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토리오의 세계/특별 오라토리오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

정준극 2012. 10. 22. 23:07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

조아키노 로시니(Gioachino Rossini)의 위대한 작품

 

조아키노 로시니. 1865년.

 

아직까지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면 후회한다.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를 한번 듣고 난 후에 다시 듣지 않았다면 더 후회한다. 이 말은 미안하지만 필자의 말이다. 남이 들으면 '원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필자는 그만큼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를 좋아하고 존경한다. 로시니라고 하면 우선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런 음악이 넘쳐 흐르는 대단한 작품이다. 정말 천재적인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로시니의 오페라들을 들어보면 너무나 재미있고 경쾌하여서 마음마저 명랑해진다. 그래서 로시니라고 하면 무조건 경쾌하고 재미난 오페라의 거장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지만 일단 '스타바트 마테르'를 듣고나면 '아니! 로시니에게 이런 면이 다 있었나?'라며 로시니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이든의 '스타바트 마테르'도 대단히 감동적인 작품이지만 벨칸토 오페라의 대부인 로시니가 작곡한 '스타바트 마테르'도 대단히 감동적인 작품이다. 

 

약 40편의 오페라를 내놓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로시니는 37세의 한창 나이 때에 돌연 '이제로부터는 오페라 작곡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7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더 이상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다. 그렇다고해서 작곡에서 아주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종교음악이나 실내악 등을 간간히 작곡하였다. '스타바트 마테르'도 실은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스타바트 마테르'는 로시니가 49세 때인 1841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스타바트 마테르' 텍스트를 기반으로하여 합창과 솔리스트를 위한 곡으로 만든 것이다. 전통적인 '스타바트 마테르' 텍스트라는 것은 가톨릭교회에서 '성모의 일곱가지 슬픔의 날'(성모통고일: 9월 15일)과 '수난주일 후의 첫 금요일인 '일곱가지 괴로움의 기념일'의 미사에서 부르기 위해 만들어 놓은 독송(讀誦)의 가사를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스타바트 마테르'라고 하면  그 독송의 가사를 바탕으로 만든 전례음악(Liturgical music)을 말한다. '스타바트 마테르'는 라틴어로서 '(슬픔의) 성모께서 서 계셨다'(The Sorrowful Mother Stood)라는 뜻이다. 십자가 아래에서 엎드려 애통하던 성모가 마침내 일어나서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를 발이라도 부여잡으면서 슬퍼하는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스타바트 마테르'를 주로 사순절 기간 중에, 성모통고의 기념일에,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에 부른다. 얘기가 길어졌으며 설명이 미비하였음을 송구하게 생각하며 다시 로시니가 '스타바트 마테르'를 작곡하게 된 배경으로 돌아가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스타바트 마테르' 음반

 

더 이상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겠다고 선언한지 2년이 지난 1831년에 로시니는 별로 할 일도 없고 하여 친구겸 팬인 알렉산드르 아구아도(Alexandre Aguado)가 스페인이나 여행을 가자고 권하는 바람에 함께 가게 되었다. 알렉산드르 아구아도는 스페인의 이름난 은행가로서 프랑스에서는 포도주로 유명한 샤토 마르고(Château Margaux)를 소유한 부자였다. 로시니는 스페인 여행 중에 스페인의 국가의원인 페르난데즈 바렐라(Fernandez Varela)라는 사람을 만났다. 신앙심이 깊었던 바렐라는 위대한 로시니 선생에게 '스타바트 마테르'를 작곡해 달라고 간청했다. 대본은 전통적인 교회의 전례독송문을 바탕으로 하면 좋겠다는 말도 덧 붙였다. 로시니는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요청한 것도 아니므로 일단 청탁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작곡에 착수했다. 그러나 거의 1년이 지났는데도 20행에 이르는 전례문의 절반 정도밖에 음악으로 만들지 못했다. 워낙 천성이 게으른 로시니이지만 일단 작곡에 들어갔다고 하면 초스피드의 실력을 과시하는 그인지라 마음만 먹으면 단시간내에 완성할수도 있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놀면서 작곡을 미룬 것이 아니라 몸이 아파서 어쩔수 없이 미룬 것이었다. 아무튼 로시니는 전레독송의 제1번, 그리고 5번부터 9번까지만 완성하고 나머지는 손도 대지 못하여서 결국 바렐라의 부탁을 들어주기가 곤란한 입장이 되었다.

 

로시니는 친구 조반니 타돌리니(Giovanni Tadolini: 1789-1872)에게 미완성 부분을 완성해 줄것을 부탁했다. 물론 사례도 섭섭치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하여 타돌리니가 나머지 6 곡을 완성하였다. 로시니는 타돌리니가 완성한 '스타바트 마테르'를 바렐라에게 전달하면서 일단은 자기가 완성한 것처럼 얘기하였다. 로시니와 타돌리니의 합작인 '스타바트 마테르'는 1833년 성토요일에 마드리드의 산펠리페 엘 레알(San Felipe el Real) 교회에서 초연되었다. 하지만 이 합작 버전은 출판권 문제에 휩싸여 더 이상 공연되지 않았다. 로시니에게 '스타바트 마테르'를 의뢰한 바렐라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상속인들이 로시니가 작곡한 '스타바트 마테르'의 소유자가 바렐라라고 믿어서 그 출판권을 팔면 큰 돈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파리의 음악출판가인 앙투안 올랴니에(Antoine Aulagnier)라는 사람에게 2천 프랑을 받고 팔았다. 앙투안 올랴니에는 즉시 위대한 로시니 선생의 '스타바트 마테르'가 나왔다고 선전하고 인쇄하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로시니는 출판사가 판매하고 있는 '스타바트 마테르'는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즉, 출판사의 출판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기야 로시니로서는 '스타바트 마테르'에 타돌리니의 음악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순전히 자기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자 약삭빠른 앙투안 올랴니에는 로시니의 주장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발 앞장서서 1841년 10월 31일에 파리의 살르 헤르츠(Salle Herz)에서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 대연주회를 주선하였다. 다만, 로시니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하여서 로시니가 작곡한 여섯 곡만 연주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로시니-타돌리니 합작의 '스타바트 마테르'가 처음 공연된 마드리드의 산펠리페 엘 레알 교회

                   

그런데 실은 로시니로 말하자면 이재에도 밝은 편이어서 비록 타돌리니와의 합작이지만 그의 명의로 된 '스타바트 마테르'의 출판권을 앙투안 올랴니에보다 한발 앞서서 또 다른 파리의 악보출판가인 외진 트루프나스( Eugène  Troupenas)라는 사람에게 이미 6천 프랑을 받고 팔았다. 앙투안 올랴니에에게 출판권이 없다고 주장한 것도 그런 사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법정 소송이 뒤따랐다. 그런데 결과는 외진 트루프나스의 승소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로시니는 뜻한바 있어서 타돌리니가 만든 곡들을 모두 없던 것으로 하고 자기가 직접 미완성 부분을 완성키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해, 즉 1841년 말에 진짜 로시니표 '스타바트 마테르'를 완성하였으니 그것이 오늘날 전세계에서 연주되고 있는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이며 애초에 타돌리니와 합작하여 만든 '스타마트 마테르'는 그후 어찌되었는지 운명을 알길이 없게 되었다. 한편, 로시니로부터 6천 프랑에 '스타바트 마테르'의 출판권을 샀던 외진 트루프나스는 그 출판권을 다시 레옹(Léon)과 마리 에스쿠디에(Marie Escudier) 형제에게 8천 프랑에 팔았으며 이들 형제는 또 다시 파리의 이탈리아극장(Théâtre-Italien)에 2만 프랑을 받고 팔았다. 이탈리아극장은 새로 완성된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의 초연을 준비하였다. 아무튼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1842년 1월 7일 파리에 있는 이탈리아극장의 살르 벤타두르(Salle Ventadour)에서 초연 아닌 초연을 가졌다. 물론 이 연주는 로시니가 '스타바트 마테르'의 전편을 작곡했다는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이날의 초연은 소프라노 줄리아 그리시(Giulia Grisi), 메조소프라노 엠마 알베르타찌(Emma Albertazzi), 테너 마리오(조반니 마리오: Giovanni Mario), 바리톤 안토니오 탐부리니(Antonio Tamburini) 등 당대의 성악가들이 총 출연한 것이었다. 이날의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가 초연된 파리의 살르 벤타두르. 1883년.

                                    

로시니의 폭넓은 오페라적 경력에 대하여 대중들은 두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한쪽은 대단히 찬양하는 편이고 다른 한쪽은 비판하는 편이었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로시니의 오페라가 가볍기만 하며 무게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미안하지만 리하르트 바그너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그너는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가 공연된다고 하자 사람들이 종교음악을 가지고 돈버는 장사를 한다고 비난하였다. 바그너의 비판은 로시니를 겨냥하였지만 실은 당시 유럽의 음악적 패션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목적이었다. 바그너는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가 공연되기 며칠 전에 슈만이 발간하고 있는 '신음악신보'(Neue Zeitshrift für Musik)에 가명으로 기고를 하여 로시니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이해할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바그너가 그런 글을 쓸 당시에는 고작 20대 후반의 청년이었으며 파리에서 음악으로 성공을 거두기 전이었음은 유념할 일이기는 했다.

 

그해 3월에는 도니체티가 볼로냐에서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의 이탈리아 초연을 주도하였다. 이것 역시 대성공이었다. 열광하는 관중들의 모습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심지어 당일 낮에 가졌던 마지막 리허설에는 로시니도 직접 참석하였는데 리허설이 끝나자 약 5백명이나 되는 열광하는 팬들이 로시니의 숙소까지 따라가며 로시니의 이름을 연호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의 정식 공연에는 로시니가 참석하지 못했으나 팬들은 그의 숙소 앞에 모여 오랫동안 로시니의 이름을 부르며 떠날 줄을 몰랐다.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분명히 과거 로시니의 일반적인 작품과는 판이한 성격의 작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로시니에게 이런 면도 있었느냐?'면서 감탄하며 찬사를 보냈다. 성모의 슬픔을 이렇게도 아름답고 장엄하게 표현한 것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물론 핀잔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독일의 시인인 하인리히 하이네도 그 중의 하나였다. 하이네는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의 음악이 '너무 세속적이며 관능적이다. 종교적인 주제로서는 지나치게 장난스러울 정도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음악사학자인 귀스타브 슈케(Gustave Chouquet)는 '남부의 종교음악은 북부와는 상당히 다른 모양이다'라며 유럽 남부인 이탈리아 출신인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에 대하여 비아냥거렸다. 하기야 어느 시대, 어느 경우에도 모든 훌륭한 것에 대하여 조롱과 비난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가 있는 법이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현재 10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라고 말한 것은 가톨릭 교회에서 전례시에 사용하는 '스타바트 마테르'의 텍스트에는 20행이 있어서 이를 사용하여 9곡까지를 만들었지만 로시니가 이에 추가하여 '아멘'이라는 타이틀의 곡을 만들어서 마지막 곡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전체 10곡 중에서 두번째 곡인 테너 아리아 Cujus animan(쿠유스 아니맘)은 명랑하면서도 기억에 남는 멜로디로 인하여 오늘날 종종 별도의 레퍼토리로서 연주회를 장식하고 있기도 하다. 이 아리아는 이른바 브라부라(Bravura)라고 하여 대단한 기교를 요구하는 화려한 곡이다. 이제 '스타바트 마테르'의 곡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Stabat Mater dolorosa(합창: 슬픔에 잠긴 성모)

2. Cujus animan gementem(테너 아리아: 탄식하고 슬퍼하는 영혼들)

3. Quis est homo(소프라노-메조소프라노 듀엣: 누가 울지 아니하리오)

4. Pro peccatis suae gentis(베이스 아리아: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신 예수)

5. Eja, Mater, fons amoris(베이스 레시타티브와 합창: 사랑의 샘인 성모: 아카펠라)

6. Sancta Mater, istud agas(모든 솔리스트: 성모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아들의 상처를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7. Fac, ut portem Christi mortem(메조소프라노 아리아: 내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나누어지게 하소서)

8. Inflammatus et accensus(소프라노 아리아와 합창: 성모여 심판의 날에 나를)

9. Quando corpus morietur(4중창과 합창: 육신은 죽더라도 내 영혼은 천국의 영광을 입을 지어다)

10. Amen: In sempiterna saecula(아멘, 영원무궁토록: 합창)

 

스타바트 마테르 돌로로사(슬픔의 성모가 서 계시다)

 

◆ 조반니 타돌리니는 어떤 사람인가?

조반니 타돌리니(Giovanni Tadolini: 1789-1872)는 1833년에 로시니의 부탁으로 로시니가 병마와 싸우느라고 완성하지 못한 '스타바트 마테르'를 완성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 작곡가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로시니-타돌리니 합작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한번도 정식으로 연주된 일이 없다. 그래서 오늘날 타돌리니가 작곡한 곡들이 어떤 것인지 알수가 없다. 타돌리니는 오페라, 신포니아, 소나타, 실내악, 기타 수많은 종교음악을 작곡한 재능있는 음악인이었다. 그는 작곡가기면서 지휘자였고 성악교사였다. 볼로냐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성악가로서 이름을 떨치던 마테오 루비니에게서 성악을 레슨받았고 작곡은 볼로냐의 리체오음악원에서 스타니슬라오 마테이로부터는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그는 뜻한바 있어서 파리로 가서 이탈리아극장에서 연습지휘 겸 연습반주자로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814년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이탈리아로 돌아가 그후 15년 동안 볼로냐의 시립극장(Teatro Comunale di Bologna)의 작곡가 및 지휘자로서 일하며 지냈다.

 

타돌리니는 1827년, 38세의 노총각 때에 볼로냐에서의 제자인 소프라노 에우제니아 사보라니와 결혼하였다. 타돌리니는 부인과 함께 1829년에 파리의 이탈리아극장으로 돌아가서 자기는 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부인인 에우제니아는 소프라노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타돌리니의 결혼생활은 7년 후인 1834년 이혼으로 끝났다. 타돌리니는 부인과 이혼한후에도 5년 동안 이탈리아극장에 더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는 고향 볼로냐로 돌아가서 성악학교를 운영하며 여생을 보내다기 1872년에 당시로서는 고령인 83세에 요단강을 건너갔다. 그가 남긴 여러 작품 중에서 오페라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Le bestie in uomini(베니스의 테아트로 산 모이세. 1815) ● La fata Alcina(베니스의 테아트로 산 모이세. 1815) ● La principessa di Navarro(또는 Il Gianni di Parigi)(볼로냐의 테아트로 톤타발리. 1816) ● Il credulo deluso(로마의 테아트로 발레. 1817) ● Tamerlano(볼로냐. 1818) ● Moctar, gran visir di Adrianopoli(볼로냐의 테아트로 코뮤날레. 1824) ● Mitridate(베니스의 라 페니체. 1827) ● Almanzor(트리에스테의 테아트로 그란데. 1827. 대본은 펠리체 로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