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카를로(Don Carlo) - 돈 카를로스(Don Carlos)
주세페 베르디의 5막 그랜드 오페라
베르디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여러 버전이 있고 가장 공연시간이 긴 작품
돈 카를로가 아버지인 필립2세에게 칼을 겨누고 죽이고자 하고 있는 장면
'돈 카를로'(Don Carlo)는 주세페 베르디가 작곡한 5막의 그랜드 오페라이다. 독일의 위대한 시인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의 희곡인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스'(Don Karlos, Infant von Spanien)를 원작으로 하여 프랑스의 극장감독이며 대본가인 카미유 뒤 로클(Camille du Locle: 1832-1903)과 작가인 조셉 메리(Joseph Méry: 1797-1866)가 공동으로 프랑스어 대본을 썼다. 파리에서 초연될 때의 타이틀은 '돈 카를로스'였지만 이탈리아에서 공연될 때에는 이탈리아식으로 '돈 카를로'라고 바꾸었다. '돈 카를로'의 스토리는 스페인의 왕자인 돈 카를로스(Don Cárlos, Infante de España: 1545-1568) 의 기구한 삶에 대한 것으로 특히 그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프랑스의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Elisabeth de Valois: 1545-1568) 공주가 그의 아버지인 필립2세(Philip II: 1527-1598)와 어쩔수 없이 정략결혼하게 되자 이에 따른 번뇌, 그리고 스페인의 억압적인 통치를 받고 있는 플란더스(플랑드르)의 해방노력에 초점을 두었다. 돈 카를로 왕자와 엘리사베스 공주는 같은 나이이며 불행하게도 두 사람 모두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엘리사베스 공주와 스페인의 필립2세가 결혼하게 된 것은 합스부르크의 스페인과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가 벌인 이탈리아 전쟁(1551-59)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자 이와 관련하여 맺은 평화조약의 일환으로 결정된 것이다. 오페라 '돈 카를로스'는 1867년 3월 11일 파리오페라단의 살르 르 플르티에(Salle Le Peletier)에서 초연되었다. 파리오페라단이 베르디에게 '돈 카를로스'의 작곡을 의뢰했기 때문에 파리오페라단의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살르 르 블르티에는 1821년부터 1873년 화재로 파손되기까지 파리오페라단의 본부로서 말하자면 파리오페라의 센터였다.
'돈 카를로스'는 파리에서 초연된 이래 20여년에 걸쳐 여러번의 수정보완이라는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상당히 여러개의 버전이 생겨났다. 아마 베르디의 오페라 중에서 '돈 카를로스'만큼 여러 버전이 있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처음에 공연된 전체 5막과 중간에 발레까지 들어간 '돈 카를로스'는 삭제없이 공연한다면 약 4시간이 걸린다. 베르디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공연시간이 긴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너무 길기 때문에 이런 저런 삭제와 수정보완이 시행되었다고 보면 된다.
'돈 카를로스'가 초연된 파리오페라극장. 1873년 화재 이전의 모습이다. '돈 카를로스'는 1867년에 이 곳에서 초연되었다. 현재는 이 자리에 오페라(L'Oper) 또는 갸르니에극장이라고 불리는 파리오페라극장이 장엄하게 서 있다.
[초연 이전에 이미 수정]
베르디는 파리오페라극장으로부터 부탁받은 '돈 카를로스'를 1866년에 완성했다. 베르디가 53세 때였다. 하지만 이때에는 발레를 작곡하지 않은 상태였다. 베르디는 만일 파리 사람들이 좋아하는 발레를 추가한다면 전체가 너무 길기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아무래도 발레를 넣지 않을수 없어서 넣기는 넣되 다른 부분을 상당히 삭제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다음의 세 파트를 삭제했다. 즉, 4막 1장에서 엘리사베스와 에볼리의 듀엣, 4막 2장에서 로드리고가 죽은 후 카를로스와 필립의 듀엣, 같은 장면에서 군중들의 반란 중에 엘리사베스와 에볼리의 언쟁 장면을 삭제했다. 그런 후에 발레를 완성했다. 해가 바뀌어 1867년에 들어서서 더 이상의 삭제 없이 리허설에 들어갔다. 3월 11일의 공연일이 다가왔다. 그러나 일부를 삭제했지만 그대로 공연한다면 자정 전에 끝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돈 카를로스'의 작곡을 후원했던 사람들이 자정 전에는 파리 교외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야한다고 주장했다. 베르디는 하는수 없이 자정 전에 공연을 마칠수 있도록 하기 위해 즉석에서 다시 몇 장면을 삭제해야 했다. 우선 1막의 도입부로서 퐁텐블로 숲의 나무꾼들과 그들의 아낙네들의 합창, 그리고 엘리사베스의 등장 장면을 삭제했다. 이어 2막 1장에서는 비록 짧긴 하지만 로드리고의 솔로인 J'étais en Flandres(나는 플랑드르에 있었다)를 삭제했다. 그리고 2막 2장의 끝에서 필립 왕과 로드리고의 대화장면도 삭제했다. '돈 카를로스'의 초연에 즈음해서 출판된 스코어에는 이같은 베르디의 의향을 모두 반영하여 발레만 그대로 두고 이상의 모든 파트는 삭제한 채 출판되었다. 베르디는 초연 이후 파리를 떠나기 전에 파리오페라 당국에게 4막 2장에서 로드리고가 카를로를 대신하여 죽는 장면에서 필요하다면 공연을 끝내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그러므로 군중들의 항거 장면은 삭제되었다. 그래서 '돈 카를로스'는 더욱 단축되었으나 파리오페라 당국은 베르디가 이탈리아로 떠난 후에 후속 공연에서도 여러 파트를 더 삭제하였다. 이는 베르디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었다.
파리 초연에서의 1막 장면은 퐁텐블로 숲에서 엘리사베스와 카를로가 만나서 사랑을 다짐하였으나 그날밤 스페인과 프랑스의 평화협정에 따라 필립과 엘리사베스의 결혼이 결정된다는 내용이다. 사진은 퐁텐블로 숲에 사냥을 나온 엘리사베스 공주
[이탈리아어로의 번역]
18세기에도 대체로 그랬지만 '돈 카를로스'가 무대에서 선을 보이게 된 19세기 당시에도 유럽의 거의 모든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는 작품은 이탈리아 오페라였다. 이탈리아 오페라일뿐만 아니라 대본도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어서 대부분 나라에서는 이탈리아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오페라가 이탈리아산이기 때문에 그저 그런가보다 하며 관람하였다. 물론, 프랑스에서만은 예외였다.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프랑스어 대본으로된 오페라를 공연하였다. 아무튼 혹시라도 이탈리아 작곡가에 의한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가 프랑스어 대본으로 되어 있으면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이탈리아어로 번역되는 것이 당시의 상례였다. '돈 카를로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베르디가 '돈 카를로스'를 프랑스어로 완성하자 곧이어 이탈리아어로의 번역이 착수되었다. 이탈리아어로의 번역은 '돈 카를로스'가 파리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되기도 전에 이루어졌다. 아쉬유 드 로치에르(Achille de Lauzières: 아킬레 데 라우치에레스)라는 사람이 1866년 가을에 '돈 카를로스'의 대본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다. 이때에 '돈 카를로스'라는 타이틀이 이탈리아식으로 '돈 카를로'가 되었다. 그런데 베르디는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돈 카를로'가 앞으로 이탈리아에서 공연될 것으로 예상하고 제작자들에게 '돈 카를로'를 공연할 때에는 파리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었던 오리지널대로 전 5막을 공연할 것과 중간의 발레도 반드시 포함할 것을 사전당부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제작자들이 프랑스 스타일의 발레를 선호하지 않는다면 이탈리아식 발레로 대체해도 좋다는 의견도 첨부하였다. 다만, 발레를 넣을 경우에는 파리에서처럼 오페라의 막간에 넣지 말고 오페라를 시작하기 전이나 다 끝나고 나서 공연하도록 했다. 베르디는 프랑스 오페라에서처럼 발레를 막간에 넣는 것을 미개한 일이라면서 기피하였다.
베를린 도이치 오퍼의 공연. 카를로가 아버지인 필립에게 플란더스의 해방을 간청하고 있는 장면
그런데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돈 카를로'가 처음으로 공연된 것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런던에 있는 왕립이탈리아오페라하우스(Royal Italian Opera House)에서였다. 현재의 코벤트가든에 있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ROH)이다. 지휘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휘자 겸 작곡가인 마이클 코스타(Michael Costa: 1808-1884)가 맡았다. 마이클 코스타는 베르디가 '돈 카를로'를 작곡한 때보다 20여년 전인 1844년에 런던에서 쉴러의 극본을 바탕으로 오페라 '돈 카를로스'를 작곡한바 있다. 하지만 마이클 코스타의 '돈 카를로스'는 한때만 반짝이었을 뿐, 나중에 베르디의 거작이 나오자 그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했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쉴러의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스'를 원작으로 하여 베르디보다 앞서서 마이클 코스타라는 작곡가가 '돈 카를로스'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말했지만 실은 이외에도 몇 편의 오페라가 더 발표된 일이 있다. 1847년에는 이탈리아의 파스쿠알레 보나(Pasquale Bona: 1808-1878)라는 작곡가가 오페라 '돈 카를로'를 작곡했으며 1850년에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겸 지휘자인 안토니오 부쫄라(Antonio Buzzolla: 1815-1871)라는 사람이 역시 '돈 카를로'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안토니오 부쫄라의 '돈 카를로'는 당대의 대본가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의 대본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1862에는 시실리 출신의 작곡가인 빈센초 모스쿠짜(Vincenzo Moscuzza: 1827-1896)가 또 하나의 '돈 카를로'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베르디 이외의 다른 모든 '돈 카를로'는 베르디라는 거대한 햇빛에 가려서 제대로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그런데 마이클 코스타에 의한 런던 왕립이탈리아오페라하우스에서의 '돈 카를로' 공연은 베르디의 간절한 당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의 오리지널대로 전5막을 가감없이 공연한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을 삭제하거나 고친 것이었다. 즉, 퐁텐블로 장면이 나오는 1막은 삭제하였고 3막이 끝나고 나오도록 되어 있는 발레는 제외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리지널 1막에 나오는 카를로의 아리아인 Io la vidi(나는 보았도다)를 3막으로 옮겼고 필립 왕과 종교재판관의 듀엣은 단 네줄의 노래로 단축했으며 5막에서의 엘리사베스의 아리아는 중간의 한 부분과 반복부분(리프라이스)만을 살려 부르도록했다. 런던의 이탈리아어 초연은 성공이었다. 성공이라는 소식을 들은 베르디는 지휘자인 마이클 코스타에게 축하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베르디는 나중에 코스타가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내용을 삭제하거나 변경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대단히 화를 내고 코스타를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쨋든 베르디는 1882-83년에 '돈 카를로'를 또 다시 수정할 때에 코스타의 버전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어 대본의 '돈 카를로'가 이탈리아에서 처음 공연된 것은 1867년 10월 27일 볼로냐시립극장(Teatro Comunale di Bologna)에서였다. 베르디의 친구인 안젤로 마리아니(Angelo Mariani)가 지휘했다. 오리지널에 가까운 공연이었다. 발레도 포함하였다. 볼로냐 공연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나 어쩐 일인지 오래가지는 못했다. 베르디는 볼로냐 초연에 참석하지 못했다. 로마 초연은 이듬해인 1868년 2월 9일에 아폴로극장에서 있었다. 이때에는 교황청의 검열이 있었다. 검열 결과, 종교재판관은 대법관으로,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수도승 겸 카를로5세는 은둔자로 바꾸었다. 밀라노 초연은 그해 3월 25일에 있었다. 이어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경쟁적으로 공연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공연시간이 길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밀라노 이후의 공연들은 대부분 알아서 적당히 축소한 것이었다. 1871년에는 나폴리에서 공연되었는데 길고 지루하다고해서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실패였다. 나폴리 공연이 실패로 돌아가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은 베르디에게 1872-73년 시즌에 다시 공연하겠으니 제발 나폴리를 방문하여 조언 좀 해 달라고 간청했다. 나폴리에 온 베르디는 두 부분을 추가로 수정하였다. 하나는 2막 2장에서 필립 왕과 로드리고의 장면을 살리기로 하고 이 장면의 음악을 새로 작곡하여 넣은 것이다. 이 장면의 음악은 전에 파리 오리지널에 작곡해 놓은 것이 있었으나 삭제했었다. 그래서 새로 작곡한 음악으로 대체한 것이다. 음악을 추가로 새로 작곡했기 때문에 가사도 새로 만들어 넣어야 했다. 이 장면의 대본은 '아이다'와 '운명의 힘'의 이탈리아어 대본을 작성했던 안토니오 기슬란초니(Antonio Ghislanzoni)가 맡았다. 이 장면의 음악은 베르디가 '돈 카를로'에서 이탈리아어 대본으로 작곡한 유일한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5막에서 카를로와 엘리사베스의 듀엣을 삭제한 것이다.
발라돌리드 대성당 앞 광장에서의 종교재판 장면
사람들은 베르디에게 '이제 그만하면 되었으니 더 이상 수정이나 보완을 하지 말고 그것으로 확정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베르디는 "완벽하게 작곡을 하고 싶었지만 작곡을 마치고 나면 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나는 완벽을 향해 한 번 더 도전해볼 의무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스코어를 다시 들여다 보았다. 베르디는 그동안 '돈 카를로'의 스코어를 몇번이나 고쳤지만 만족할수 없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손을 대는 것은 안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런던에서 활약하고 있는 마이클 코스타가 자기 마음대로 수정삭제한 것을 극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베르디가 '돈 카를로'의 최종 수정본을 만들어야 겠다고 다짐한 것은 이탈리아어 버전이 이탈리아에서 초연된지 7년 후였다. 그러나 수정작업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15년이나 지났다. 1882년에 베르디는 파리에 있었고 이제는 수정작업을 해야할 때라고 생각했다. 베르디는 '맥베스' '운명의 힘' '아이다'의 프랑스어 번역을 맡았던 샤를르 루이 에티안느 누이터(Charles-Louis-Etienne Nuitter: 1828-1899)와 작업을 추진키로 결심했다. 누이터와 함께 '아이다'등의 번역에 참가했던 카미유 뒤 로클도 참여했다.
세 사람은 9개월동안 함께 머리를 맞대면서 프랑스어 대본을 꼼꼼이 재검토하는 등 '돈 카를로스'의 수정 작업에 본격 몰두했다. 그리하여 1883년 3월에 1막과 발레를 삭제한 4막의 버전을 드디어 완성했다. 곧이어 이 4막의 프랑스어 버전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새로운 이탈리아어 번역본은 이탈리아의 대본가 겸 시인인 안젤로 차나르디니(Angelo Zanardini: 1820-1893)가 마무리를 했다. 1866년에 아쉬유 드 로치에르라는 사람이 프랑스어 대본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던 것을 바탕으로 삼았다. 1883년의 수정본이 이탈리아에서 초연된 것은 1884년 1월 10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였다. 이것이 오늘날 잘 알려진 1883년의 밀라노 버전이다. 그런데 베르디는 1막을 삭제할 필요성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애써서 만들어 놓은 것을 그냥 사장하기가 너무 아쉬워서 밀라노 버전이 만들어진지 3년 후인 1886년에(우리나라에서 배재학당이 설립된 해) 모데나에서 '돈 카를로'를 공연한다고 하자 1883년의 밀라노 버전에 퐁텐블로의 1막을 살려서 공연한다는 조건으로 허락하였다. 다만, 발레는 삭제해도 좋다고 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악보출판사인 리코르디는 1866년의 모데나 버전을 '5막과 무발레의 새로운 에디션'이라면서 출판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연되고 있는 대표적인 버전이다.
돈 카를로가 펠리페 왕에게 플란더스로 보내달라고 탄원하고 있다.
[그 이후의 공연 기록]
20세기 초반에 돈 카를로/돈 카를로스의 공연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도 제작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2차 대전이 끝난 후부터는 세계 곳곳에서 자주 공연되기 시작했다. 거의 모두 4막짜리 1883년의 밀라노 버전을 무대에 올렸다. 그러다가 '우리가 모두 존경하여 마지않는 베르디 선생께서 작곡하신 것을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라는 자각이 퍼져서 오리지널 1막인 퐁텐블로 장면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1958년에 코벤트 가든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가 1866년의 5막짜리 버전을 당당하게 공연하여 그러한 취지에 앞장섰다. 그러자 다른 극장에서도 1866년의 모데나 버전을 공연하기 시작했고 더러는 음반으로 취입하였다. 대표적인 음반은 게오르그 솔티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취입한 5막의 버전이다. 챨스 매케라스(Charles Mackerras)는 한술 더 떠서 1975년에 잉글리쉬 내셔널 오페라(ENO)와 함께 런던 콜리세움에서 베르디의 파리 오리지널 스코어에 의한 공연을 지휘했다. 베르디가 마련했던 1막의 서곡도 포함하고 나뭇꾼 장면도 삭제하지 않은 그야말로 오리지널 그대로를 가지고 공연하였다. 다만, 대본은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오리지널 5막의 프랑스어 버전이 상당히 자주 공연되고 취입되고 있다. 1970년에 라 스칼라에서 플라치도 도밍고(돈 카를로)와 카티아 리키아렐리(엘리사베타)가 공연한 것과 1996년에 파리의 테아트르 뒤 샤틀레에서 로베르토 알라냐가 공연한 것은 대표적이다. 1973년에는 보스턴오페라단이 사라 컬드웰(Sarah Caldwell)의 지휘로 파리 초연에서 삭제되었던 파트들까지도 포함한 스코어로서 공연을 가진 일이 있다. 다만, 이 때에는 발레인 La Pérégrina(라 페레그리나: 순례자)를 포함하지 않았다. 발레까지 포함하여 아무것도 삭제하지 않은 진짜 오리지널 파리 버전은 2001년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이어 2004년에는 비엔나의 슈타츠오퍼가 공연하였는데 이것은 DVD로 제작되었다. 버트랑 드 빌리(Bertrand de Billy)가 지휘했다. 2006년에는 바르셀로나의 리체우가 '스페인의 자존심을 걸고 돈 카를로의 오리지널을 공연하자'는 생각으로 노컷 오리지널을 공연했다. 마우리치오 베니니(Maurizio Benini)가 지휘했다. 가장 최근의 공연은 2012년에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가 5막의 프랑스어 버전을 공연한 것이다.
[등장인물]
이제 등장인물들을 살펴보자. 필립2세(Bass: 필리페2세: 필리포2세: Philip II: Filippo II: 1527-1598)는 스페인의 왕이다. 샤를르5세(카를로5세: 챨스 5세: Carlo Quinto: Charles V: 1500-1558)의 아들이며 돈 카를로스의 아버지이다. 1867년 3월 11일의 파리 초연에서는 베이스 루이 앙리 오뱅(Louis-Henri Obin)이 필립2세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사족이지만 필리핀이라는 명칭은 필립2세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타이틀 롤인 돈 카를로스(돈 카를로: Don Carlos/Don Carlo: Ten.)는 스페인의 왕위계승자인 왕자이다. 파리 초연에서는 테너 장 모레르(Jean Morère)가 돈 카를로스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1884년 1월 10일 밀라노에서의 수정본 초연에서는 유명한 테너 프란체스코 타마뇨(Francesco Tamagno)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 나중에 오텔로의 타이틀 롤을 맡았던 테너이다. 로드리게(로드리고: Rodrique: Rodrigo: Bar.)는 돈 카를로스 왕자의 절친한 친구로서 포사의 후작(Marquis of Posa)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공주인 엘리사베스(Élisabeth de Valois: Elisabeth of Valois: Sop)는 처음에 카를로 왕자와 정혼하였으나 피치 못하게 필립2세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는 비운의 여인이다. 에볼리 공주(Infanta Evoli: Princess Evoli: MS)는 스페인의 왕족으로서 필립2세의 정부였으나 카를로 왕자를 사랑하는 여인이다. 오페라에 등장하는 종교재판관(Le Grand Inquisiteur: The Grand Inquisitor: 1513-1572: Bass)은 종교를 앞세워서 국왕보다도 높은 권세를 가지고 있는 에스피노사의 추기경인 디에고(Diego de Espinosa y de Arévalo)를 말한다. 그러나 오페라에서는 그런 설명이 없다. 수도승(Bass)은 카를로 왕자의 할아버지인 카를로스 5세의 혼령의 역할을 맡는다. 이밖에도 엘리사베스의 시종인 티보(Thibault: Tebaldo: Sop), 하늘의 소리(Sop), 프랑스를 방문한 스페인 사절단장인 레르마(Lerma)백작(Tenor), 엘리사베스 왕비의 시녀인 아렘버그(Aremberg) 백작부인(사일렌트)과 플란더스(플랑드르: 플레미쉬) 사절단, 종교재판관들, 궁정의 귀족과 귀부인들, 군중들, 시종들, 경비병들, 수도승들, 군인들 등이 대거 등장한다.
돈카를로(로베르토 알라냐)와 엘리자베스(마리나 포블라브스카야). 메트로폴리탄
[시놉시스]
이제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코자 한다. 5막에 걸친 대서사지적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으므로 아주 대략적으로만 설명코자 한다. 4막으로 된 스토리는 본 블로그의 33편의 오페라에 그나마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이를 참조하면 된다. 다음에 소개하는 줄거리(시놉시스)는 1866년에 모데나의 공연을 위해서 5막으로 수정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1867년의 파리 초연에서의 시높시스와 크게 다를바가 없는 것이지만 사소한 부분에서의 변경은 있는 것이다. 파리 초연 이후의 중요한 수정사항과 변경사항은 괄호 안에 설명했다. 중요한 아리아의 첫 소절은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 모두 소개했다. 주인공의 이름은 파리 초연에서 사용했던 프랑스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카를로스는 카를로로, 엘리사베스는 엘리사베타로, 로드르게는 로드리고 또는 포사(Posa)로, 필립 왕은 필리포2세 또는 필리페2세로 불러도 상관이 없다. 종교재판관(Grand Inquisitor)는 종교재판소장이라고 해도 관계가 없다.
필립 2세와 엘리사베스 왕비가 종교재판을 참관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1막. (1883년 버전에서는 1막이 삭제되었다.) 파리 근교의 퐁텐플로 숲이다. 겨울이다. 눈이 내려 있다. 서곡에 이어 나뭇꾼들과 그들의 아낙네들의 합창소리가 들린다. 가뜩이나 힘들고 지친 생활인데 스페인과의 전쟁 때문에 더 힘들다는 내용이다. 프랑스 앙리 국왕의 딸인 엘리사베스(엘리사베타) 공주가 시종들과 함께 등장한다. 엘리사베스는 사람들에게 스페인의 왕자인 돈 카를로스와 어쩔수 없이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자기의 결혼으로서 두 나라간의 전쟁이 끝나기를 바란다. (이 부분은 파리 초연 이전에 이미 삭제되었고 엘리사베스가 무대위를 가로 질러 나타나서 나뭇꾼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는 짧은 장면으로 대체되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카를로스가 나온다. 카를로스는 엘리사베스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고 사랑에 빠진다. 이때 카를로스가 부르는 아리아가 Je l'ai vue, et dans son sourire /Io la vidi, al suo sorriso(그녀를 보았도다. 그녀의 미소도 보았도다)이다. 엘리사베스가 다시 나타나자 카를로스는 일부러 자기를 레르마 백작이 이끄는 스페인 사절단의 일원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잠시후 카를로스가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자기의 심정을 고백하자 엘리사베스는 처음 만난 카를로스가 의외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므로 마음이 기쁘다. 카를로스와 엘리사베스의 듀엣이 De quels transports poignants et doux/Di quale amor, di quanto ardor 이다. 멀리서 대포소리가 들린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음을 나타내는 소리이다. 잠시후 엘리사베스의 시종인 티보(체발도)가 나타나서 엘리사베스에게 스페인의 왕비가 되었다고 하면서 축하한다. 조약에 따라 엘리사베스는 카를로스가 아니라 카를로스의 아버지인 필립2세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뒤이어 나타난 레르마 백작과 그의 일행들이 그렇다고 확인하며 스페인의 왕비가 되는 것을 받아 들이겠느냐고 다짐한다. 엘리사베스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어쩔수 없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엘리사베스는 스페인으로 떠나고 카를로스는 버림을 받은 듯 홀로 남아 있다.
2막. (2막은 1883년 수정에서 1막이 되었다.) 1장은 유스테의 성제로니모 수도원(San Jeronimo de Yuste: Saint-Just) 수도원이다. 수도승들이 카를로 5세(카를로 퀸토: Carlo Quinto: Charles V)의 영혼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카를로5세의 손자인 돈 카를로가 들어온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지금은 자기 아버지와 결혼하였기 때문에 번뇌에 넘쳐 있다. (1883년 버전에서는 카를로스가 1막에서 삭제되었던 Je l'ai vue/Io la vidi를 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음악과 가사가 수정되었다. 고쳐진 가사는 카를로스가 엘리사베스와 결혼할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인식하고 있는 내용이다. 오리지널 1막에서의 내용은 카를로스가 엘리사베스를 처음 보고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는 내용이다.)
카를로 5세의 모습을 닮은 어떤 수도승이 카를로스 왕자에게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평화로서 위안을 받으라고 말한다. 카를로스 왕자의 친구인 로드리게(로드리고: 포사의 후작)가 플란더스로부터 도착하여 카를로스를 만난다. 플란더스는 스페인으로부터 억압을 받고 있는 나라로서 현재의 네던란드와 벨기에에 있었던 지역이다. 로드리게의 아리아가 J'etais en Flandres(플랑드르에 있었다)이다. (이 부분은 파리초연을 준비하는 리허설 기간 중에 삭제되었다.) 플란더스에서 방금 도착한 로드리고는 카를로스에게 그곳 백성들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 주기 위해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카를로스는 지금은 다른 고민 때문에 플란더스 문제는 생각할 여유가 없다고 말하면서 실은 자기의 새어머니인 엘리사베스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고 털어 놓는다. 로드리게는 처음에는 놀라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카를로스에게 그렇다면 더군다나 스페인을 떠나서 플란더스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한다.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다지한다. 이 때 부르는 듀엣이 Dieu, tu semas dans nos ames/Dio, che nell'alma infondere(신이시여, 함께 살고 함께 죽으련다)이다. 잠시후 필립왕과 새 왕비인 엘리사베스가 시종들과 수행원과 함께 등장한다. 카를로 5세의 무덤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이다. 돈 카를로스는 퐁텐블로에서의 아름다웠던 사랑이 실종되었다고 믿어서 탄식한다.
2막 2장. 성 유스테 수도원 부근의 어떤 정원이다. 에볼리 공주가 일명 '베일의 노래'(Au palais des fées/Nel giardin del bello)라는 흥겨운 노래를 부른다. 무어왕이 베일을 쓴 어떤 아름다운 여인을 유혹하고 보니 자기가 무시하였던 왕비였다는 내용이다. 잠시후 엘리사베스가 들어온다. 로드리게가 엘리사베스에게 프랑스의 친정 어머니가 보낸 것이라며 편지를 전한다. 로드리게는 프랑스에서 온 편지와 함께 카를로스 왕자의 쪽지도 비밀리에 전한다. 로드리고는 L'Infant Carlos, notre espérance/Carlo ch'è sol il nostro amore(카를로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전하며 카를로스가 한번 만나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전한다. 엘리사베스는 카를로스를 단 둘이서만 만나기로 동의한다. 에볼리는 카를로스 왕자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믿고 있다.
'베일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에볼리 공주(메조소프라노 안나 스미로브나)
엘리사베스 왕비를 은밀히 만난 카를로스 왕자는 왕자는 엘리사베스 왕비에게 자기의 비참한 신세를 얘기하며 자기를 플란더스로 보내줄 것을 필립 왕에게 말해 달라고 부탁한다. 엘리사베스는 카를로스의 그러한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카를로스가 아직도 엘리사베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자 엘리사베스는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며 카를로스의 사랑을 거절한다. 엘리사베스도 번뇌로서 괴로워하고 있지만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카를로스는 엘리사베스가 자기의 사랑을 거절하자 극도로 절망하고 분노하여 떠나면서 자기는 저주를 받았음이 분명하다고 외친다. 곧이어 나타난 필립 왕은 엘리사베스 왕비가 홀로 있으며 아무도 시중을 들지 않는 것을 보고 화를 낸다. 필립 왕은 프랑스에서 함께 온 엘리사베스의 시녀인 아렘버그 백작부인을 프랑스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아렘버그 백작부인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 엘리사베스는 다만 아렘버그 백작부인과의 작별을 슬퍼하며 Oh ma chère compagne/Non pianger, mia compagna(오 나의 친구여 슬퍼하지 마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로드리게는 필립 왕에게 플란더스의 백성들을 억압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다. 필립 왕은 로드리게의 이상주의적인 요청을 비이상적이라면서 거절한다. 그러면서 종교재판관이 로드리게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필립 왕과 로드리게의 대화는 베르디가 세번이나 수정하였다. 그만큼 당시의 정세로서 예민한 내용이었다.)
펠리페 2세.페루치오 푸르라네토
3막. (3막은 1883년 버전에 따라 2막이 된다.) 1장은 마드리드에 있는 왕비의 정원이다. 저녁이다. 산 유스테 수도원의 카를로 5세 영묘를 참배하고 온 엘리사베스 왕비는 피곤에 젖어 있다. 하지만 곧 있을 필립 왕의 대관식에 집중해야할 입장이다. 그날 저녁에 있을 파티(Divertissement)를 피하기 위해 엘리사베스는 에볼리와 가면을 바꾸기로 한다. 에볼리가 왕비의 가면을 쓰고 있을 때 엘리사베스가 자리를 떠나지만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한다. (이 장면은 1883년 수정 때에 삭제되었다.)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필수 프로그램인 발레는 이 장면에서 등장한다. 초연에서의 발레는 La Pérégrina(순례자: The Pilgrim)이라는 타이틀이었다.)
정원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겠다는 메모를 받은 카를로스가 등장한다. 카를로스는 그 메모가 엘리사벳이 보낸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에볼리가 보낸 것이다. 카를로스는 가면을 쓰고 있는 어떤 여인이 왕비인 줄로 알고 그 여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가면을 쓰고 왕비처럼 보이는 여인은 에볼리이다. 에볼리는 카를로스가 자기를 왕비로 오해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말을 듣고 놀란다. 카를로스는 왕비가 아닌 다른 여인이 자기의 비밀을 알게 되어 순간 두려운 생각이 든다. 마침 로드리게가 들어온다. 에볼리는 로드리게에게 카를로스와 왕비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필립 왕에게 말하겠다며 위협한다. 로드리게는 왕비와 카를로스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칼을 빼어 들고 에볼리를 죽이고자 한다. 카를로스가 로드리게를 막는다. 에볼리는 복수하겠다면서 떠난다. 로드리게는 카를로스에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서류같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만일의 경우를 위해 자기에게 맡기라고 말한다. 카를로스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우정을 다짐한다.
3막 2장은 발라돌리드(Valladolid) 대성당 앞의 광장이다. 발라돌리드 대성당은 마드리드 교외에 있는 성당으로서 성모승천대성당(Catedral de Nuestra Señora de la Asunción)이라고 부르는 대성당이다. 이단자에 대한 화형(auto-da-fé: 원래의 뜻은 act of faith)이 준비되고 있다. 군중들이 몰려든다. 수도승들이 이단자들을 장작더미로 끌고 온다. 이어서 필립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등장한다. 그랜드 오페라의 진면목을 보는 듯한 장면이다. 이 때 군중들과 수도승들과 병사들이 부르는 합창이 Ce jour heureux est plein d'allgresse이다. 장엄한 합창이다. 카를로스가 여섯 명의 플란더스 지도자들을 데리고 등장하여 필립 왕에게 플란더스의 자유를 간청한다. 그러나 필립 왕은 오히려 플란더스 지도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카를로스가 참지 못하고 칼을 빼어 들어 아버지인 필립 왕에게 반항한다. 왕은 경비병들에게 카를로스를 체포하라고 명령하지만 경비병들은 감히 카를로스 왕자를 체포하지 못한다. 이때 로드리게가 앞으로 나와 카를로스에게 칼을 내려 놓으라고 설득한다. 카를로스는 깊이 믿고 있는 친구 로드리게가 왕의 편에 서서 자기에게 항복을 권하자 놀란다. 그러면서 혼자서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항복한다. 왕은 로드리게의 충성심을 보고 그에게 공작의 작위를 준다. 이어 이단자들을 처형하는 장작더미의 불길이 치솟는다. 그때 하늘로부터 저주받은 영혼들에게 평화를 약속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단자에 대한 화형장면은 쉴러의 원작에는 없는 내용이다.]
이단으로 판결받은 사람들에 대한 화형 장면
4막. (4막은 1883년 수정에서 3막이 되었다.) 1장은 마드리드에 있는 필립 왕의 서재이다. 동이 터오는 새벽이다. 필립 왕은 엘리사베스 왕비가 결코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자기는 영원히 사악한 인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탄식한다. 그는 에스코리알(Escorial)에 마련된 자기의 묘지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평안히 잠들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립 왕의 아리아가 Elle ne m'aime pas/Ella giammai m'amo(그여자는 나를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이다. 눈이 멀었고 더구나 90세나 된 늙은 종교재판관이 필립 왕의 부름을 받고 찾아온다. 필립 왕은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의 아들을 죽인다면 교회가 용서할 것인지를 묻는다. 종교재판관은 하나님도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문제가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그 대신에 로드리고의 목숨을 달라고 요구한다. 필립 왕은 그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친구인 로드리게를 죽일 수 없다고 거절한다. 종교재판관은 종교재판을 통하여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왕좌에서 내려오도록 할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종교재판관은 전에 다른 왕을 파멸시킨 일이 있다. 필립 왕은 자기가 로드리게를 구할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아침에 있었던 대화는 없던 것으로 하자고 간청한다. 종교재판관은 '그래요? 두고 보지요'라는 여운을 남긴후 방에서 나간다.
군중들의 항거를 뒤로하고 자리를 뜨는 필립 왕
엘리사베스가 필립 왕의 방으로 뛰어 들어오며 두려운 표정으로 보석상자가 도난 당했다고 말한다. 필립 왕은 왕비가 도둑 맞았다는 보석상자를 내 보이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카를로스 왕자의 초상화를 꺼내 보이고 왕비의 불륜을 비난한다. 왕비는 무고함을 항변하지만 왕이 간통죄는 죽음뿐이라고 위협하자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당황한 왕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사람들을 부른다. 에볼리와 로드리게가 들어온다. 필립 왕과 엘리사베스 왕비와 에볼리와 로드리게가 부르는 4중창이 Maudit soit le soupçon infâme/Ah, sii maledetto, sospetto fatale(아 이 얼마나 비참한 운명인가: 이 혐오스런 의심에 저주를)이다. 필립 왕은 자기가 왕비에게 잘못하였음을 인식한다. 로드리게는 감옥에 갇혀 있는 카를로스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에볼리는 엘리사베스를 배반한 것을 심히 후회한다. (이 4중창은 1883년에 베르디가 수정하였다.) (에볼리와 엘리사베스의 듀엣인 J'ai tout compris(모든 것을 후회한다)는 파리 초연 이전에 삭제되었다.
에볼리는 엘리사베스에게 자기가 보석상자를 훔쳐서 필립 왕에게 전달했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카를로스를 사랑하지만 그는 자기 대신에 엘리사베스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볼리는 그동안 필립 왕의 정부였다는 사실을 털어 놓는다. 엘리사베스는 큰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에볼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어느 곳으로든지 사라지던지 그렇지 않으면 수녀원에 들어가서 평생을 지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나간다. 홀로 남은 에볼리는 자기의 아름다움이 숙명적인 자만심이 되었음을 저주한다. 에볼리는 수녀원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전에 카를로스를 종교재판으로부터 구하기로 결심한다. 이 때에 부르는 에볼리의 아리아가 O don fatal/O don fatale(아름다운 운명)이다.
4막 2장은 카를로스가 갇혀 있는 감옥이다. 로드리게가 나타나서 카를로스에게 카를로스는 석방될 것이지만 자기는 죽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일전에 카를로스에게서 받아 간직하고 있던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서류들이 발각되어서 반역죄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로드리게의 아리아가 C'est mon jour suprème/Per me giunto è il di supreme(나에게 최후의 날이 왔소)이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로드리게에게 총을 쏘아 쓰러트린다. 로드리게는 죽어가면서 카를로스에게 다음날 엘리사베스가 산 유스테 수도원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친구인 카를로스가 플란더스를 구원하고 평화의 스페인을 다스리게 된다면 죽더라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로드리게가 계속하여 부르는 아리아가 Ah, je meurs, l'âme joyeuse/Io morrò, ma lieto in core(아, 나는 죽더라도 행복하오)이다. 로드리게가 숨을 거두자 필립 왕이 들어와서 아들인 카를로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말한다. 카를로스는 필립 왕에게 로드리게를 살해한 것을 비난한다. 그제서야 필립 왕은 로드리게가 죽은 것을 알고 슬픔으로 크게 울부짖는다. (이 장면에서 카를로스와 필립 왕의 듀엣은 파리 초연 이전에 삭제되었다. 베르디는 이 곡을 나중에 레퀴엠의 라크리모사(Lacrimosa)에 사용하였다.)
성당의 종이 슬프게 울리고 이어 엘리사베스, 에볼리, 종교재판관이 도착한다. 밖에서는 군중들이 카를로스의 석방을 요구하며 필립 왕을 위협하고 있다. 에볼리는 혼란 중에 카를로스와 함께 감옥을 빠져 나간다. 군중들은 필립 왕에게는 위협적이지만 종교재판관이 잠잠할 것과 왕에게 머리를 숙이라고 소리치자 그의 말을 두려워하여 순종한다. (파리 초연 이후, 어떤 공연은 로드리게가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베르디는 억압받는 백성들의 항거 장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1883년 수정에서 짧게나마 항거 장면을 넣었다. 그렇지 않으면 에볼리가 어떻게 카를로스를 구출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는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었다.)
5막. (5막은 1883년 버전에서 4막이 되었다.) 무대는 산 유스테 수도원이다. 달빛이 비치는 밤중이다. 엘리사베스가 카를로 5세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엘리사베스는 카를로스가 플란더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서 카를로스의 앞 일을 돕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엘리사베스는 죽음만을 바라고 있다. 엘리사베스의 아리아가 Toi qui sus le néant/Tu che le vanità(모든 것이 헛되도다)이다. 카를로스가 나타나고 두 사람은 마지막 작별을 고하며 훗날 하늘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다. 두 사람의 듀엣이 Au revoir dans un monde où la vie est meilleure/Ma lassù ci vedremo in un mondo migliore(더 나은 세상에서 우리 만나리)이다. (이 듀엣은 베르디가 두번이나 수정하였다.) 필립 왕과 종교재판관이 나타난다. 필립 왕은 카를로스와 엘리사베스가 함께 있는 것을 보자 오늘은 두번에 걸친 희생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종교재판관은 종교재판소가 맡은바 임무를 다 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약식 재판이 진행된다. (재판 장면은 1883년 버전에서 삭제되었다.)
카를로스는 하나님의 도움을 외친다. 카를로스는 경비병들이 체포하려하자 방어하기 위해 칼을 빼어 든다. 그때 갑자기 카를로 5세의 석관에서 어떤 수도승이 나타나 카를로스의 어깨를 부여 잡고서는 큰 소리로 '이 세상의 혼돈은 심지어 교회에도 있도다'라고 외친면서 '하늘에서만이 평안을 얻을수 있다'고 덧붙여 소리친다. 필립 왕과 종교재판관은 그 수도승의 음성이 선왕인 칼를로 5세의 것임을 알아채고 놀란다. 주위에 있던 모두가 충격을 받아 놀라서 소리를 지른다. 수도승/카를로 5세의 혼령은 카를로스를 석관 속으로 잡아 끌고 들어간후 석관의 뚜껑을 닫는다. 막이 내린다.
돈 카를로와 엘라지베스. 마리인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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