin: 1947- 노르웨이 피아니스트), 사이몬 앤드류스(Simon Andrews: 1958- 영국 작곡가), 클레멘스 크렘(Clemens Kremme) 등이 특히 열심이었다. 이들 중에서 클레멘스 크렘과 같은 작곡가는 나름대로 진혼곡을 완성하였다. 그렇게 완성하는 데에는 일정한 방법이 있었다. 예를 들면 바이어(Beyer)에디션은 쥐쓰마이르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더욱 모차르트 스타일로 수정하였다. 로빈스 랜던은 쥐쓰마이르가 손을 대기 전에 완성을 시도했던 아이블러의 버전을 토대로 새롭게 수정하였다. 랜던은 아이블러의 버전이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모차르트 스타일이라고 믿었다. 리챠드 먼더는 쥐쓰마이르가 작곡해서 붙였다고 생각되는 파트는 모두 다른 음악으로 새롭게 만들어서 대체하였다. 그러나 Agnus Dei 파트만은 유지하였다. 왜냐하면 Agnus Dei는 쥐쓰마이어의 솜씨라고 하지만 모차르트가 전에 작곡해 놓은 '참새 미사'(K 220)의 음악을 인용한 것이 거의 틀림없기 때문이다. 던칸 드루스의 버전은 쥐쓰마이르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블러가 Lacrimosa 에서 만들어 놓았던 일부 음악은 그대로 인용하였으며 아울러 Lacrimosa를 연장하여 Amen 푸가로서 마무리 되도록 했다.

 

가장 사랑받고 있는 진혼곡 음반. 칼 뵘이 지휘하는 비엔나 필하모닉의 연주

 

사이몬 앤드류스와 로버트 레빈의 버전은 쥐쓰마이르의 버전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으며 다만 일부 오케스트레이션을 수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성악 파트에서는 완전히 새롭게 바꾼 부분도 있다. 더욱 모차르트 스타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레빈과 앤드류스의 버전에서도 그런 점을 찾아 볼수 있다. 예를 들어 Sanctus 푸가는 D 조로서 완전히 새롭게 쓴 것이며 Benedictus 는 상투스 푸가를 반복하는 형태로 수정하였다. 쥐쓰마이르는 상투스 푸가를 B 플랫으로 작곡하였다. 드루스도 베네딕투스를 완전히 새롭게 썼다. 다만, 도입부만을 그대로 유지했을 뿐이었다. 먼더, 레빈, 드루스는 1960년대에 발견되었다는 아멘 푸가의 스케치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Sequence의 마지막 파트에 아멘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많이 나오게 했다. 쥐쓰마이르의 버전에서는 아멘을 라크리모사의 끝에 변격의 카덴스로서 사용하였을 뿐이었다. 먼더와 레빈은 라크리모사의 엔딩을 다시 작곡했다. 전체 텍스트를 아멘으로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모차르트의 임종을 지키고 있는 제자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 모차르트는 쥐쓰마이르에게 진혼곡을 완성키 위한 지시를 했다고 한다.

 

[진혼곡 일지]

- 1772년 1월 2일.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진혼곡 C 단조의 초연에 참석하였다. 모차르트도 하이든처럼 진혼곡을 작곡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 1791년 2월 14일. 폰 발제그 백작의 부인인 안나가 2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폰 발제그 백작은 애통하는 심정으로 진혼곡을 만들어 연주할 생각이었다.

- 1791년 7월 중순. 폰 발제그 백작의 집사장인 프란츠 안톤 라이트게브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모차르트의 집을 찾아와 모차르트에게 진혼곡의 작곡을 의뢰하는 메모를 전달했다.

- 역시 7월 중순. 프라하국립극장의 임프레사리오(사업담당자)인 도메니코 과르다소니가 모차르트에게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의 작곡을 의뢰했다. 9월 6일로 예정되어 있는 레오폴드 2세의 보헤미아왕 대관식과 관련한 축제에서 공연한다는 계획이었다.

- 8월. 모차르트는 '티토의 자비'의 작곡에만 매달렸다. 9월 5일까지는 완성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 8월 25일. 모차르트가 프라하로 떠났다.

- 9월 6일. 모차르트가 '티토의 자비'의 초연을 지휘했다.

- 9월 중순부터 9월 28일까지. 그동안 만들어 놓은 '마술 피리'를 수정하여 완성하였다.

- 9월 30일. '마술 피리'가 테아터 아우프 뎀 뷔덴'(Theater auf dem Wieden)에서 초연되었다.

- 10월 7일. 클라리넷을 위한 A 장조 협주곡을 완성했다.

- 10월 8일부터 11월 20일까지. 진혼곡과 다른 칸타타 한편의 작곡에 주력하였다.

- 11월 20일. 건강이 악화되어 누워 있어야만 했다.

- 12월 5일. 마침내 자정이 좀 지나서 모차르트가 운명하였다.

- 12월 7일. 모차르트의 시신을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 12월 10일. 테아터 아우프 뎀 뷔덴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성미하엘교회(미하일러키르헤)에서 모차르트를 추모하여 진혼곡을 있는 그대로 연주하였다.

- 1792년 3월 초순. 쥐쓰마이르가 진혼곡을 완성한 싯점으로 생각된다.

- 1793년 1월 2일.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Gottfried van Swieten)이 주선하여 콘스탄체를 돕기 위한 진혼곡 연주회가 열렸다. 반 슈비텐은 모차르트의 생전에 그의 파트론이었으며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으로 모차르트의 장례식도 그가 주선하여 거행되었다. 오스트리아제국의 외교관을 지냈고 국립도서관장이었다.

- 1793년 12월 초순. 콘스탄체가 진혼곡 스코어를 폰 발제그 백작에게 전달했다.

- 1793년 12월 14일. 폰 발제그 백작이 세상을 떠난 부인을 추모하여 비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에서 진혼곡을 직접 지휘하였다.

- 1794년 2월 14일. 폰 발제그 백작이 젬메링의 마리아 슈츠교회에서 세상을 떠난 부인의 3주기를 맞이하여 진혼곡을 또 다시 공연했다.

- 1799년. 브라이트코프-해르텔(Breitkopf&Haertel)출판사가 진혼곡을 출판했다.

- 1809년 6월 15일. 요셉 하이든을 추모하는 미사에서 모차르트의 진혼곡이 연주되었다.

- 1833년. 폰 아이블러가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지휘하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그후 폰 아이블러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다가 1846년에 세상을 떠났다.

- 1840년 12월 15일. 파리에서 나폴레옹의 유해를 이장하는 것을 기념하여 파리 오페라에서 프랑수아 안투안 아베네크의 지휘로 모차르트의 진혼곡이 연주되었다.

- 1849년 10월 30일. 프레데릭 쇼팽의 장례식에서 모차르트의 진혼곡이 연주되었다.

- 1964년 1월 19일.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추모미사에서 모차르트의 진혼곡이 보스턴의 성십자대성당에서 연주되었다.

- 1991년 12월 5일. 모차르트 서거 2백주년을 기념하여 비엔나의 슈테판대성당(슈테판스돔)에서 기념미사가 열렸다. 게오르그 솔티 경이 지휘하는 비엔나 필하모닉이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연주했다.

- 1999년.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서거 10주년 기념연주회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여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연주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직후 콘스탄체로부터 진혼곡을 완성해 달라고 부탁을 받은 요셉 폰 아이블러. 그는 실제로 미완성 진혼곡의 여러 파트를 완성했지만 포기하였다. 그는 1833년 비엔나에서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지휘하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결국 식물인간처럼 되어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진혼곡의 영향]

모차르트는 헨델을 존경하였다. 모차르트의 파트론인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은 1789년 모차르트에게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편곡해 달라고 의뢰한 일도 있었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은 분명히 헨델의 메시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특히 Kyrie는 메시아 25번인 And with His strips we are healed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푸가토(fugato)가 같기 때문이다. 헨델은 푸가토의 거장이었다. 다만, 모차르트의 키리에는 헨델의 것에 비하여 장식음을 좀 더 사용하여 변형을 주었다는 차이가 있다. 그런가 하면 진혼곡의 Introitus(초입경)이 헨델의 '캐롤린 왕비를 위한 장례가'(Funeral Anthem for Queen Caroline)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콘푸타티스는 파스쿠알레 안포시(Pasquale Anfossi: 1727-1797)의 Sinfonia Venezia(베니스 심포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작품도 있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에서 Introitus(초입경)을 미하엘 하이든이 자기의 진혼곡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두 작품의 Introitus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조지 프리데릭 헨델

                          

[진혼곡 신화]

진혼곡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궁금증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백미는 살리에리가 진혼곡을 의뢰했고 미완성 부분도 완성했다는 얘기이다. 피터 섀퍼의 연극과 영화에 그런 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과연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가 모차르트를 파멸시키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진혼곡이라는 압박을 주어 명을 재촉케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한 것이 맞다고 믿고 있다. 영화 때문이다. 피터 섀퍼의 영화 '아마데우스'는 실상 19세기 러시아의 니콜라스 림스키 코르사코프(1844-1908)가 작곡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단막의 오페라에서 비롯한 억측이 아닌가 싶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서 살리에리가 라이벌인 모차르트를 제거하기 위해 독살했다고 소개했다. 이 오페라에서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모차르트의 진혼곡과 오페라 '돈 조반니'의 음악을 인용하였다. 그러면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어떤 작품에 바탕을 두고 대본을 썼는가?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더 푸슈킨(Alexander Pushkin: 1799-1837)의 산문시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내용의 산문시를 처음 발표한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더 푸슈킨

 

[모차르트 친필 메모 도난사건]

1958년에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의 진혼곡 친필 악보를 전시하였다. 그런데 박람회 기간 중에 누가 전시장에 들어와서 진혼곡 친필 악보의 마지막 페이지 아랫부분을 찢어서 가져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찢겨진 부분에는 Quam olim d: C 라는 글이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이 글은 Domine Juse 의 Quam olim 푸가 부분을 da capo(d: C: 다카포)로 하라는 지시내용이었다. 다카포라는 음악용어는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서 시작하라는 뜻이다. 2012년 현재 찢겨나간 부분은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글은 죽음을 앞 둔 모차르트의 마지막 필적이라는 데에 큰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던지 그 글이 적힌 부분을 찢어서 가져간 사람은 아마 모르긴해도 죽음을 앞 둔 마지막 행동이었을 것이다.

 

모차르트가 친필로 적은 진혼곡 스코어. 우측 하단을 누가 찢어갔다. 1958년 브뤼셀의 만국박람회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