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

베르디의 고향 부세토

정준극 2013. 1. 19. 21:49

부세토의 베르디 발자취

2013년 베르디 탄생 200 주년을 맞이하여 부세토를 찾아가다

 

밀라노에서 동남쪽으로 약 140 km 떨어져 있는 부세토(Busetto)는 베르디와 많은 인연이 있다. 베르디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부세토와 부세토의 인근에는 베르디의 어린 시절, 청년 시절, 노년 시절을 모두 회상할수 있는 발자취들이 남아 있다. 그래서 베르디 팬들은 부세토를 메카로 생각하여 순례의 발길을 재촉한다. 부세토 부근의 작은 마을인 르 론콜레(현재는 론콜레 베르디)에서 태어난 베르디는 10여살 때에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부세토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 카를로 베르디는 어린 주세페 베르디의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보고 아무래도 음악가로서 길러야 할것이라고 생각했다. 베르디의 아버지는 아무 것도 없는 시골인 르 론콜레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으면 될 것도 안된다고 생각하여 어서 도시로 나가서 공부를 시켜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멀리는 못가고 가까운 부세토로 이사를 간 것이다. 부세토에 온 소년 베르디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정식 학교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대신 예수회가 운영하는 도서실을 찾아가서 음악 서적들을 읽으면서 공부했다. 마침 부세토에는 안토니오 바레찌라는 사람이 있었다. 상인으로서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안토니오 바레찌

 

바레찌는 음악 애호가였다. 부세토에서 아마추어 음악가들을 모아 '부세토 필아르모니카'라는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자기 집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베르디의 아버지는 어찌어찌 하다가 바레찌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바레찌는 베르디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인정하여서 부세토에서 음악선생님을 소개해주어 공부를 하게 해 주었고 교회에도 얘기를 해서 오르간 반주를 맡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밀라노에 가서 공부를 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해서 밀라노에 온 베르디는 밀라노음악원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하려고 했으나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기야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본이 부족하긴 했었다. 베르디는 작곡을 배우기 위해 몇 몇 선생님들을 찾아가 개인적으로 공부를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는 않았다. 베르디는 부세토에 돌아가서 아이들에게 음악이나 가르치고 교회에서 오르간이나 연주하며 지내기로 생각했다. 안토니오 바레찌는 부세토에 돌아온 베르디가 측은해서인지 또는 그를 높이 평가해서인지 아무튼 그가 조직해서 운영하던 '부세토 필아르모니카'(Busetto Filarmonica)의 지휘를 베르디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의 딸인 마르게리타(Margherita)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도록 요청했다. 아마도 속셈은 비록 가난하고 이름없는 베르디이지만 나중에는 위대한 음악가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시켜 사위로 삼는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베르디는 부세토에서 그렇게 지내면서 두 교회의 오르간 반주도 맡았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교회와 산 미켈레 아르칸젤로 교회였다.

 

부세토의 피아짜 베르디에 면하여 있는 카사 바레찌

                          

베르디는 드디어 23세 때에 바레찌의 딸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였다. 부세토 광장에 있는 연합교회의 성삼위일체 예배당에서였다. 마르게리타는 베르디보다 한 살 아래였다. 두 사람은 부세토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결혼한 이듬해에 딸 비르지니아가 태어났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년이 지나서 세상을 떠났다. 딸 비르지니아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 아들 이칠리오가 태어났다. 이칠리오도 1년이 지나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마르게리타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즈음에 베르디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와 오페라 작곡에 대한 계약을 맺고 첫 작품으로서 '오베르토'를 작곡하였으나 라 스칼라에서의 초연은 실패였다. 베르디는 로시니나 도니체티처럼 코믹 오페라를 만들어서 재기코자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왕궁의 하루'(Un giorno di regno)였다. 하지만 이것도 실패였다. 상심한 베르디는 다시는 작곡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부세토로 돌아갔다. 바로 그 해에 사랑하는 아내 마르게리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베르디의 첫 부인인 마르게리타 바레찌. 결혼 전에 베르디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라 스칼라의 매니저인 메렐리는 베르디를 전도가 유망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베르디에게 '나부코'의 대본을 주고 오페라로 만들 것을 거의 강요하다시피했다. 1842년의 '나부코'는 대성공이었다. 베르디가 '오페라의 황제'로 군림하게 된 첫 걸음이었다. 베르디는 마르게리타가 세상을 떠난 후 재혼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내고 있었다. '나부코'의 초연에서 아비가엘레의 이미지를 창조한 소프라노가 있었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로서 애칭은 페피나였다. 베르디는 페피나와 자주 만나다보니 정이 들기 시작했다. 베르디는 부세토에 집을 사서 페피나와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베르디가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로서 유명해지자 부세토 시당국은 베르디를 기념하기 위한 극장을 짓고자 했다. 그래서 생긴 것인 부세토의 '주세페 베르디 극장'이다. 베르디는 부세토에서 가까운 산타가타에 집을 하나 지었다. 그리고 부세토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그 집에서 살도록 했다. 베르디의 부모는 그 집에서 오래 살지는 않았다. 빌라 베르디라는 이름의 그 집은 베르디가 페피나와 함께 말년을 보낸 집이다. 페피나는 베르디와 결혼한 후 거의 40년 동안을 두번째 부인으로서 충실하게 살았다. 베르디는 1897년에 페피나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빌라 베르디에서는 거의 지내기 않고 밀라노에 와서 주로 그랜드 호텔에 머물면서 지내다가 바로 그 그랜드 호텔에서 1901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부세토에 있는 베르디 관련 장소들을 살펴보자. 성지순례의 첫 걸음이다.

 

■ 피아짜 베르디(Piazza Verdi: 베르디 광장). 부세토 중심지역에 있는 광장이다. 원래는 부세토 광장(피아짜 부세토)라고 불렀으나 1913년 베르디 탄생 100 주년을 기념하여 피아짜 베르디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베르디 광장의 주변에는 부세토 요새, 연합교회(Collegiate Church), 상가 등이 있다. 이 광장의 한 가운데에 루이지 세키(Luigi Secchi)가 제작한 베르디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1913년 베르디 탄생 100 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그해에 '주세페 베르디 극장'에서 토스카니니 지휘로 '활슈타프'의 공연을 하여 기금을 마련했다.

 

피아짜 베르디에 있는 베르디 동상

 

■ 카사 바레찌(Casa Barezzi). 베르디의 초기 후원자이며 장인이었던 안토니오 바레찌의 저택을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부세토 중심 광장의 주변에 있다. 부세토 성채(로카)를 바라보는 곳에 있다. 2층의 라운지는 1830년에 젊은 베르디가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서 연주를 했던 곳이다. 베르디는 바레찌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집에는 베르디의 처음 초상화, 그리고 바레찌의 모습을 스케치한 유화가 전시되어 있다. 베르디의 편지들도 전시되어 있다. 캇사 바레찌에는 '베르디의 친구들'(Amici di Verdi: Friends of Verdi)라는 단체의 본부사무실이 있다. 이 단체는 1979년과 1998년에 카사 베르디를 복구하고 수리하는 일을 맡아했다. 카사 바레찌에는 2001년부터 상설 전시실이 마련되었다. 베르디에 대한 자료들, 특히 베르디와 바레찌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카사 바레찌의 1층에는 콘서트 홀이 있다. 안토니오 바레찌가 프로베시라는 사람과 함께 1816년에 부세토 필아르모니카를 조직하여 연주회를 갖던 홀이다. 청년 베르디는 이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음악적인 지식을 높였다. 카사 바레찌의 모든 가구와 장식들은 오리지널이다. 비엔나에서 만든 토마셰크(Tomaschek) 피아노는 아직도 건재하다. 카사 바레찌에는 안토니 로코 스키퍼 수파(Antony Rocco Schipper-Suppa) 레코딩 라이브라리가 있다. 약 500편 이상의 오페라 전집이 소장되어 있다.

 

카사 바레찌(바레찌 하우스)의 홀

 

■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Santa Maria degli Angeli)교회와 산 미켈레 아르칸젤로(San Michele Arcangelo)교회. 청년 베르디가 오르간을 연주했던 교회들이다. 두 교회 모두 시내 중심가에 있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교회와 수도원은 1470-74년에 완성된 건물이다. 교회 내에는 귀중한 조각들과 프레스코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베르디는 이 교회에서 1836년 주현절에 오르간 연주회를 가졌다. 그날은 산바르톨로레오 대학교회의 합창지휘자 및 오르가니스트의 후임을 선정하는 날이었다. 베르디는 선임되지 못하였다. 베르디가 연주했던 오르간은 1908년에 트레보쪼 발티도네(Trevozzo Valtidone)교회에 기증되었고 그 교회에서 아직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교회

 

■ 오라토리오 델라 산티씨마 트리니타(Oratorio della Santissima Trinità: 성삼위일체 예배당). 23세의 청년 베르디가 1836년 5월 4일 22세의 마르게리타 바레찌와 결혼식을 올린 교회이다. 마르게리타는 청년 베르디의 음악활동을 후원해 준 안토니오 바레찌의 딸이다. 이 예배당은 산 바르톨로메오 대학교회에 부속되어 있다. 예배당의 내부에는 18세기에 만든 아름다운 스투코들이 있으며 화려한 색채의 대리석으로 만든 제단은 유명하다. 중앙제단에는 빈센초 캄피의 걸작인 '성아폴로니아와 루치아가 함께 있는 성삼위일체'라는 그림이 있다. 1579년에 그린 작품이다.  

 

오라토리오 델라 산티씨마 트리니타. 산바르톨로메오 연합교회에 속하여 있다. 이곳에서 베르디가 1836년에 마르게리타와 결혼식을 올렸다.

부세토의 베르디광장(피아짜 디 베르디)과 산바르톨로메오 연합교회

                   

■ 팔라쪼 올란디(Palazzo Orlandi). 베르디가 1845년에 매입한 집이다. 베르디는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1849-1851년의 2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았다. 두 사람이 아직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기 전이었다. 베르디는 이 집에서 '루이자 밀러', '슈티펠리오',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등을 완성했다. 신고전 양식의 이 건물은 1700년대와 1800년대에 활동했던 부세토 출신의 화가 겸 건축가인 주세페 카발리가 건축했다. 베르디는 이 집을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에게 팔았고 주세피나는 부세토의 빈민층을 위한 영구임대주택으로 제공하였다. 오늘날 이 집에는 베르디가 살았을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방이 있다. 모든 가구들을 그 당시의 것으로 마련했다. 베르디의 친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기념하는 전시물들도 있다. 토스카니니는 올란기 가족의 손님으로 이 집에 1913년부터 1926년까지 살았다.

 

팔라쪼 올란디 

                   

■ 테아트로 주세페 베르디(Teatro Giuseppe Verdi). 주세페 베르디 극장은 부세토의 베르디 광장(Piazza Giuseppe Verdi)의 한 쪽에 있는 성채 건물에 부속되어 있다. 로카 데이 마르케시 팔리비치노(Rocca dei Pallavicino)라는 성채 건물이다. 현재 이 성채 건물에는 부세토 시청이 들어 있다. 주세페 베르디 극장은 3백석의 작은 극장으로서 부세토시가 베르디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지은 것이다. 베르디는 이 극장의 건축을 위해 1만 리라를 기부하였다. 그러나 이 극장은 베르디의 사전허락을 받지 않은채 부세토시가 건축을 추진했다. 베르디는 '건축비가 너무 많이 들며 장래에 별로 사용되지 않을 극장'이라면서 건축을 반대했었다. 이 극장은 1868년 8월 15일에 오픈하였다. 성모승천축일이었다. 설계는 건축가 피에르 루이지 몬테키니(Pier Luigi Montecchini)가 맡았다. 1859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864년에 완공했다. 내부 장식은 파르마 출신의 비아시와 말펠리가 맡았다. 아름다운 천정 프레스코는 부세토의 화가인 조아키노 레비(Gioacchino Levi)가 맡았다. 천정에는 코미디, 비극, 멜로드라마, 로맨틱 드라마를 상징하는 메달리온이 장식되어 있다.

 

베르디 광장과 로카(성채). 이 건물에 '주세페 베르디 극장'이 있다.

 

오프닝의 기념 공연은 베르디의 '리골레토'와 '가면무도회'였다. 이 극장이 있던 장소에는 원래 작은 극장이 있었다. 그 옛 극장을 철거하고 새로 극장을 지은 것이다. 청년 베르디는 옛 극장에서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위한 교향곡을 지휘한 일이 있다. '주세페 베르디 극장'은 지금까지 1백 20여년을 지나면서 주로 베르디의 작품들만 무대에 올렸다. 베르디는 원래부터 이 극장의 신축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생전에 단 한번도 이 극장에 발을 디뎌 놓은 일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베르디는 심지어 오프닝의 기념공연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베르디는 부세토에서 고작 1.5 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산타가타(Sant'Agata)에서 살고 있었다. 이 극장의 2층에는 베르디를 위한 전용좌석(박스)가 마련되어 있지만 베르디는 이 극장을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1913년 베르디 탄생 1백 주년을 기념하여서는 이 극장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활슈타프'를 지휘했다. 이날의 공연은 부세토 광장에 베르디 기념상을 세우기 위한 모금공연이었다. 주세페 베르디 극장은 1990년대에 대폭 보수되었다.

 

주세페 베르디 극장의 오디토리움

 

■ 빌라 베르디(Villa Verdi). 부세토에서 가까운 마을인 산타가타(Sant'Agata)에 있는 저택으로 베르디가 1848년에 지은 집이다. 베르디는 집이 완성되고 나서 부세토에 살고 있던 부모를 모셔와서 살도록 했다. 베르디의 부모는 이 집에서 1851년까지 살았다. 그 후에는 베르디가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결혼하여 살았다. 베르디의 두번째 부인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이 집에서 1897년에 세상을 떠났다. 주세피나는 베르디보다 4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베르디는 주세피나가 세상을 떠난 후 거의 이 집에서 지내지 않고 밀라노에 나가서 주로 그랜도 호텔에 묵으면서 지내다가 그랜도 호텔에서 세상을 떠났다.

 

산타가타의 빌라 베르디 

빌라 베르디의 베르디 침실

 

■ 몬테 디 피에타(Monte di Pieta). 몬테 디 피에타는 부세토의 중심되는 광장(베르디 광장)의 한쪽에 있다. 몬테 디 피에타는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전당업과 자선사업을 병행하는 단체이다. 기 단체는 부세토 음악학교와 산 바르톨로메오 대학교의 교회음악 연구를 재정지원하였다. 이와 함께 불우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지급, 고등학교 교사들을 위한 지원 등을 수행하였다. 젊은 베르디는 이 단체로부터 3년 동안 장학금 지원을 받았다. 그래서 밀라노에서 작곡을 공부할수 있었다. 나중에 성공한 베르디는 이 기구에게 감사의 뜻으로 농장들을 매입하여 기증하였다. 몬테는 1768년 이래 공공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또한 건물의 한 쪽에 기념관을 만들어 놓고 몬테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설전시실로 꾸몄다. 전시실은 옛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다. 몬테 디 피에타는 1960년에 파르마의 카사 디 리스파르미오(Cassa di Risparmio)와 통합하고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세토 역사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보관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그중에는 부세토 필아르모니카(Busetto Fiarmonica)에 관한 자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베르디는 밀라노에 갔다가 부세토로 돌아와서 아마추어 단체인 부세토 필아르모니카를 지휘한 바 있다. 도서실에는 베르디의 첫 음악선생인 페르디난도 프로베시(Fernando Provesi)의 미출판 악보도 수백 편이 보관되어 있다.

 

가운데 건물이 몬테 디 피에타이다.

 

■ 빌라 팔라비치노(Villa Pallavicino)의 시립박물관. 부세토 중심지역으로부터 서남쪽에 위치한 빌라 팔라비치노는 일찌기 1815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오늘날에는 부세토 시립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빌라 팔라비치노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 건물을 팔라비치노 가문이 매입했기 때문이다. 카를로 5세가 1533년에 빌라 팔라비치노는 방문했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부세토시는 20세기 들어와서 빌라 팔라비치노를 시소유로 매입하고 옛 영광을 재현하는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도록 했다. 빌라 팔라비치노는 사각형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외부로부터는 교량을 통해 들어갈수 있다. 시립박물관은 1959년 문을 열었다. 전시품 중에는 베르디와 관련이 있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베르디가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에서첫 음악 레슨을 할 때 사용했던 스피넷(소형 어프라이트 피아노)이다. 이밖에도 몇 점의 베르디 친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17세기와 18세기의 도자기도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19세기에 가장 유명한 동양풍 화가인 부세토 출신의 알베르토 파시니(Alberto Pasini)의 작품들도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빌라 팔라비치노

                     

■ 산 바르톨레메오 연합교회(Chiesa di San Bartolomeo: San Bartolomeo Collegiate Church). 이 교회는 롬바르디 양식의 건물로서 1473년에 세워졌다. 이 교회에는 16세기와 17세기의 중요한 그림들이 보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빈첸초 캄피(Vincenzo Campi)의 '묵주의 신비'(The Mysteries of the Rosary) 등이다. 베르디의 첫 음악 선생인 페르디난도 프로베시는 1820년부터 1833년까지 이 교회의 합창지휘자 겸 오르가니스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밀라노에서 공부하고 있던 베르디는 프로베시의 후임이 되기 위해 공부를 중단하고 부세토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떠한 일반적인 공개경쟁도 없이 조반니 페라리라는 사람이 프로베시의 후임으로 선정되었다. 안토니오 바레찌가 단장으로 있는 부세토 필아르모니카의 멤버들은 이같은 결정에 대해 매우 분노했다. 부세토 필아르미모니카는 이 교회의 어떠한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부세토는 한동안 베르디 지지층과 반대층으로 나뉘어져 서로 얘기도 하지 않고 지냈다.

 

산바르톨로메오 연합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