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토리오의 세계/특별 오라토리오

'메시아' 대탐구 - 1

정준극 2012. 10. 24. 09:03

메시아(Messiah)

조지 프리데릭 헨델의 오라토리오

 

조지 프리데릭 헨델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메시아'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할렐루야' 합창은 알 것이다. '할렐루야' 합창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에 포함되어 있는 곡 중의 하나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제2부 수난에 나오는 합창곡으로 44번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누가 '메시아 44번'이라고 말하면 즉각 '할렐루야'라고 응답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거의 예외없이 '메시아' 연주회가 열린다. 그렇다고해서 '메시아'가 성탄절에만 국한된 오라토리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메시아'는 탄생(Incarnation 또는 예언과 탄생), 수난(Passion 또는 수난과 속죄), 부활(Resurrection 또는 부활과 영생)의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작품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부활절에도 '메시아' 연주회가 자주 열린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에 '할렐루야' 합창을 한다면 좀 이상할 것이다. 아무튼 '메시아'는 모든 오라토리오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비단 오라토리오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음악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그래서 세월을 초월하여 한없는 찬사와 존경을 받고 있다. 본 블로그는 기본적으로 오페라에 관한 정보의 장소이지만 기왕에 오라토리오도 포함하였으며 지금까지 베토벤의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하이든의 '천지창조' 등을 소개하였으므로 불멸의 오라토리오라고 하는 '메시아'를 지나칠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에 몇 회에 걸쳐 '메시아' 대탐구를 실시코자 한다. '메시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분들이라고 해도 이번 기회에 오히려 깊은 관심을 가져서 '메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토론토 멘델스존 합창단의 '메시아' 연주 음반. 소프라노 캐틀린 배틀, 알토 플로렌스 퀴바르, 테너 존 알러, 베이스 사뮈엘 레이미가 솔리스트로 나오며 앤드류 데이비스가 지휘하는 토론토 심포니가 연주했다. 토론토 로이 톰슨 홀에서의 연주였다. 음향이 뛰어난 연주회장이다.

 

'메시아'는 조지 프리데릭 헨델이 1741년에 작곡한 영어로 된 오라토리오이다. 텍스트는 챨스 제넨스(Charles Jennens: 1700-1773)라는 사람이 썼다. 부유한 예술애호가인 챨스 제넨스는 깊은 신앙심으로 종교음악을 위한 여러 텍스트를 작성한 사람이다. 그는 비록 헨델보다 15세나 나이가 어리지만 평소부터 친분이 두터워서 헨델을 위해 오라토리오 '사울', '이집트의 이스라엘'(Israel in Egypt), '알레그로, 펜세로소와 모데라토'(L'Allegro, il Penseroso ed il Moderato), '발샤짜르'(Balshazzar), 그리고 역사적인 저 유명한 '메시아'의 대본을 작성했다. 제넨스는 대본을 작성함에 있어서 킹 제임스 성서, 시편, 그리고 성공회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참고하였다. 헨델의 오리토리오 '메시아'는 영국이 아니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1742년 4월 13일, 부활절에 즈음해서 처음 공연되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1742년은 우리나라 조선의 영조시대이다. '메시아'의 런던 공연은 그로부터 약 1년 후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런던에서 우리의 '메시아'는 별로 뜨거운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 수록 놀라운 찬사를 받아서 오늘날의 '메시아'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메시아'는 헨델의 작품번호(HWV: Händel-Werke-Verzeichnis)로 볼때 56번이다.

 

헨델의 '메시아'가 역사적인 초연을 가진 더블린의 극장.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수 없다.

 

1685년에 당시 마그데부르크 공국의 할레(Halle)에서 태어난 헨델은 28세의 청년시절에 영국으로 건너와서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헨델이 영국 시민권을 가지게 된 것은 영국으로 온지 15년만인 1727년이었다. 그리고 기왕에 설명이 나온 김에 부연하자면 헨델의 독일식 이름은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이며 영국식 이름은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이다. 그러므로 Händel을 Handel 이라고 쓰면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헨델은 런던에서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를 작곡하며 경력을 쌓아갔다.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런던에 소개한 선구자였다. 이미 1711년에 발표한 리날도(Rinaldo)는 대표적이다. 그러다가 1730년대부터는 영국인들의 취향에 부응하여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메시아'는 그런 헨델이 여섯번째로 완성한 오라토리오였다. 헨델은 실로 '메시아'를 작곡하기 이전까지 영국에서 대단한 환대를 받으며 지냈다. 조지2세의 궁정으로부터 연금을 받은 것은 대표적인 사항이다. 이어 왕실채플의 작곡가로 임명되어 귀족에 부럽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 특히 예외적인 일은 런던의 유명한 유원지인 복스홀 가든스(Vauxhall Gardens)에 기념상이 세워진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기념상을 런던에서도 이름난 장소에 세워 준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런던의 이름난 공공 유원지인 복스홀 가든스에 있는 헨델의 조각상

 

그러다가 1730년대에 들어서서 사정은 바뀌었다. 대중들의 입맛이 이탈리아 오페라로부터 이른바 영국 스타일의 발라드 오페라로 바뀐 것이다. 1728년에 초연을 가진 존 게이(John Gay)와 요한 크리스토프 페푸슈(Johann Christian Pepusch)의 합작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는 영어로 된 발라드 오페라의 효시였다.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하여 은근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차에 친절하게도 누구라도 알기 쉬운 영어로 되어 있으며 영국의 민속음악이나 대중음악을 인용한 오페라가 나왔으니 환호할수 밖에 없었다. 실로 '거지 오페라'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비아냥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발라드 오페라가 인기를 끌자 헨델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티켓이 잘 팔리지 않게 되었다. 헨델의 오페라 제작에는 돈많은 귀족들의 지원이 절대적이었지만 귀족들마저 더 이상 헨델의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1730년에는 '귀족오페라단'(Opera of the Nobility)이라는 라이발 단체가 생기는 바람에 헨델로서는 더 곤란한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헨델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있는 돈 없는 돈까지 끌어모았지만 결국은 역부족이었다. 그러다가 대안으로 생각해 낸 것이 영어로 된 오라토리오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페라도 계속 추구하였다. 헨델은 1707-08년에 이탈리아에 있을 때에 이탈리아어로 된 오라토리오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당시에는 교황의 칙령에 의해 로마에서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이 일시 금지되었었다.

 

헨델이 영어로 된 오라토리오를 처음 만든 것은 '에스더'(Esther)였다. 1718년에 헨델을 후원하는 어떤 부유한 사람의 저택에서 공연되었다. 그러나 그저 그런 반응이어서 그 후로는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앞에서 설명한대로 오페라보다는 오라토리오로서 관심을 끌어야 겠다고 생각하고는 1732년에 '에스더'를 수정하여 헤이마켓에 있는 '왕의 극장'(King's Theater)의 무대에 올렸다. 5월 6일의 공연은 왕족들이 대거 참석하는 화려한 것이었다. 수정본 '에스더'는 대성공이었다. 이에 크게 힘입은 헨델은 두 편의 오라토리오를 더 썼다. '드보라'(Deborah)와 '아달랴'(Athalia: 역대하 22장)였다. 헨델의 세 오라토리오, 즉 '에스더' '드보라' '아달랴'는 1733년 여름에 옥스포드의 셀도니아극장(Sheldonian Theater)에서 함께 공연되었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왔다. 옥스포드의 대학생들은 돈이 없어서 5 실링의 입장권을 사지 못하자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까지 했다.

 

헨델은 구약성서 역대기(하)에 나오는 아달랴의 이야기를 오라토리오로 만들었다. 아댤랴는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딸로서 유대 왕 예로헴의 왕비가 되어 바알 우상을 섬기며 여호와를 섬기는 유대왕족들을 핍박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항거하여 아달랴를 죽였다. 그림은 '아달랴의 죽음'.

 

1735년에 헨델은 대본가인 챨스 제넨스로부터 '사울'이라는 새로운 오라토리오 대본을 받았다. 챨스 제넨스는 부유한 지주로서 음악과 문학적 소양이 많은 사람이었다. 헨델은 아직도 오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서 '사울'을 오라토리오로 만드는 것은 잠시 미루어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년 후인 1738년에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사울'을 완성하여 이듬해인 1739년 1월에 헤이마켓의 '왕의 극장'에서 연주회를 갖게 되었다. 따듯한 환영을 받았다. 헨델은 이어서 '이집트의 이스라엘'(Israel in Egypt)을 썼다. 이 오라토리오의 대본도 역시 제넨스가 쓴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집트의 이스라엘'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헨델은 먹고 살자면 아무래도 오라토리오에 더욱 신경을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이탈리아 오페라 중에서 마지막 작품이 되는 '데이다미아'(Deidamia)를 1741년 초에 단 세번의 공연을 마친 후에는 아예 오페라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오라토리오에 집중키로 했다. 그러던 중에 제넨스로부터 새로운 대본을 받았다. '메시아'였다. 헨델은 대본을 받아 보고는 너무나 감동하여 자기의 모든 재능과 열심을 다하여서 작곡하기로 작정했다.

 

3부로 된 '메시아'의 구조는 헨델의 3막으로된 오페라와 흡사하다. 프랑스 스타일의 서곡(신포니아)이 있고 아리아와 앙상블, 합창이 있으며 간주곡(파스토랄)도 있기 때문에 무대장치에 출연자들이 연기만 한다면 오페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다. 파트 1의 중간에 나오는 파스토랄은 '파스토랄 심포니'라고 부를 정도로 완벽한 형태의 것이다. 하지만 오라토리오이기 때문에 오페라처럼 연기를 해야하는 드라마틱한 형태는 아니다. 오라토리오 '메시아'에서는 성악가들이 주인공들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나오지 않는다. 그냥 솔리스트일 뿐이다. 또한 오페라에서처럼 서로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다. 레시타티브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리아를 장식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제넨스의 텍스트는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조명하는데 초점을 두었지만 그의 생애와 가르침을 드라마적으로 다루는 것은 원치 않았다. 다만 하늘의 뜻 즉,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비함을 선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파트 1 '탄생'(Nativity 또는 예언과 탄생)은 구약 선지자들에 예언한 대로 메시아의 오심과 동정녀에 의한 탄생을 다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천사들이 그 지경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나타나 기쁜 소식을 전한 사실은 누가복음의 기록을 기본으로 삼았다. 파트 2 '수난'(Passion 또는 수난과 속죄)은 그리스도의 수난(고난)과 죽음에 대한 내용과 부활과 승천에 대한 것을 다루었다. 이어 복음이 처음으로 온 세상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내용이 저 유명한 '할렐루야' 합창으로 집약된다.파트 3 '부활과 승천'(Resurrection and Ascension 또는 부활과 영생)은 구속(Redemption)에 대한 약속으로 시작하여 '심판의 날'(Day of Judgment)과 '모든 사람의 동시적인 일반 부활'(General Resurrection)에 대한 예언이 따르며 이어 죄와 죽음에 대한 최후의 승리와 그리스도에 대한 대찬미로 마무리 된다. 그런데 음악학자인 도날드 버로우스(Donald Burrows)라는 사람에 의하면 제넨스의 텍스트가 대체로 성서의 말씀을 너무나 비유적이고 은유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성서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사람들로서는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제넨스는 '메시아'의 공연때에 성서의 내용을 텍스트로 삼은 가사에 대하여 별도의 해설서를 프린트하여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헨델이 '메시아'를 그저 소규모의 성악과 기악을 사용하는 작품으로 작곡했다. 그해서 초기의 '메시아'연주는 소규모 합창단과 소규모 오케스트라가 등장했을 뿐이다. 그러나 헨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메시아'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문에 오케스트라 파트를 다시 편곡해야 했다. 모차르트도 오케스트라 파트를 대규모에 맞게 편곡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헨델의 오리지널 아이디어에 충실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소규모 합창단과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등장시키는 공연이 새로운 추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