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가면무도회'의 주인공 구스타브 3세(Gustav III - Gustavo III - Gustave III)
구스타브 3세. 1777년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가면무도회'(Un ballo in maschera)의 주인공인 실존인물이었던 스웨덴의 구스타브 3세였다. 구스타브 3세는 과연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가면무도회에서 자기가 신임하던 비서 겸 자문관인 앙카르스트룀이라는 사람에게 암살을 당했는가? 그리고 앙카르스트룀의 부인인 아멜리아와 사랑하는 사이였는가? 아르빗슨이라는 점쟁이로부터 죽음에 대한 예언을 들었는가? 이런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보도록 하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스타브 왕은 정치적인 이유로 신임하던 비서의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그로부터 13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구스타브 왕이 아멜리아와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얘기다. 베르디가 오페라 '가면무도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 얘기가 하일라이트로서 나올 뿐이다. 점쟁이 울리카(또는 아르빗슨)는 실존인물이었다. 다만 원래의 이름은 안나 울리카 아르프비드슨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구스타브 왕이 기장을 하고 아르프비드슨을 찾아가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아르프비드슨은 왕을 살해하는 음모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울리카(아르빗슨)의 예언은 오페라의 스토리와 어느정도 부합하는 것이다.
구스타브 3세 기념상. 스톡홀름 부둣가에 있다. 그가 암살 당한 오페라극장의 옆이다.
스웨덴의 근대역사에서 구스타브 3세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곤란하다. 계몽군주로서 이름 높았던 사람이다. 스톡홀름 왕궁의 옆에 있는 왕립스웨덴오페라극장(Operan)은 구스타브 3세가 설립한 극장이다. 구스타브 3세는 바로 그 극장의 회랑에서 암살자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런 역사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베르디가 오페라 '가면무도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구스타브 3세는 일약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름이 되었다. 그러면 실제로 구스타브 3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구스타브 3세는 1746년 1월 24일에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돌프 프레데릭 왕이었으며 어머니는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의 누이동생인 루이자 울리카(Louisa Ulrika)였다. 구스타브 3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스웨덴의 왕이 되어 1792년 암살될 때까지 21년간 왕으로 있었다. 1792년이라고 하면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의 다음 해이다. 우리나라는 조선 정조시대로서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려고 계획하던 때이다. 정조대왕이 화성행궁을 완성한 것은 1789년이었으니 그해에 지구의 한 쪽 스웨덴에서는 구스타브 왕이 이른바 유니온-보안법(Union and Security Act: Förenings- och säkerhetsakten)이란 것을 완성하여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하므로서 군주에 의한 전체정치의 바탕을 마련한 해였으며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프랑스에서 혁명이 시작되어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한 해라는 것이다.
스톡홀름의 왕립오페라극장. 구스타브 3세가 설립한 극장이다.
구스타브 왕은 계몽 전제주의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국가 예산의 상당부분을 문화진흥에 투입하였다. 구스타브 왕은 문화예술의 후원자였다. 그는 몇개의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그중에는 스웨덴 학술원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왕립오페라극장를 비롯한 여려 극장들을 건설하였다. 어찌보면 구스타브의 시대는 스웨덴 문화예술의 황금시기였다고 볼수 있다. 특히 오페라의 발전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 시기의 오페라들을 '구스타비안 오페라'(Gustavian Opera)라고 부른다. 그는 '바사훈장'(Order of Vasa)를 만들어서 스웨덴의 농업, 광업, 상공의 진보를 위해 혁혁한 기여를 한 사람들을 표창하였다. 그러나 정치에 있어서는 그다지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그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를 점령코자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 이번에는 러시아에 대한 전쟁으로 발트해의 해군력을 장악코자 했다. 그것도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과거에 이름을 떨쳤던 스웨덴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구스타브 왕은 볼테르의 찬미자였다. 그는 스웨덴에서 가톨릭과 유태교의 법적으로 인정하였다. 이와 함께 경제 자유주의를 목적으로 한 여러 개혁정책을 펼쳤다. 사회개혁도 추진하였다. 고문과 사형제도를 폐지한 것은 또 하나의 업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암살을 당한후 스웨덴은 실제 암살자인 야콥 요한 앙카르스트룀을 사형에 처하였고 다른 연루자들은 암살음모를 자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문을 하였다. 구스타브 왕은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지만 언론의 자유는 상당히 억압하였다.
구스타브 왕이 암살 당한 것은 1792년 3월 16일 그가 설립한 오페라극장에서의 가면무도회에서였다. 구스타브 왕의 암살사건은 프랑스의 외진 스크리브가 오페라 대본으로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다니엘 오버가 1833년에 '구스타브 3세'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리고 역시 외진 스크리브의 대본을 바탕으로 주세페 베르디가 1859년에 오페라를 만들었으나 당국의 검열로 인하여 등장인물들의 이름들이 변경되었고 또한 오페라의 타이틀도 '가면무도회'로 변경된 것은 다 아는 사항이다.
독일 하겐에서의 '가면무도회' 공연 장면. 피날레에 구스타브 왕이 앙카르스트룀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 있는 장면.
'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 > 집중탐구 150편 '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주세페 베르디의 '나부코'(Nabucco) (0) | 2012.12.19 |
---|---|
9. 빈첸조 벨리니의 '몽유병자'(La sonnambula) (0) | 2012.12.17 |
[참고자료] 울리카와 아르빗슨 (0) | 2012.11.10 |
8. 주세페 베르디의 '가면무도회'(Un ballo in maschera) (0) | 2012.11.09 |
[참고자료] 돈 카를로스와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 (0) | 2012.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