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화제의 300편

토마스 아데스의 '파우더 허 페이스' - 15

정준극 2013. 1. 3. 13:30

파우더 허 페이스(Powder Her Face) - 그 여자의 얼굴에 분칠을(화장 고치기)

토마스 아데스(Thomas Adès)의 2막 실내 오페라

 

토마스 아데스

 

영국의 현대음악 작곡가인 토마스 아데스(Thomas Adès: 토마스 애더스라고도 발음함. 1971-)가 작곡한 2막의 실내 오페라 '파우더 허 페이스'(Powder Her Face)는 1960년대 세계적으로 커다란 스캔들을 뿌렸던 아르길 공작부인(Duchess of Argyll) 마가렛 캠벨(Margaret Campbell)의 실생활을 내용으로 삼은 것이다. 주인공인 마가렛 캠벨은 1963년에 아르길 공작이 제소한 유명한 이혼사건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지만 그보다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사항은 그가 챠탈레 부인은 잠시 저리가라고 말할 정도로 섹스의 화신이었다는 것이었다. 마가렛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것을 넘어서서 아주 교양있는 귀족부인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누군가와 섹스 관계를 갖지 않으면 안달이 나서 못견디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섹스에 대한 지나친 성향으로 수많은 남자들과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그로 인하여 '추잡한 공작부인'(The Dirty Duchess)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만일 당시에 24시간 뉴스 방송이 있었다면 아마 1주일 내내 마가렛 부인에 대한 이야기만 쏟아 부어도 모자랄 정도였을 것이다. 아무튼 대단한 물의를 일으켰던 여자였다. 세기의 섹스 스캔달 제조자였다.

 

마가렛은 전기공과 챔버메이스의 섹스 관계를 알면서도 모른채 하고 있다.

 

그런 마가렛 캠벨의 실생활을 내용으로 한 오페라이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지나치게 저속하고 야한 장면이 나온다. 출연자들의 연기도 성행위와 관련하여서 노골적이다. 음악에서도 섹스에 대한 표현이 지나치리만큼 등장한다. 마가렛이 어떤 남자와 호텔 방에서 오랄 섹스를 하는 장면의 음악은 악기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릴 낚시대에서 낚시 줄을 천천히 당겼다가 풀을 때에 나는 소리를 사용했다. '파우더 허 페이스'는 실내오페라이지만 캬바레 오페라라는 평도 들었다. 뉴욕 타임스는 나이트 뮤직(Night Music)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저널리스트이며 작가인 폴 그리피스(Paul Griffiths)는 '파우더 허 페이스'를 미래의 음악을 선도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이어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의 위풍당당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파우더 허 페이스'는 영국의 채널 4가 방송용 영화로 만들어서 1999년 크리스마스 날에 방송했다. 지나치게 난잡한 내용을 크리스마스 날에 방영했다고 해서 논란이 많았다. 이 영화는 DVD로 2005년 크리스마스 날에 발매되었다.

 

대본을 쓴 필립 헨셔

 

마가렛의 현란하고 복잡한 사생활에 대하여는 나중에 소개키로 하고 우선 토마스 아데스의 오페라에 집중하자면, 이 오페라는 비록 마가렛이라는 여인의 사생활을 그린 것이지만 대본을 맡은 사람이 스토리를 코믹하면서도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어찌 생각하면 스토리의 초점이 무엇인지 모를 지경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음악만은 그럴듯해서 '즐겁고 유쾌한 엔터테인먼트'라고 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역시 토마스 애더스다. 이 시대의 뛰어난 작곡가이다. 무언가 다르긴 다르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오페라 '파우더 허 페이스'의 음악은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것으로 빅 밴드로부터 스윙에 이르기까지 모든 스타일의 음악을 백화점 식으로 망라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알반 베르크, 이고르 스트라빈스카, 벤자민 브리튼, 쿠르트 봐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아스토르 피아쫄라(Astor Piazzolla) 스타일의 탱고 음악도 등장하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런데 작곡가인 토마스 아데스는 이 오페라의 음악이 슈트라우스로부터 슈베르트에 이르기까지 영감을 받았다고 표명했다. 세간의 평은 이 오페라가 유쾌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추잡하고 음란한 도덕불감증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래서 이 오페라의 광고문안에는 노골적인 섹스의 내용과 성인에게나 해당하는 내용이 나오므로 청소년 층에게는 부적합한 공연이라는 안내가 붙어 있을 정도이다.

 

오페라의 주인공인 된 아르길 공작부인 마가렛 캠벨.

 

'파우더 허 페이스'는 런던의 알미다 오페라(Almeida Opera)가 첼트넘 음악제(Cheltenham Music Festival)에서 공연하기 위해 토마스 아데스에게 위촉한 것이다. 영어 대본은 영국의 극작가, 소설가, 저널리스트인 필립 헨셔(Philip Hensher: 1965-)가 썼다. '파우더 허 페이스'는 1995년 7월 1일 첼트넘음악제에서 초연되었다. 첼트넘음악제는 1945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현대음악의 초연으로 유명하다. 마가렛 켐벨 역은 소프라노 질 고메즈(Gill Gomez)가 맡았다. 평판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음악에 있어서 오랄섹스(Fellatio)를 묘사한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그럴수가 있느냐는 비난을 받았다. 영국의 라디오 방송인 Classic FM은 '파우더 허 페이스'가 방송에 적합치 않다고 해서 방송을 하지 않았다. 초연이 있은 후에 이 오페라는 런던 알미다 극장에서 5회 공연되었다. 2006년 6월 8일에는 런던의 바비칸 센터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콘서트를 형식의 연주회를 가졌다. 뉴욕 시티 오페라는 2013년 2월에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에서 공연할 계획이다. 필리델피아 오페라단도 2013년 6월에 낸시 구스타프슨을 주역으로 삼아 공연할 예정이다. 이 오페라는 실내 오페라이므로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작다. 15명 정도의 멤버만 있으면 된다. 출연 성악가는 4명이다. 4명이 여러 역할을 맡는다. 주역인 마가렛만이 다른 역할을 맡지 않는다. 마가렛은 드라마틱 소프라노가 맡도록 되어 있다. 호텔 매니저는 베이스로서 공작, 세탁부, 호텔 손님등으로 나온다. 전기공은 테너로서 라운지에서 어슬렁 거리는 사람, 웨이터, 사제, 러버네커(캐묻기 좋아하는 남자), 배달소년으로 나온다. 호텔 하녀는 하이 소프라노로서 마가렛의 친구, 웨이트리스, 정부, 러버네커(캐묻기 좋아하는 여자), 사회면 기자 등으로 나온다.

 

소프라노 낸시 구스타프슨. 미국 공연에서 마가렛 역할을 맡는다. 일리노이주 에반스턴 출신이다.

 

'파우더 허 페이스'는 8개 장(章: Scene)과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마다 연도를 제목으로 삼아 넣었다. 1막. 1장-1990(호텔). 공작부인이 머물고 있는 웨스트 엔드에 있는 어떤 호텔 방이다. 전기공과 방청소 담당 여자가 공작부인에 대하여 야한 말투로 농담을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1930년대부터 유행하였던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가사는 공작부인을 조롱하는 내용이다. 두 사람이 계속 공작부인을 조롱하는 얘기를 나누고 노래도 부르는 중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공작부인이 방으로 들어온다. 공작부인은 남편인 공작이 곧 찾아올 것으로 생각하여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러면서 젊은 시절에 자기가 얼마나 아름다웠었는지를 회상한다. 잠시후 어떤 사람이 방문 앞에 도착한다.

 

2장-1934(시골 주점). 공작부인은 어떤 시골 주점에서 공작을 기다리고 있다. 공작부인은 아직 귀족과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세스 프릴링(Mrs Freeling)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주점의 라운지의 한쪽에서는 미세스 프릴링의 막역한 친구라는 여자와 라운지에 눌러 붙어서 지내는 사람이 최근에 있었던 프릴링씨와 미세스 프릴링의 이혼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고 있다. 라운지 단골인 그 남자는 공작부인을 위한답시고 노래를 한 곡조 부른다. 조금 전 장면에서 전기공와 청소부가 공작부인을 조롱하기 위해 부른 옛날 유행가이다. 잠시후 공작이 화려한 차림으로 도착한다.

 

호텔에 투숙중인 공작부인

 

3장-1936. 사제가 공작과 공작부인의 결혼식을 주관한다. 화려하고 사치스런 결혼 리셉션이다. 미세스 프릴링은 드디어 공작부인이 된다. 어떤 웨이트리스 한 사람이 이같은 부자들의 사치스런 생활방식을 무척 부러워한다. 4장-1953. 공작부인이 런던으로 간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이 열리는 시기이다. 공작부인은 호텔 방에서 룸 서비스를 부른다. 공작부인은 잘 생긴 룸 서비스 웨이터를 유혹한다. 오르가즘에 이를 순간에 카메라 플래쉬가 터진다. 하지만 공작부인은 사진을 찍는지를 모르는 것 같다. 공작부인은 웨이터에게 팁을 준다. 웨이터는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말한다. 5장-1953. 공작이 파티를 연다. 공작은 공작부인이 파티 장소를 떠나자 곧바로 자기의 정부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공작의 정부는 공작에게 공작부인의 수없는 스캔들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들을 얘기해 준다. 그 소리를 들은 공작은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공작부인의 물건들을 뒤진다. 그리고는 폴라로이드 사진 한장을 찾아낸다. 공작부인이 어떤 남자와 정사를 벌이고 있는 장면의 사진이다.

 

베니스 공연. 공작부인

 

2막. 6장-1955. 공작과 공작부인의 이혼에 대한 소송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든다. 가십꺼리를 캐묻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두 남녀가 이번 이혼소송과 관련하여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는지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고 있다. 판사는 최종 판결을 내리기 전에 우선 공작부인의 부도덕한 생활에 대하여 한마디 한다. 공작부인은 마치 자기방어를 하는 것처럼 애처로운 모습을 보이며 맨발로 떠난다. 7장-1970. 어떤 신문의 사회면 담당 기자가 공작부인이 장기투숙하고 있는 호텔 방에서 공작부인을 인터뷰한다. 공작부인의 대화는 도무지 종잡을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건강문제로부터 미용에 이르기까지, 그러다가 오늘날의 세상에 대한 비난의 말도 잊지 않는다. 그러는 중에 배달 보이가 모자상자들을 가져와서 탁자 위에 놓아둔다. 배달 보이는 공작부인에게 청구서를 내민다. 8장-1990. 다시 오프닝 장면의 연장이다. 공작부인이 머물고 있는 호텔 방을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호텔 지배인이었다. 지배인은 공작부인에게 숙박료를 지불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1시간 이내에 나가 달라고 말한다. 지배인이 돌아가자 공작부인은 자기의 어린 시절과 지금까지 지내온 생활들을 회상한다. 지배인은 공작부인이 호텔 방에서 나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온다. 공작부인은 조금 더 호텔에 머물기 위해 지배인은 유혹한다. 하지만 지배인은 공작부인의 유혹을 거절한다. 공작부인은 자기가 부른 노래를 취입한 음반을 튼다. 음반은 바늘이 직직 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공작부인은 하는 수 없이 방에서 나간다. 에필로그. 전기공과 방청소 담당 여자(챔버메이드)가 침대 아래에서 기어 나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그 방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아르길 공작부인 마가렛 캠벨

 

이제 시간이 있으므로 주인공인 아르길 공작부인 마가렛가 어떤 여인이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아르길 가문에 대하여 소개하자면 18세기로부터 근년에 이르기까지 수백년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가문이다. 그리고 아직도 영국에서 가장 권세가 있는 가문 중의 하나로서 행세하고 있다. 이 가문에 속한 공작, 후작 등은 16세기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스코틀랜드의 역사에 무시할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마가렛은 그런 가문의 공작 타이틀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여 공작부인이라는 호칭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국에서 아르길 공작부인이라면 여왕이라고 해도 무시하지 못하는 대단한 귀족부인이다.

아르길 공작부인인 마가렛의 원래 이름은 에텔 마가렛 위검(Ethel Margaret Whigham)으로 1912년에 태어나 1993년에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마가렛은 1963년 두번째 남편인 11대 아르길 공작과의 이혼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좋은 의미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이혼 재판과정에서 밝혀진 외설 사진과 수없는 스캔들로 유명했다.

 

베니스 공연 장면

 

마가렛의 아버지인 조지 헤이 위검은 스코틀랜드의 백만장자로서 특수재료를 개발하여 생산하는 셀라니스 회사(Celanes Corp.)의 회장이었다. 마가렛은 14년이라는 어린 시절을 뉴욕에서 보냈다.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않고 집에서 가정교사들이 교육을 맡았다. 마가렛은 처녀시절부터 뛰어난 미모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로맨스도 많았다. 돈많은 집 아가씨이므로 주변에 한량들이 많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가렛이 로맨틱한 관계를 가졌던 남자 중에는 파키스탄의 왕족인 알리 칸(Aly Khan) 공자도 있었다.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인 리타 헤이워즈의 세번째 남편이었다. 백만장자 비행사인 글렌 키드스턴(Glen Kidston)도 마가렛과 로맨틱한 관계를 가졌었고 자동차 세일즈맨인 마트린 슈틸만 폰 브라부스 남작, 출판계의 거물인 막스 애트킨(Max Aitken)도 포함되었다. 마가렛은 1930년, 18세 때에 런던의 왕실에 소개되었다. 말하자면 데뷔땅이었다. 영국의 귀족사회에 발을 디딘 그는 곧이어 7대 워위크 경(Earl of Warwich)인 챨스 기 펄크 그레빌이라는 사람과 약혼하였다.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약혼 발표였다. 그러나 결혼식을 성사되지 못하였다. 마가렛의 마음이 미국의 아마추어 골퍼인 챨스 스위니라는 청년에게 향했기 때문이다. 마가렛은 워위크 경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자기의 입장을 대신했다.

 

볼로냐 공연

 

마가렛은 21세가 되던 해인 1933년에 챨스 스위니와 런던의 브롬튼 오라토리오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챨스 스위니는 가톨릭이었다. 마가렛도 영국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2월 21일의 결혼식은 마치 세기의 결혼식을 보는 것과 같았다. 유명한 디자이너인 노만 하트넬(Norman Hartnell)이 디자인한 웨딩드레스가 우선적인 화제꺼리였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마가렛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그로인하여 킹스브릿지 일대는 3시간 동안이나 교통이 마비되었다. 마가렛은 전쟁전이나 전쟁후를 막론하고 런던에서 가장 옷잘 입고 가장 글래머한 여인으로서 유명세를 치루었다. 마가렛은 하트넬과 빅터 스티벨(Victor Stiebel)의 단골이었다. 마가렛은 챨스 스위니와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두었다. 첫째 아이는 딸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사산하였다. 둘째 딸인 프란시스 헬렌은 나중에 10대 러틀랜드 공작인 챨스 맨너스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마가렛은 스위니와 1947년에 이혼하였다.

 

호텔 방에 들어선 공작부인(마가렛). 한쪽에 있는 침대에는 전기공과 챔버메이드가 있다.

 

 

1943년에 마가렛은 런던의 본드 스트리트에 있는 수족전문 병원에 갔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져서 거의 죽을뻔 했다. 40피트나 아래로 떨어졌다. 마가렛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엘리베이터 축이었다. 마가렛은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다. 그리고 미각을 잃었으며 신경에도 손상을 입었다. 엘리베이터 사고는 마가렛의 삶에 상당한 변화를 준 것이었다. 그런 몇년후에 남편 스위니와 이혼한 것도 그 여파의 하나였다. 마가렛은 그런 와중에서도 천성적인 연애 습관은 버리지 못했다. 마가렛은 첫 남편과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켄트 공작인 조지와 스캔들이 있었다. 켄트 공작은 유부남이었다. 마가렛은 이혼을 앞두고 텍사스 출신의 은행가인 조셉 토마스라는 사람과 약혼을 하였다. 그러나 조셉 토마스가 마가렛의 이혼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약혼은 없던 것으로 되었다. 마가렛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큐레이터인 데오도르 루소라는 사람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 마가렛은 그가 '매우 지성적이고 위트가 있으며 자신감에 넘쳐 있는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결혼에 성공하지 못했다. 마가렛의 어머니도 그렇지만 데오도르 루소의 어머니도 루소가 마가렛의 아이들의 계부가 될만한 자격이 없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마가렛은 비록 루소와의 로맨스가 성사되지 못하였지만 그 후로도 자주 만나는 사이로 지냈다. 마가렛은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인 조셉 슬래튼이란 사람과도 스캔들이 있었다. 조셉 스캔들은 나중에 재클린 케네디의 사촌과 결혼하였다.

 

로시니극장에서의 무대

 

마가렛은 1951년 3월, 11대 아르길 공작인 이안 더글라스 캠벨과 결혼하였다. 캠벨의 세번째 부인이었다. 마가렛은 '나는 재산이 있었다. 나는 외모가 뛰어난 편이었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사진사들의 대상이었다. 기자들은 나에 대하여 기사를 쓰기를 좋아했다. 나를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세계의 베스트 드레서 10인 중에 포함될 정도였다. 가수인 콜 포터가 부른 그의 히트 송인 You're the Top은 나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공작부인이라는 귀족 호칭을 갖게 되었고 스코틀랜드 고성의 여주인으로 지냈다. 나의 딸은 러틀랜드 공작과 결혼하였다. 나의 삶은 언제나 장미빛 같았다.'고 회상했다.

 

1963년에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든 아르길 공작의 이혼사건이 있었다. 아르길 공작은 부인인 마가렛의 부정한 행실을 문제로 삼으며 증거로서 마가렛의 누드 사진이 찍힌 폴라로이드를 내놓았다. 또 다른 사진은 마가렛이 얼굴이 찍히지 않은 어떤 남자와 오랄 섹스를 하는 장면이었다. 마가렛의 얼굴을 정확히 찍히지 않았지만 마가렛이 목에 걸고 있는 세줄 짜리 진주목걸이로서 그 여자가 마가렛이라는 것이 의심할수 없는 사실로 밝혀졌다. 소문에 의하면 그 얼굴 없는 남자는 국방장관인 던칸 샌디스(Duncan Sandys)라고 했다. 아무튼 그로 인하여 샌디스 국방장권은 내각으로부터 사임을 종용 받았다. 던칸 샌디스는 윈스턴 처칠 경의 사위였다. 법정에서는 마가렛이 엔조이했던 남자들의 리스트가 제시되었다. 무려 88 명이나 되는 리스트였다. 그중에는 2명의 장관과 3명의 왕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재판에서 판사는 '공작부인(마가렛)이 혐오스러운 섹스 행동에 빠져 들었다'고 코멘트했다. 그리고 아르길 공작이 요청한 이혼을 허락하면서 '아르길 공작부인은 완전히 성관계가 문란한 여인으로서 그의 성적 호기심은 수많은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이 만족될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볼로냐 무대

 

한편, 영국 정부는 폴라로이드 사진에 나온대로 아르길 공작부인과 오랄 섹스를 한 그 남자가 누구인지 은밀히 조사를 하였다. 다행하게도 오랄 섹스의 장면을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에는 상대방 남자가 쓴 것으로 생각되는 글씨가 남아 있었다. 비밀수사기관은  다섯 명의 후보자를 염두에 두고 그 글씨의 필적감정을 추진하였다. 윈스턴 처칠 경의 사위인 던칸 샌디스, 미국의 배우이며 2차 대전 중에는 해군의 영웅이었던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2세, 미국의 사업가인 존 코에인(John Cohane), 사보이호텔의 전공보담당자인 피터 콤(Peter Combe), 독일 과학자인 베르너 폰 브라운의 동생인 지기스문트 폰 브라운 등이었다. 조사결과 사진의 필적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2세의 것이라고 입증되었다.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2세는 재혼한 부인과 함께 오래도록 화목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마가렛은 당사자가 누구인지 끝까지 밝히지 않았으며 페어뱅크스 2세도 그런 루머를 완강히 부인하였다. 당국은 언론의 끈질긴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대상자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후에 사실상 오랄 섹스의 현장에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페어뱅크스 2세와 샌디스였다는 것이다. 샌디스는 당시 국방장관이었다. 마가렛은 나중에 '영국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빌릴수 있는 곳은 국방성 밖에 없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한편, 마가렛과 이혼한 아르길 공작은 1963년에 네번째 결혼을 하였다. 미국여자인 마틸다 코스터 모티머 헬러라는 여자였다. 아르길 공작은 1973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였다.

 

볼료냐 2010 공연 무대

 

마가렛은 비망록을 썼다. Forget Not 이라는 타이틀로 1975년에 출판되었다. 마가렛은 출판된 비망록을 보고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마가렛의 유복한 생활은 사양길로 접어 들기 시작했다. 마가렛은 마지막으로 런던에서 살던 집을 수리하여 관광객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오픈하였다. 그 집은 실은 일찍이 1935년에 마가렛의 부모가 새단장을 했기 때문에 보기에 훌륭했다. 마가렛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방탕한 생활고 분별없는 투자 등으로 재산이 빠져나갔다. 그리하여 마가렛이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실로 무일푼의 지경이었다. 1978년에 마가렛은 사방에 깔린 빚 때문에 어퍼 그로스버너 스트리트 48번지의 저택에서 호텔 방으로 옮겨 지내야 했다. 마가렛의 옆에는 하녀 한사람만이 있었다. 마가렛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호텔 숙박료마저 낼 돈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가렛의 자녀들이 어머니 마가렛을 런던의 어떤 요양원에 넣어주었다. 어느날 마가렛은 요양원에서 낙상을 한 후 그 여파로 1993년 7월25일 세상을 떠났다. 마가렛은 서리(Surry)의 브룩우드 공동묘지(Brookwood Cemetary)에 있는 첫 남편인 챨스 스위니의 묘지 옆에 안장되었다.

 

이 여자가 아르길 공작부인인 마가렛 캠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