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돈 카를로스와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 (Don Carlos - Elisabeth de Valois)
베르디의 그랜드 오페라인 '돈 카를로/돈 카를로스'에 대하여 이해를 높이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두 주인공인 스페인의 돈 카를로스 왕자와 프랑스의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 공주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돈 카를로'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6세기의 스페인과 프랑스의 역사, 그리고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의 역사에 대하여 파악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그런 방대한 사항을 <나의 오페라 수첩 33편>에서 설명하기에는 곤란하므로 다만 역사 속의 실존 인물들인 두 주인공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코자하니 양해 바란다.
돈 카를로스(Don Carlos)
'돈 카를로스'. 알론소 산체스 코엘로(Alonso Sanchez Coello) 작품. 1558년.
쉴러의 희곡과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돈 카를로'로서 일약 그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돈 카를로스는 16세기에 살았던 스페인의 왕자이다. 1545년 7월 8일에 태어나서 23세라는 젊은 나이로 1568년 7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돈 카를로의 공식 타이틀은 아스투리아스 왕자(Prince of Asturias)이다. 아스투리아스는 스페인 북부 대서양에 면하여 있는 지역으로 16세기 당시에는 형식상으로 스페인 왕자가 통치하는 공국(Principality)이었다. 그러한 전통이 남아 있어서 현재에도 스페인의 왕자를 Prince of Asturias 라고 부른다. 마치 영국의 왕세자를 Prince of Wales(웨일스의 왕자)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스페인에서는 Prince of Asturias라고 불렀다. 그래서 카를로스를 Carlos of Asturias(아스투리아스의 카를로스)라고 호칭하기도 한다. 카를로스의 아버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으로서 스페인 국왕인 필립 2세이며 어머니는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으로서 포르투갈의 왕인 후안3세의 딸 마리아 마누엘라였다. 카를로스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여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또는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아무튼 카를로스는 23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에 의해 감옥의 독방에 갇혔다가 반년만에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같은 카를로스의 운명에 대하여 스페인에서는 '전설따라 삼천리' 스타일의 여러 스토리가 만들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렇지만 카를로스라는 사람이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가 죽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마치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것을 연상케 하는 스토리이다.
현재의 스페인의 '아스투리아스 왕자'인 필리페와 왕자비인 레티치아 오르티즈 로카솔라노(La princesa de Asturias: Letizia Ortiz Rocasolano). 키들도 참 크다.
스페인의 왕자, 아스투리아스의 카를로스는 마드리드에서 머지 않은 발라돌리드(Valladolid)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마리아 마누엘라는 카를로스를 낳은지 한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어린 카를로스는 고모의 손에서 자라났다. 그러는 사이에 아버지 필립2세는 영국의 메리 여왕과 잠시 결혼까지 했었다. 어머니 없이 자란 카를로스는 성격이 복잡하고 비뚤어져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변덕이 심했으며 한번 고집을 부리면 막을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더니 조금 더 나이가 들자 이번에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징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마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타난 여러가지 이상증세는 유전적일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카를로스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었다. 당시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도대체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결혼, 즉 근친교배는 세상에서도 유명했다. 예를 들어 카를로스는 친가, 외가 합쳐서 증조부와 증조모가 네명밖에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최소한 여덟명은 되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카를로스의 고조부모는 다른 집안 같았으면 최소한 16명이었을 텐데 여섯명뿐이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냐 할 것 같으면, 카를로스의 외할머니와 친할아버지가 형제자매사이라는 것이다. 카를로스의 외할아버지와 친할머니 역시 오빠와 누이사이였다. 그리고 증조할머니 중에 두명은 자매간이었다. 도무지 복잡해서(실은 너무 간단해서) 서로 촌수가 어떻게 되는 사이인지를 알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아무튼 이렇듯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근친결혼이 성행하였으므로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이상한 후손이 나오지 않을수 없었고 카를로스가 그에 속하였다고 할수 있다.
카를로스가 태어난 발라돌리드의 시내 풍경. 발라돌리드는 스페인 카스티야레온지방의 주도이다. 중세의 고도이다.
1559년, 그러니까 카를로스가 14세 때에 그는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앙리 2세의 큰 딸인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Elisabeth de Valois)와 약혼하였다. 그러나 엘리사베스는 이듬해인 1560년에 양국 간의 정치적인 문제로 카를로스와 결혼하지 못하고 카를로스의 아버지인 필립 2세와 결혼하였다. 대신에 카를로스에게는 다른 혼처들이 제시되었다. 첫번째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었다. 두번째는 프랑스의 앙리 2세의 막내 딸로서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의 동생인 마가레트 드 발루아였다. 세번째는 오스트리아의 안나 공주였다. 안나 공주는 필립 2세의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2세 황제의 딸로서 나중에 필립 2세의 네번째 부인이 되었다. 필립 2세는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와 결혼하고 나서 카를로스는 카스티유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였으며 3년 후에는 아라곤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였다. 이어 카를로스는 '황금양모기사단'(Order of the Golden Fleece)의 218번째 기사가 되었다. 카를로스는 네덜랜드의 섭정인 파르마의 마가렛(Margaret of Parma)과 가까운 사이로서 지냈다. 그래서 스페인의 영토로서 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에 있던 나라인 플란더스(플랑드르)의 독립해방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테너 호세 카레라스.
카를로스는 17세 때인 1562년에 계단을 내려가다가 굴러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카를로스는 그로 인하여 큰 상처를 입었다. 뇌가 손상되었다. 결국 두개골을 원형으로 절개하는 끔찍한 수술을 받았다. 당대 최고의 해부학자라고 하는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수술을 맡았다. 카를로스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회복되고 나서부터는 성격과 행동이 거칠어지고 무슨 행동을 할지 예측할수 없게 되었다. 카를로스는 사람들을 혐오 및 증오하기 시작했다. 특히 알바 공작을 증오했다. 알바 공작은 필립 2세가 카를로스에게 약속했던 자리인 네덜란드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사람이었다. 필립 2세는 카를로스의 정신상태가 문제가 있다고 믿어서 그런 중요한 지위에 임명하지 않았다. 그후 카를로스는 네덜랜드 출신의 에그몬트 백작과 연락을 하며 지냈다. 에그몬트 백작은 플란더스 반란세력을 이끄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카를로스가 스페인에 저항하는 플란더스의 세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카를로스는 아버지 필립 2세에 대한 반감과 혐오증을 보였다. 아버지 필립 2세가 자기와 약혼한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와 결혼하였으므로 반감이 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어느 때에 필립 2세가 사람을 직접 살해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부터 아버지에 대한 혐오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카를로스는 22세가 되는 1567년에 도저히 스페인에서 살기가 싫어서 네덜란드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카를로스보다는 나이가 어리지만 촌수로는 삼촌이 되는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Don Juan de Austria: Ritter Johann von Österreich: 1547-1578)이 이복 형인 필립 2세에게 밀고함으로서 좌절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이라는 사람은 카를로스의 할아버지인 카를로 5세의 서자이다. 카를로스의 아버지인 필립 2세와는 이복 형제간이 되는 사람으로 젊은 나이에 이미 스페인군 사령관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의 무대. 펠리페 2세와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
1568년 1월, 카를로스는 아버지 필립 2세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의 독방에 감금되었다. 카를로스는 그로부터 6개월 후에 독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의하면 아버지 필립 2세에 의해 독살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의 사학자들은 카를로스가 자연사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카를로스는 감옥에 있으면서 지나치게 불규칙한 식사습관을 가져 몸이 매우 여위고 허약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카를로스는 폭식을 하다가도 며칠 씩이나 물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카를로스는 외국 대사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베니스공국의 대사인 히에로니모 소란초라는 사람은 카를로스가 '못생기고 혐오감을 갖게 하는 인상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어느때 카를로스가 살아 있는 동물들을 불에 태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자기 구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해서 그 구두를 만든 사람에게 구두를 먹으라고 강요했다고도 한다. 또 다른 베니스인인 파올로 티에폴로라는 사람은 카를로스가 공부나 운동은 하나도 하지 않고 오로지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에만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필립 왕이 카를로스를 감옥에 가둔 이야기는 1635년에 스페인의 유명한 작가인 페드로 칼데론 드 라 바르카(Pedro Calderon de la Barca)가 '인생은 꿈'(La vida es sueno)라는 소설의 바탕으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이름을 카를로스라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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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베스 드 발루아(Elisabeth de Valois)
1565년에 스페인의 후안 판토하 데 라 크루즈(Juan Pantoja de la Cruz)가 그린 이사벨 드 발루아(엘리사베스 드 발루아)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는 프랑스의 앙리 2세(Henry II of France)와 메디치의 카테리네(Catherine de' Medici)를 부모로 하여 태어난 프랑스의 공주이다. 프랑스에서는 Élisabeth de France(엘리사베스 드 프랑스) 또는 Élisabeth de Valois(엘리사베스 드 발루아)라고 하며 스페인에서는 Isabel de Valois(이사벨 데 발로이스)라고 불렀다. 1545년 4월 2일에 태어나서 1568년 10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유연인지 모르지만 카를로스와 같은 해에 태어나고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다만, 카를로스보다 석달 정도 후에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엘리사베스는 퐁텐블로 성(Château de Fontainebleau)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프랑스 왕실의 유아원에서 지냈다. 아버지인 앙리 2세는 장래 엘리사베스의 오빠와 결혼하게 될 스코틀랜드의 메리와 방을 함께 쓰도록 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는 엘리사베스보다 세살 위였다. 당시에 어린 메리는 이미 스코틀련드의 여왕이 되어 있어서 엘리사베스로서는 메리보다 지위가 낮았으나 두 사람은 오래동안 절친한 친구로서 지냈다. 엘리사베스는 메리나 동생인 마가렛보다 예쁘지 않았지만 어머니인 카테리네 왕비는 엘리사베스에게 가장 자상했고 엘리사베스를 가장 귀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엘리사베스는 그런 어머니에 대하여 어렵고 두렵게 생각했다고 한다. 엘리사베스는 부끄러움을 잘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엘리사베스가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떠나는 장면. 잘 보면 엘리사베스는 마치 상복과 같은 검은 옷을 입고 있으며 정신이 혼미한듯한 모습이다. 옆에서 시녀들이 그를 부축하고 있다. 프랑스의 외진 이사비(Eugène Isabey: 1803-1886)의 작품이다.
엘리사베스는 1559년, 그가 불과 14세 때에 스페인의 필립 2세와 결혼하였다. 필립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샤를르 5세(카를로 5세)의 아들로서 '가톨릭 필립'(Philip the Catholic)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가톨릭교회에 좋게 말해서 순종하는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해서 눈치를 보는 저자세의 사람이었다. 엘리사베스는 필립 2세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에 파리의 노트르 담 대성당에서 대리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인 필립 2세를 대리하여서는 스페인의 네덜란드군 사령관인 알바 공작이 참석했다. 필립 2세와의 실제 결혼식을 엘리사베스가 스페인에 도착하고 난 후에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서 거행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평화조약인 1559년의 Peace of Cateau-Cambrésis(캬토 캉브레시스)에 따른 것이다. 캬토 캉브레시스는 프랑스 북부에 있는 도시 이름이다. 당시에 필립 2세는 두번째 부인인 영국의 메리 1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새장가를 들어야 할 입장이었고 이에 따라 프랑스의 엘리사베스가 필립 2세의 세번째 부인이 된 것이다. 엘리사베스는 그림그리는 것이 취미였다. 다행히 결혼식에서 유명한 화가인 소포니스바 앙귀쏠라(Sofonisba Anguissola)와 안나 데 멘도자(Anna de Mendoza)를 만나 그로부터 남은 생애 동안 각별하게 지냈다. 엘리사베스는 아마추어 화가였다. 앙귀쏠라가 마드리드에서 엘리사베스의 그림 지도를 해 주었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엘리사베타(엘리사베스). 소프라노 휘오렌차 페돌린스. 라 스칼라 공연.
필립 2세는 14세 밖에 되지 않는 신부 엘리사베스에게 완전히 마음이 빼앗겼다. 그래서 그동안 정부로 지낸 여인과 당장 관계를 중단하기까지 했다. 일설에 의하면 에볼리 공주가 필립 2세의 정부였다고 하며 이같은 내용은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에도 언급되어 있다. 엘리사베스도 비록 남편인 필립 2세와 나이 차이가 많았지만 필립 2세가 잘 해 주는 바람에 아주 만족하여 지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17세였으니 사실상 별로 큰 차이는 아니었다. 엘리사베스가 친정 어머니인 카테리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멋있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 행운이다'라고 적은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필립 2세는 엘리사베스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기사들의 무술경기를 자주 열어주었다고 한다. 엘리사베스는 지체 높은 왕비였지만 필립 2세의 전처 소생인 카를로스 왕자, 시아버지 되는 카를로 5세의 사생아인 오스트리아의 후안, 역시 카를로 5세의 사생아 딸인 마가렛에게 마치 아랫사람처럼 순종하며 지냈다고 한다.
엘리사베스는 원래 필립 2세의 아들인 카를로스와 정혼하였으나 어쩔수 없는 정치적인 필요성 때문에 필립 2세와 결혼하였다. 엘리사베스는 결혼한지 4년후인 1564년에 임신하였으나 쌍둥이 여자를 유산하였다. 그러다가 1566년에 첫 딸인 이사벨라 클라라 에유제니아 공주를 낳았고 그 다음해에는 카테리네 미첼레 공주를 낳았다. 엘리사베스는 1568년에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 그날 세상을 떠났다. 신생아인 아들도 사망했다. 일설에는 출산후 한 달 지나서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다. 엘리사베스가 세상을 떠난 후 프랑스의 왕비이며 엘리사베스의 어머니인 카테리네는 필립 2세에게 엘리사베스의 동생인 마가렛을 부인으로 맞아 들일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필립 2세는 세상 떠난 부인의 여동생과 재혼하는 것이 성서와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며 거절했다.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는 토마스 오트웨이(Thomas Otway)의 희곡 '돈 카를로스', 프리드리히 쉴러의 희곡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스', 그리고 베르디가 쉴러의 희곡을 바탕으로 작곡한 오페라 '돈 카를로/돈 카를로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모든 작품들은 엘리사베스와 원래 약혼하였던 돈 카를로스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스토리로 삼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실제로 그런 비극적인 사랑을 했는지는 근거가 없다. 오히려 주위의 얘기는 엘리사베스가 필립 2세를 온전히 사랑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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