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위대한 대본가

카를로 골도니(Carlo Goldoni)

정준극 2012. 12. 16. 05:53

카를로 골도니(Carlo Goldoni)

18세기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대표적 대본가

 

18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대본가, 극작가, 시인인 카를로 골도니

 

카를로 골도니라고 하면 우선 '두 주인의 하인'(The Servant of Two Masters: Il servitore di due padroni)이라는 연극을 생각하게 된다. '두 주인의 하인'이라는 연극은 18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여러 지역에서 대단히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코믹한 드라마이다. 어찌나 재미난지 이 연극을 홍보하는 포스터를 보면 'one Servant, Two Masters, one Thousand Laughs'(하인 한명, 주인 두명, 웃음은 천번)이라고 적혀 있다. 그만큼 재미있는 연극이다. 실례의 말이 될지도 모르지만 만일 당시에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두 주인의 하인'이라는 코믹 연극을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였다. 카를로 골도니는 그렇게 유명한 연극의 대본을 쓴 극작가였다. 그는 생전에 약 250편의 극본을 썼다. 뿐만 아니라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부파를 위한 대본도 상당수 썼다. 골도니의 '두 주인의 하인'은 원래 연극으로 만들어진 대본이어서 그 아기자기하고 위트에 넘치며 우스꽝스러운 대사와 연기를 오페라로 표현하기에는 도무지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실은 많은 작곡가들이 오페라로 만들려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래도 자신들이 없어서 추진하지 못해왔다. 그러다가 최근에 미국의 비토리오 자니니(Vittorio Giannini: 1903-1966)라는 작곡가가 뜻한바 있어서 오페라로 만들어서 1966년에 뉴욕에서 처음 선을 보였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뱔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연극 '두 주인의 하인'의 피날레. 골도니의 대표작이다.

 

'두 주인의 하인'은 잠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가 최근에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2011년에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인 리챠드 빈(Richard Bean: 1956-)이 영국 국립극장을 위해 오리지널 극본을 새롭게 각색하였다. 인기 배우인 제임스 코든(James Corden)을 주인공으로 내 세우기 위한 손질이었다. 제목은 one Man, Two Guvnors 라고 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공연이었다. 2012년에는 런던의 웨스트 엔드로 갔고 이어 뉴욕의 브로드웨이로 진출했다. 2013년에는 호주의 아델라이에 페스티발과 멜본 극장 협회를 위해 호주를 순회공연한다.

 

카를로 오즈발도 골도니(Carlo Osvaldo Goldoni: 1707-1793)는 이탈리아 베니스공국 출신의 극작가이며 대본가이다. 골도니가 남긴 작품 중에는 오늘날까지 이탈리아에서 가장 사랑받고 가장 유명한 연극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골도니의 연극은 위트에 넘친 것이면서도 삶의 진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월을 초월하여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골도니는 사회의 중류층이 겪고 있는 삶과 분쟁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썼다. 그는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로 극본을 썼지만 베니스인 답게 베니스 사투리로 된 대사를 자주 인용하였다. 골도니는 Polisseno Fegeio, Pastor Arcade 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 이 말은 '로마의 아르카디아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자기가 자기에게 수여한 이름이다.

 

골도니는 1707년 2월 25일 베니스공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라고 하지만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약사였다. 골도니는 어릴 때부터 극장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의 부모들은 골도니가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골도니는 그저 밥만 먹었다 하면 극장으로 달려갔다. 집에 있을 때에도 그의 장난감은 인형극의 주인공 인형들이었다. 골도니의 아버지는 어쩔수 없이 그를 아주 엄격한 학교에 들여보냈다. 파비아에 있는 시슬리에리학교(Collegio Ghislieri)였다. 어찌나 엄격한지 머리는 수도승처럼 삭발을 해야 했고 옷도 수도승처럼 입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도니는 이 학교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코미디 극본들을 읽으며 지낼수 있었다. 골도니는 이 시기에 이미 극본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쓴 작품이 Il colosso(거상: 巨像)이라는 것으로 실은 파비아에 살고 있는 어떤 가문의 딸들의 행실에 대한 풍자시였다. 학교당국은 골도니의 이 작품을 보고 대노하여서 골도니를 퇴학처분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골도니가 퇴학을 당한 것은 그가 학교친구들과 함께 사창가를 찾아간 것이 들통이 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파비아를 떠난 그는 우디네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모데나에서 법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후 키오지아와 펠트레에서 법률사무소의 직원으로 취직해서 지내다가 심심해서 고향인 베니스로 돌아왔다.

 

이탈리아 정부가 발행한 카를로 골도니 기념우표

 

골도니는 베니스에서 변호사로서 정착을 하는듯 했다. 그러나 세살 버릇이 어디갈수 없는지 극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그토록 좋아하는 극장의 매니저가 되었다. 골도니의 아버지는 1731년에 세상을 떠났다. 골도니의 어머니는 그에게 어서 결혼하라고 매일 재촉을 했다. 골도니는 1732년에 원하지 않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밀라로로 갔고 다시 베로나로 갔다. 베로나극장의 매니저인 주세페 이머(Giuseppe Imer)라는 사람이 골도니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코믹 시인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주세페 이머는 골도니에게 니콜레타(Nicoletta)라는 아가씨까지 소개했다. 나중에 골도니의 부인이 된 여자이다. 그후 골도니는 아무래도 고향을 잊지 못해서 베니스로 돌아가 1743년까지 지냈다.

 

골도니가 극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Amalasunta(아말라순타)라는 비극으로부터였다. 밀라노에서 제작되었다. 하지만 이 연극은 호평을 받지 못하였고 경제적으로 손해만 잔뜩 보게 했다. 골도니가 '아말라순타'를 써서 극장감독인 프라타 백작에게 보여주자 백작은 '여보게, 프랑스에서는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여기서는 사정이 다르다네. 여기서는 배우들이 우선 좋다고 해야 한다네. 그러니 나보다도 먼저 배우들과 협의를 하게나. 그리고 오페라의 대본이라면 우선 작곡가와 무대장치 담당자와 협의를 하게나. 여기서는 모든 것이 순서가 있다네.'라고 말해 주었다. 골도니는 프라타 백작의 잔소리에 대하여 감사를 표시하고 여관으로 돌아와 난로를 가져오라고 하고 '아말라순타'의 대본을 불 속에 집어 넣었다. 골도니의 다음번 극본인 Belisario(벨리사리오)는 1734년에 쓴 것이다. '아말라순타'라는 것이 실패로 끝난데 비하면 그래도 조금은 성공한 것이었다. 하지만 골도니는 '성공은 무슨 성공이냐? 창피해 죽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 기간에 오페라 세리아를 위한 대본도 썼다. 그리고 한때는 베니스에서 가장 훌륭한 오페라극장인 산 조반니 그리소스토모(San Giovanni Grisostomo)의 문학감독을 지내기도 했다.

 

골도니의 고향인 베니스에 있는 기념상

 

그후에도 골도니는 비극을 몇 편 썼지만 머지 않아서 그의 주특기는 코미디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무대가 개혁을 필요로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몰리에르를 모델로 삼았다. 결과 1738년에 그의 첫 코미디인 L'uomo di mondo(세상의 인간)을 내놓았다. 그의 코미디는 점차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골도니는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자기의 코미디를 전파하느라고 바빴다. 그러다가 리보르토에 갔을 때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코미디만을 쓸 것이 아니라 극작가로서 본업을 삼아 생계를 꾸려나가야 겠다고 결심했다. 운이 좋으려는지 극장 매니저로 유명한 메데바크(Medebac)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메데바크는 골도니에게 베니스에 있는 자기의 극장을 위해 극본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골도니는 베니스의 다른 극장들을 위해서도 극본을 썼다. 골도니가 베니스에서 쓴 극본들은 그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뛰어난 작품들이었다. 1743년 경에는 완벽한 하이브리드 스타일의 극본을 썼다. 이말이 무엇이냐하면 몰리에르를 모델로 한 극본에 이탈리아의 코메니다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의 장점들을 살리고 여기에 골도니 자신의 위트와 성실성을 첨가한 극본을 말한다. La Donna di garbo(우아한 부인)은 골도니가 개발한 하이브리드 스타일의 첫 작품이다.

 

골도니는 1748년 이후 작곡가인 발라사레 갈루피(Baldassare Galuppi)와 협력관계를 다지게 되었다. 이로써 골도니는 새로운 형태의 오페라 부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갈루피는 골도니의 대본을 바탕으로 거의 20편 이상의 오페라 부파를 만들었다. 골도니의 오페라 부파 대본은 코미디에서와 마찬가지로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지방색이 넘쳐 있는 중류층의 실생활을 반영하여 종합한 것이다. 골도니가 제공한 대본으로 작곡한 오페라 작품 중에서 18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성공적인 뮤지컬 코미디는 갈루피가 음악을 붙인 Il filosofo di campagna(시골철학자: 1752)와 니콜로 피치니가 작곡한 La buona figliuola(착한 아가씨: 1760)이다. 1753년 볼로냐로부터 베니스로 돌아온 그는 그동안 그가 몸담았던 메데바크극장과 결별하고 벤드라민 가문이 운영하는 테아트로 산 루카(Teatro San Luca)로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는 1762년까지 그의 희곡들이 공연되었다.

 

1757년에 골도니는 극작가인 카를로 고찌(Carlo Gozzi)와 대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어찌나 심각한 논쟁이었는지 골도니는 그만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질려서 몇 년후인 1761년에는 파리로 옮겨가 살았다. 골도니는 파리에서 궁정작가의 직분을 받았으며 이탈리아극장(Theatre Italien)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렇게하여 그는 여생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때 쓴 극본들은 모두 프랑스어로 된 것이었다. 그는 비망록도 프랑스어로 썼다. 프랑스어 극본 중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Le bourre beinfaisant 라는 것으로 1771년 루이 16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뚜아네트의 결혼을 축하하여서 쓴 것이다. 골도니는 프랑스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며 지냈다. 그가 베르사이유에서 은퇴하게 되자 루이 16세는 그가 연금을 받도록 주선했다. 그러나 골도니는 프랑스 혁명으로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의회는 그럴수가 없다고 심의하여 1793년 2월 5일에 연금을 다시 주도록 결정했다. 골도니가 세상을 떠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연금을 주기로 결정한 다음 날에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자 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때 시인인 앙드레 셰니에(Andre Chenier)가 적극 나서서 '골도니의 미망인은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다. 올해로 76세나 된다. 남편인 골도니는 미망인에게 유산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남편은 그가 남편의 빛나는 이름과 덕성을 구할수 있는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가난을 남겼을 뿐이다'라고 주장하여 미망인이 연금을 타게 했다. [Her husband has left her no heritage save his illustrious name, his virtues and his poverty.]

 

파리의 노트르 담 근처에 있는 카를로 골도니의 기념상. 프랑스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골도니의 오페라 세리아,오페라 부파 및 인터메쪼의 대본은 다음과 같다.

 

[오페라 세리아] ● Amalasunta(1732) ● Gustavo(1738) ● Oronte, re de' Sciti(1740) ● Statira(1740)

[오페라 부파] ● La contessina(젊은 백작부인: 마카리: 1743) ● L'Arcadia in Brenta(브렌타의 아카디아: 갈루피: 1749) ● Il mondo della luna(달세계: 1750) ● Il filosofo di campagna(시골 철학자: 갈루피: 1752) ● Il mercato di Malmantile(말만틸레 시장: 피시에티: 1757) ● La buona figliuola(착한 아가씨: 니콜로 피치니: 1760) ● Lo speziale(약사: 요셉 하이든: 1768)

[인터메쪼] ● Le donne vendicate(여자의 복수: 1751)

 

하이든이 골도니의 대본에 의해 작곡한 오페라 '약사'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