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화제의 300편

헨델의 '무치오 스케볼라' - 17

정준극 2013. 4. 4. 10:46

무치오 스케볼라(Muzio Scevola)

헨델과 보논치니의 경쟁의 산물: 3막의 파스티치오

 

무치오 스케볼라 대리석 기념상. 타오르는 불 속에 오른 팔을 넣고 있는 장면

 

기원전 5세기경 로마제국의 용사인 무치오 스케볼라를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가 있다. 오페라 '무치오 스케볼라'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3백 년 전인 1721년 4월 15일 런던의 킹스 테아터에서 초연되었다. 1721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숙종의 뒤를 이어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해이다. 오페라 '무치오 스케볼라'는 꼭 집어서 누구의 작품이라고 말할수 없는 것이다. 세 사람이 합작하여 완성했기 때문이다. 조지 프레드릭 헨델, 조반니 바티스타 보논치오, 필리포 아마데이(또는 필리포 마테이)가 각각 한 막씩을 맡아서 작곡했다. 말하자면 파스티치오(또는 파스티셰)이다. 18세기 당시에는 파스티치오가 그런대로 유행했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합작하여 오페라를 만들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파스티치오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에 별도로 설명하였으므로 본 블로그의 왼편 하단에 있는 검색 창에서 파스티치오를 치고 클릭하면 그나마 자세한 내용을 알수 있다.] 오페라 '무치오 스케볼라'는 파스티치오는 파스티치오인데 문제는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가장 뛰어나게 작곡했는지를 심판하는 경연용이었기 때문에 일반 파스티치오와는 성격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조반니 바티스타 보논치니

 

오페라 '무치오 스케볼라'를 세 사람이 합심하여 작곡토록 하고 누가 가장 훌륭하게 작곡했는지를 심판하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그런데 세 사람 중에서 필리포 아마데이는 곁다리였고 실은 헨델과 보논치니의 두 사람에 의한 경연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필리포 아마데이는 전문 작곡가가 아니었다. 왕립음악원의 첼리스트였다. 그러므로 크게 관심을 둘 형편이 아니었다. 아마데이는 로마에 있을 때 헨델의 이탈리아 파트론 중의 한 사람인 오토보니 추기경에게 고용된 일이 있었다. 런던에 온 아마데이는 왕립음악원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간혹 작곡도 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밖에 없다. 예를 들어 헨델을 위해서 아르사체(Arsace)의 몇몇 파트의 음악을 작곡한 것이다. 그나저나 그는 '무치오 스케볼라'의 제1막을 작곡하였으나 도무지 헨델이나 보논치니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후로는 작곡에 손을 대지 않고 오로지 첼리스트로서만 활동했다.

 

조지 프레드릭 헨델

 

그러면 헨델과 보논치니는 왜 재능 테스트를 해야 했는가? 당시 영국의 오페라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하기야 오페라의 원산지가 이탈리아였으므로 수입하지 않을수 없는 형편이었다. 영국인들은 로마제국, 나아가 이탈리아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 때문인지 아무튼 이탈리아 오페라를 공연할 때면 잘 알아 듣지도 못하면서 이탈리아어로 공연했다. 그런 영국인지라 내친김에 이탈리아에서 작곡가들까지 수입하여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를 작곡하도록했다. 왕립음악원의 초청을 받은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킹스 테아터를 위해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를 부지런히 작곡해야 했다. 영국에서 활동 중인 수입작곡가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아무래도 헨델과 보논치오였다. 헨델은 누구나 아는 대로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이탈리아에 가서 공부하고 활동도 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작곡가라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입장이었다. 그런 헨델은 나중에 아예 영국으로 귀화하였다. 조반니 바티스타 보논치니(Giovanni Battista Bononcini: 1670-1747)는 본국 이탈리아에서 상당히 인기를 끌었던 작곡가로서 왕립음악원의 초청을 받아 1719년에 런던에 왔다. 보논치니는 이탈리아의 이름난 보논치니 가문의 일원으로서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로서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작곡가였다. 헨델과 보논치니는 모두 1720년에 런던에 신설된 왕립음악원의 전속작곡가가 되었다.

 

헨델보다 훨씬 나중에 런던에 온 보논치니는 헨델에게 있어서 만만치 않은 라이발이었다. 보논치니도 한 성질하는 사람이었다. 헨델이 이탈리아 풍의 오페라로서 대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자 자기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오페라를 만들고자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1720년 설립된 왕립음악원은 곧이어 그해 11월 19일부터 공연시즌을 시작하였다. 보논치니가 런던에 온 다음해였다. 왕립음악원의 시즌은 보논치니의 Astarto(아스타르토)로서 막을 올렸다. 대단한 환영을 받아서 놀랍게도 24회의 연속공연을 기록하였다.  보논치니에 대한 인기는 높아졌다. 그러다보니 보논치니의 성공은 헨델에게 적잖이 위협적이었다. 두 사람의 라이발 의식은 왕립음악원의 다른 교수들이 은근히 부추키는 바람에 더욱 확대되었다. 결국 두 사람의 라이발 관계는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우선 당시의 토리당과 휘그당이 오페라에 대한 견해가 달라서 서로 헨델이 훌륭하냐, 보논치니가 훌륭하냐를 놓고 분쟁을 일삼았다. 의원들이란 사람들이 밥 먹고 할 일들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보니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편이 갈라지게 되었고 이어서 왕실에서도 가만히 앉아 있기가 미안했던지 역시 두 편으로 갈라졌다. 그런데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헨델과 보논치니의 라이발 관계는 두 사람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들의 팬들이 발전시킨 것이었다.

 

수많은 오페라가 공연된 런던 헤이마켓에 있는 킹스 테아터. 경우에 따라서 퀸스 테아터, 히스 또는 허 머제스티스 테아터라고 불렀으며 한때는 이탈리안 오페라 하우스라고 불렀다.

 

조지 1세의 동생인 말보로 공작과 대부분의 귀족들은 보논치니를 후원하였다. 반면에 왕세자(Prince of Wales)와 그의 동료들은 헨델을 지지하였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조지 1세를 비롯한 궁정의 요인들이 헨델을 지지했다고 한다. 헨델에게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헨델이 독일인이기 때문에 독일 하노버 왕조의 출신인 조지 1세가 헨델을 각별하게 대우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정부의 요인들로서 조지 1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국왕의 권력남용이라고 간주하고 국왕이 부패했다는 선전용으로 이용했다. 헨델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왕세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세자는 헨델을 반대하는 것이 아버지 조지 1세에 대한 불효라고 생각해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반대파들에게 정신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렇듯 헨델과 보논치니가 정치적인 쟁점에 들어서게 되자 왕립음악원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서든지 결말 짓고자 하나의 아이디어를 냈다. 무치오 스케볼라에 대한 스토리를 내놓고 각자 음악을 작곡하게 만들어서 관중들의 심판을 받아 보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오페라 경연대회로서 라이발 관계를 해소하겠다는 음악원 교수들의 의도는 사실상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부채질하여 이번 기회에 외국인들을 추방해 버리자는 속셈도 도사려 있었다. 표면상으로는 무치오 스케볼라를 놓고 당대의 대가들이 공동으로 협력하여 오페라를 만든다는 그럴듯한 명분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공개경쟁의 형태였다.

 

'무치오 스케볼라'의 1막은 왕립음악원의 첼리스트이며 작곡가인 필리포 아마데이가 맡았다. 2막은 조반니 바티스타 보논치니가 작곡했다. 3막은 조지 프레드릭 헨델이 책임을 맡았다. 공연 결과, 헨델의 3막이 가장 뛰어나다는 판정을 받았다. '무치오 스케볼라'의 초연에서는 비록 헨델이 판정승을 거두었지만 두 사람의 라이발 관계는 그것으로 끝나지를 않았다. 두 사람이 왕립음악원에 재직하고 있는 내내 계속되었다. 그런데 1721년 4월 15일 킹스 테아터에서의 초연은 공연 도중에 왕세자비가 아들을 생산했다는 뉴스때문에 잠시 중단된 일이 있었다. 그날 태어난 아이는 나중에 컴버랜드 공작이 되었다. 컴버랜드 공작은 1746년 자코뱅 당에 대한 쿨로덴 전투(Battle of Culloden)에서 승리를 거두어서 영국의 영웅이 되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비우스'(Judas Maccabaeus)는 컴버랜드 공작의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된 것이다. '유다스 마카비우스'는 '보아라 용사 돌아온다'라는 합창으로 유명하다. 이 합창곡을 1884년에 스위스의 작가이기도 한 에드몽 버드리 목사가 부활절에 즈음해서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라는 가사를 붙였다. 우리나라 개신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 165장이다.

 

대본은 실비오 스탐필리아(Silvio Stampiglia)의 극본을 바탕으로 파올로 안토니오 롤리(Paolo Antonio Rolli)라는 사람이 이탈리아어로 만들었다. 스탐필리아가 Il Muzio Scevola 라는 타이틀의 대본을 쓴 것은 1665년이었다. 그로부터 꼭 30년 후인 1695년에 안토니오 롤리가 오페라 대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오페라의 대본은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신화 또는 마법과는 관련이 없다. 오히려 왕실에서의 음모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기본을 두었다. 헨델의 또 다른 오페라인 라다미스토(Radamisto)가 신화적 내용을 제외하고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것과 같다. 일설에 의하면 안토니오 롤리는 대본에 당시의 정치상황을 반영했다고도 한다. 안토니오 롤리는 하노버 왕조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제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다. 타이틀 롤인 무치오 스케볼라는 알토 카스트라토가 맡도록 했다. 포르세나(Porsena: B)는 에트루리다(Etruria)의 왕이다. 타르퀴니오(Tarquinio: S)는 로마의 왕이다. 오페라에서는 바지역할(en travesti)이다. 이레네(Irene: Cont)는 포르세나 왕의 딸이다. 클렐리아(Clelia 또는 Cloelia: S)는 무치오 스케볼라와 약혼한 여인이다. 오라치오(Orazio: 소프라노 카스트라토)는 로마군의 젊은 장교이다. 1721년 런던 초연에서는 타이틀 롤을 알토 카스트라토인 프란체스코 베르나르디 세네시노(Senesino)가 맡았으며 포르세나 왕은 베이스 주세페 마리아 보스키(Giuseppe Maria Boschi)가 맡았다. 그리고 클렐리아(클로엘리아)의 이미지는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두라스탄티(Margherita Durastanti)가 창조하였다.

 

1막(필리포 아마데이 작곡). 투스카니의 왕 포르세나는 포악한 정치 때문에 로마로부터 축출 당한 타르퀴니오와 동맹을 맺었다. 타르퀴니오의 사악한 음모를 알지 못하는 포르세나는 타르퀴니오를 오히려 높이 평가하여 로마의 왕좌를 다시 찾는 일을 도와 줄 것이며 그후 자기의 딸 이네레 공주와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레네는 로마의 젊은 장교인 오라치오와 비밀리에 장래를 약속한 사이이다. 이레네는 오라치오를 만나서 왕좌를 다시 차지하려는 타르퀴니오의 음모를 저지해 달라고 간청한다. 오라치오가 참가한 로마군과 포르세나-타르퀴니오의 동맹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된다. 오라치오는 수블리카 다리에서 적군을 마지하여 최후의 항전을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패배한다. 오라치오는 수블리카 다리를 불태우고 티베르 강으로 스스로 뛰어들어 자취를 감춘다.

 

2막(조반니 바티스타 보논치니 작곡). 로마의 젊은 전사인 무치오 스케볼라는 불같은 성격이지만 애국심은 자기보다 못지 않은 클렐리아라는 처녀와 비밀리에 약혼하였다. 무치오는 오라치오의 용감한 행동에 깊이 감동하여 자기도 로마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결심한다. 무치오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적진에 잠입하여 포르세나 왕을 암살코자 한다. 그러나 암살작전은 실패하고 무치오는 포로로 잡혀 포르세나 왕의 앞에 끌려온다. 무치오는 자기의 팔을 타오르는 불길 속에 넣어 로마를 침공한 적군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한다. 이 모습을 본 포르세나 왕은 무치오의 애국심과 용맹에 대하여 깊이 감동하여 무치오를 석방한다. 나중에 로마군과 투스카니군과의 전투에서 포르세나 왕은 갑옷을 입고 전투에 참가한 클렐리아를 사로 잡는다. 포르세나 왕은 클렐리아를 포로로 데려간다. 그러다가 어느덧 클렐리아의 거침없는 행동과 애국심에 감동하여 클렐리아를 사랑하게 된다.

 

무치오 스케볼라. 루벤스. 무치오가 페르소네 왕 앞에서 타오르는 불 속에 팔을 넣어 태운다.

 

3막(조지 프레드릭 헨델 작곡). 포르세나 왕은 클렐리아에게 만일 그의 사랑을 받아준다면 투스카니의 왕관까지도 주겠다고 하며 로마와 휴전을 하겠다고 제안한다. 클렐리아는 처음에는 마음이 동하였지만 무치오와 약혼한 것을 생각하고 포르세나 왕의 제안을 거절한다. 무치오가 클렐리아와 비밀리에 약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포르세나 왕은 무치오에게 클렐리아와의 사랑이 성사되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무치오로서는 자기의 목숨을 살려준 포르세나 왕의 부탁이므로 거절할 형편이 아니다. 번민하던 무치오는 마침내 포르세나 왕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한편, 티베르 강에 뛰어든 오라치오는 도망가서 지내다가 다시금 포르세나 왕에게 대적하기 위해 투스카니 진지로 찾아온다. 이곳에서 오라치오는 이레네 공주와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감동한다.

 

클렐리아는 무치오가 포르세나 왕의 부탁을 받고 자기를 설득하러 오자 두 사람 모두를 거부하고 로마를 위한 마지막 행동으로서 티베르 강에 몸을 던진다. 포르세나 왕은 너무나 당황하지만 클렐리아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한다. 포르세나 왕은 로마로 진군하여 로마를 점령한다. 모두들 로마에서 다시 만난다. 포르세나 왕은 클렐리아가 무치오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을 비로소 알고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두 사람의 결혼을 승락한다. 한편, 포르세나 왕은 딸 이레네 공주와 오라치오의 결혼도 승락한다. 모두들 행복하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무치오 스케볼라의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오페라와는 차이가 있다. 무치오 스케볼라의 로마식 이름은 가이우스 무치우스 스키볼라(Gaius Muzius Scaevola)이다. 기원전 508년에 로마와 클루시움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클루시움의 라르스 포르세나(Lars Porsena)왕은 로마를 포위하고 공성을 시작했다. 로마군의 젊은 장교인 무치우스는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적진에 잠입하여 포르세나를 죽이고자 했다. 그날은 병사들에 대한 급여일이었다. 단상에는 비슷한 복장의 두 사람이 병사들에게 무엇인가 얘기하고 있었다. 무치우스는 그 중 한명이 포르세나라고 생각하여서 칼을 빼어들고 돌진하여 그 사람을 찔러 죽였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포르세나의 비서였다. 무치우스는 당장 체포되었다. 무치우스는 포르세나에게 '나는 로마의 시민인 가이우스 무치우스이다. 나는 이곳에 나의 적을 죽이러 왔다. 나는 내가 그대를 죽이려고 온 것처럼 나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 로마인들은 용감하게 행동한다. 우리는 어떠한 난관이 닥치더라도 용감하게 고통을 받아 들인다'라고 거침없이 선포한다. 무치우스는 또한 자기는 포르세나를 암살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자원한 3백명 병사 중의 한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무치우스는 '영광을 바라보는 눈이 있는 남자들에게는 육체라는 것은 보잘것 없는 것일뿐이다라고 말하고 오른 손을 병사들의 화톳불에 집어 넣는다. 무치우스는 자기의 팔이 불에 타는 고통을 견디면서 로마인의 용감함을 보여준다. 포르세나 왕은 이 젊은이의 용감함에 큰 충격을 받아서 '돌아가라, 그대는 나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였다'라고 말하고 무치우스를 석방한다. 이와 함께 포르세나는 로마에 사절단을 보내어 평화조약을 맺도록 한다. 그로부터 무치우스와 그의 후손들은 스키볼라(Scaevola)라는 이름을 얻는다. 스키볼라라는 말은 '왼손'이라는 의미이다. 로마를 위해 오른 손을 희생하고 왼손만 남았다는 뜻이다. 무치우스는 티베르 강의 우안에 있는 토지를 하사받아 농사를 짓게 된다. 훗날 무치우스가 운영하던 농장은 무치아 프라타(Mucia Prata)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으니 '무치우스의 초원'이라는 뜻이다. 이상과 같은 무치우스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전설인지는 확실치 않다.

 

**********

 

포르세노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로마의 처녀들을 데리고 탈출하는 클로엘리아

 

라르스 포르세나와 로마의 인질인 클렐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인 Il trionfo di Clelia(클렐리아의 승리: 1762)의 바탕이 되었다. BC 508년에 체결된 로마와 클루시움간의 평화조약의 일환으로 포르세나는 상당수의 로마인들을 인질로 데려갔다. 인질 중의 하나가 클로엘리아라는 젊은 여인이었다. 클로엘리아는 로마의 처녀들을 이끌고 적진으로부터 탈출하였다. 클로엘리아는 말을 타고 탈출하였으며 티베르 강은 헤엄쳐서 건넜다고 한다. 분노한 포르세나 왕은 로마에게 클로엘리아를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로마로서는 들어 줄수 밖에 없었다. 클로엘리아는 다시금 포르세나의 진지에 가야했다. 포르세나 왕은 클로엘리아의 용감함에 크게 감동하여 인질로 잡혀 있는 로마인의 절반을 데리고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클로엘리아는 청년들만 선택하였다. 로마로 돌아가서 다시 적군과 싸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후 로마는 남자 영웅들에게만 부여하는 영예를 클로엘리아에게도 부여하였다. 비아 사크라(Via Sacra)의 꼭대기에 클로엘리아의 기마상을 높이 세운 것은 그러한 영예의 하나이다.

 

로마의 비아 사크라에 있는 클레올리아 기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