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카(Ulrica)와 아르빗슨(Arvidson)
실존 인물이었던 '가면무도회'의 점쟁이 울리카
1955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의 '가면무도회' 공연에서 울리카 역을 맡은 미국의 전설적인 콘트랄토 마리안 앤더슨. 흑인 성악가가 메트로폴리탄에서 주연급으로 등장한 것은 마리안 앤더슨이 처음이었다.
베르디의 모든 오페라 중에서 콘트랄토(또는 메조소프라노)가 주역급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가면무도회'와 '일 트로바토레'(아주체나)가 대표적이다. '가면무도회'는 크게 두가지 버전이 있다. 당시 당국의 검열 때문에 어쩔수 없이 등장인물들과 무대 배경, 그리고 시기 등을 고쳐야 했다. 잘 아는대로 베르디는 처음에 스톡홀름이 무대이며 구스타보 3세가 주인공인 '구스타보 3세'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나 당국이 암살 당한 국왕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으면 곤란하다고 하여서 우여곡절 끝에 '가면무도회'라는 타이틀로 완성하여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가면무도회'의 등장인물 중에서 여러 명의 이름도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구스타보 국왕은 리카르도라는 영국 식민지하의 보스턴 총독으로 변경되었고 점쟁이인 아르빗슨의 이름도 울리카로 변경되었다. 오페라 '가면무도회'는 1792년에 스웨덴의 국왕인 구스타브 3세(1746-1792)를 암살한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상 스토리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로 꾸며져 있다. 예를 들면 아멜리아와의 이루지 못할 로맨스, 점쟁이인 울리카의 예언 등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쟁이로 나오는 울리카는 실존인물이었다. 다만, 이름이 울리카가 아니라 안나 아르프빗슨이었다. 어떤 여인이었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안니 울리카 아르프빗슨의 초상화
아르프빗슨의 풀 네임은 안나 울리카 아르프빗슨(Anna Ulrica Arfvidsson)이다. 오페라 '가면무도회'의 오리지널 스웨덴 버전에 등장하는 점쟁이의 이름은 아르빗슨이지만 보스턴을 배경으로 삼아 수정된 버전에서는 울리카가 되었다. 짐작컨대 아르빗슨의 모델이 되었던 아르프빗슨의 중간 이름이 울리카이므로 비록 배경과 다른 주연급의 이름들은 영어식으로 고쳐졌지만 점쟁이의 이름은 스웨덴 식으로 울리카로 고수되었던 것 같다. 아르프빗슨은 1734년에 스톡홀름 인근에서 태어나 향년 67세로 스톡홀름에서 세상을 떠난 좋게 말해서 운명예언가, 그냥 말해서 점쟁이 여인이다. 아르프빗슨은 당시에 맘젤 아르프빗슨(Mamsell Arfvidsson)이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유명했었다. 울리카 아르프빗슨의 아버지는 왕궁의 관리원인 에릭 린드베리(Erik Lindberg)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왕궁의 주방장인 아르프비드 아르프빗슨이라는 사람과 재혼했다. 그래서 울리카의 성(姓)도 린드베리에서 아르프빗슨이 되었다. 울리카는 계부가 왕궁의 주방장이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스웨덴 상류층 인사들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과 가십을 많이 들으면서 자랐다. 그런 루머나 가십들은 실상 일반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꺼리들이었기 때문에 울리카는 그런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사실상 울리카 아르프빗슨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어느때인가 가출해서 지낸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신문에 집 나간 소녀인 울리카를 찾는다는 광고가 났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780년, 즉 울리카가 이미 중년에 접어든 46세 때에 운명예언가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울리카의 예언은 신용이 있어서 사회의 여러 계층 사람들이 울리카에게 와서 앞 일에 대한 예언을 들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쪽집게 도사였다. 점쟁이로서 울리카의 특기는 커피 잎들을 읽어서 운명을 점치는 것이었다. 물론 가끔씩은 카드 점도 보았다. 18세기 스웨덴의 구스타브 시대는 점쟁이들과 영매들이 크게 활동하던 시대였다.
울리카의 예언 장면
울리카 아르프빗슨의 비즈니스 장소는 스톡홀름의 요한니스교회에서 멀지 않은 래스트마카르가탄이란 곳에 있었다. 그의 집은 골목 길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그 지역은 가난한 사람들, 예를 들면 장님이나 불구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그에게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신분을 가리고 오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가 숨어서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결혼에 실패해서 도피한 여인이라고 믿었고 더러는 핀랜드에서 온 여자라고 알고 있었다. 울리카 아르프빗슨은 보조자로서 두 명의 하녀를 두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아프리카에서 온 여인이었다. 그래서 아르프빗슨의 생활이 이국적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그 흑인 여인을 모로코에서 온 기독교 세례를 받은 여인이라고 불렀다. 아르프빗슨은 귀족들 간에 인기가 많았다. 아르프빗슨의 점은 정확한 것으로 소문이 났고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여 점을 보러 왔다. 아르프빗슨은 사회 각계에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어서 많은 정보를 얻을수 있었다. 왕실에 대한 정보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왕실에서조차 아르프빗슨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구스타브 3세에 이어 왕이 될 샤를르 8세도 아르프빗슨으로부터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아르프빗슨은 경찰의 정보원으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1783년에 해군장교인 칼 아우구스트 에렌스배르드(Carl August Ehrensvärd)와 트롤레 제독이 변장을 하고 아르프빗슨을 찾아 온 일이 있다. 아르프빗슨은 커피 점을 보고 에렌스베르드가 트롤레 제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같은 예언은 당장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4년 후에 트롤로는 구스타브 국왕이 이탈리아를 방문한 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에렌스베르드가 제독에 임명되었다. 실은 구스타브 국왕은 만일 트롤레 제독이 세상을 떠나면 후임은 에렌스베르드를 임명한다고 이미 지시해 놓았다고 한다. 1786년에 구스타브 왕은 아무도 모르게 가장을 하고 야콥 드 라 갸르디 백작만을 수행원으로 하여 아르프빗슨을 찾아갔었다. 아르프빗슨은 구스타브 왕 뿐만 아니라의 수행원인 백작의 과거를 알아 맞히고 미래를 예언하였다. 특히 아르프빗슨은 왕에게 그날 밤에 가면을 쓰고 칼을 찬 사람을 만나면 각별히 조심하라고 말했다. 이같은 예언은 그날 밤에는 당장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6년 후인 1792년 구스타브 왕이 가면무도회에서 야콥 요한 앙카르스트룀 백작에게 살해 당한 것으로 실현되었다. 그런데 실은 그날 밤에도 심상치 않은 조짐이 있었다. 왕과 백작이 아르프빗슨의 집에서 나와 왕궁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 만난 사람은 왕의 처제인 쇠더만란드 공작부인의 방에서 나오는 이돌프 리빙이라는 사람이었다. 칼을 차고 있었다. 그가 나중에 구스타브 왕을 암살하려고 모의한 사람 중의 하나인 아돌프 리빙이었다. 아르프빗슨은 말년에 빈곤에 허덕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예언이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서 찾아오지 않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수입이 없어서 가난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두이스부르크의 공연에서 울리카가 리카르도의 손금을 보아주고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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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돈 카를로스와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 (0) | 2012.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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