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

베르디를 후원한 라 스칼라의 메렐리

정준극 2012. 12. 21. 10:34

바르톨로메오 메렐리(Bartoloemeo Merelli)

라 스칼라의 매니저 겸 작곡가 겸 대본가

'나부코' 성공의 배후 주역

베르디의 두번째 부인 스트레포니의 과거 애인

 

작곡가 겸 대본가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

 

라 스칼라의 매니저로서 20여년간을 활동해 온 바르톨로메오 메렐리(Bartolomeo Merelli: 1794-1879)는 젊은 베르디를 일약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로 이끌어 준 인물이다. 메렐리는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베르디를 격려하여 '나부코'를 작곡토록 했으며 그렇게 하여 완성된 '나부코'는 라 스칼라에서 대성공을 거두어 그로부터 베르디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어찌보면 베르디의 은인이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메렐리는 신용이 없는 사람이어서 나중에 베르디는 다시는 라 스칼라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메렐리와 인연을 끊고 지냈다. 하지만 메렐리와 멀리 지내게 된 진짜 이유는 메렐리와 내연의 관계에 있었던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가 베르디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

 

메렐리와 내연의 관계에 있다가 나중에 베르디와 결혼한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메렐리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흥행가이며 대본가이다. 그러면서 작곡가로서도 상당한 활동을 했다. 그는 라 스칼라의 매니저로서 1829년부터 1850년까지 오페라의 황금시기를 장식한 인물이다. 메렐리가 베르디를 처음 만난 것은 베르디가 겨우 26세의 약관이던 때인 1839년이었다. 훗날 베르디의 두번째 부인으로서 결혼한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당시에 메렐리와 그렇고 그런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아무튼 주세피나의 권유로 그해 봄에 베르디로서는 처음 작곡한 '오베르토'(Oberto)가 라 스칼라의 무대에 올려졌다. 사람들은 이 젊은 작곡가에게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베르토'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베르디는 실의에 빠져 있었다. 당시 라 스칼라의 매니저인 메렐리는 베르디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다.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테너 조르지오 론코니가 메렐리에게 '오베르토'의 음악이 훌륭하다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메렐리는 베르디에게 다음 시즌에 '오베르토'를 다시 공연하겠다고 제안했다. 다음 시즌의 '오베르토' 공연은 초연보다는 호응을 받았다. 메렐니는 '오베르토'의 리바이벌에 앞서서 베르디에게 몇군데 손질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2막 2장의 4중창이었다. 악보출판가인 조반니 리코르디가 '오베르토'의 판권을 샀다.

 

베르디의 첫 오페라인 '오베르토'의 무대. 풀 타이틀은 '오베르토, 산 보니파치오 백작'(Oberto, conte di San Bonifacio)이다.

 

베르디의 재능을 높이 인정한 메렐리는 베르디에게 3편의 새로운 오페라를 주문했다. 베르디는 이같은 요청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락했다. 첫번째는 '왕궁의 하루'(Un giorno di regno)였다. 불행하게도 대실패였다. 두번째가 '나부코'였다. 실상 '나부코'는 메렐리가 베르디보다 먼저 오토 니콜라이에게 작곡을 부탁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가 거절하는 바람에 베르디에게 대본을 주어 작곡토록 한 것이다. 1842년 베르디의 '나부코'는 상상외의 대성공이었다. 1843년의 '롬바르디'(I Lombardi)도 성공이었다. 메렐리는 베르디에게 오페라를 더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1845년의 '조반나 다르코'(Giovanna d'Arco)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조반나 다르코'는 메렐리가 라 스칼라에 있으면서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린 베르디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조반나 다르코'는 리허설 때부터 문제가 있었다. 배경과 의상이 적합하지 않았으며 오케스트라의 규모는 베르디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신문들은 '조반나 다르코'에 대하여 별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메렐리가 '조반나 다르코'의 악보 출판권을 베르디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리코르디에게 파는 협상을 벌였다. 분개한 베르디는 이제로부터는 다시는 메렐리, 또는 그의 스태프와 한마디도 얘기하지 않겠으며 또한 다시는 라 스칼라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메렐리는 그후 5년을 더 라 스칼라에 있었지만 베르디의 작품은 한번도 무대에 올리지 못했다.

 

오페라 '나부코'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무대. 메렐리가 베르디에게 나부코의 대본을 주고 작곡을 요청하자 베르디는 내키지 않아서 며철후에 대본을 메렐리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메렐리는 두말하지 않고 다시 그 대본을 베르디의 주머니에 쑤셔 넣어 주며 작곡을 하라고 강요했다. 집에 돌아온 베르디는 그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몇 달만에 나부코를 완성했다.

 

바르톨로메오 메렐리는 베르가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시몬 마이르(Simon Mayr)와 함께 작곡을 공부했다. 게타노 도니체티도 같은 클래스에 다녔다. 메렐리는 1812년 경에 밀라노로 와서 극장직원으로 일했고 동시에 마이르, 도니체티, 니콜라 바카이(Nicola Vaccai)등을 위해 오페라 대본을 썼다. 1826년에는 자기의 기획사를 차려 1830년부터 1835년까지 바레세, 코모, 크레모나 등에서 오페라 공연을 기획하고 주선했다. 그러면서 1836년부터 1848년까지는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 극장에 연관을 가지고 일했다. 그는 1829년부터 1850년까지 라 스칼라의 매니저로 있었다. 그 기간 동안에 그는 벨리니의 '노르마'를 무대에 올렸고 이어 도니체티의 여러 오페라의 초연을 담당했다. 메렐리가 무대에 올렸던 도니체티의 오페라로는 Ugo, conte di Parigi(파리스백작 우고), Lucrezzia Borgia(루크레치아 보르지아), Maria Stuarda(마리아 스투아르다), Gemma di Vergy(베르지의 젬마) 등이다. 또한 사베리오 메르카단테의 Il giuramento(맹세)와 Il bravo(브라보)도 무대에 올렸다.

 

나부코의 한 장면. 메렐리는 처음에 나부코의 대본을 프러시아 출신으로 밀라노에 와서 활동하고 있는 오토 니콜라이에게 주어 오페라로 만들어 달라고 했으나 니콜라이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베르디에게 대본이 돌아가게 되었다.

               

도니체티와 메렐리의 관계에 대하여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다. 두 사람은 모두 베르가모 출신이다.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래서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니체티는 가끔 메렐리에 대하여 임프레사리오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했다. 도니체티는 특히 메렐리가 1839년 가을에 자기와느 아무런 협의도 없이 Gianni di Parigi(파리스의 자니)를 공연하자 미친듯이 화를 냈다. Gianni di Parigi는 도니체티가 1832년에 완성했지만 아직 한번도 공연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후로 도니체티는 메렐리와 상종을 하지 않았다.

 

1848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메렐리는 오스트리아의 라데츠키 장군을 위해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라 스칼라를 그만 둔 메렐리는 비엔나에 가서 당분간 지냈다. 그후 1861년에 밀라노로 돌아와 라 스칼라의 매니저 역할을 다시 맡았다. 그러나 1863년에 어떤 연유인지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날리게 되자 모든 직책을 그만두고 고향인 베르가모로 돌아갔다. 그는 예술적인 감각이 예민했지만 돈 문제에 있어서는 신용을 잃어서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받았다. 그는 말년에 밀라노로 돌아와서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에우제니오도 역시 오페라 임프레사리오였다. 메렐리가 쓴 오페라 대본과 작곡자, 장르, 작성 연도는 다음과 같다.

 

○ L'idolo Birmanno(파올로 브람빌라: 오페라. 1816) ○ Lanassa(시몬 마이르: 멜로드라마 에로이코. 1818) ○ Alfredo il grande(시몬 마이르: 멜로드라마 세리오: 1818) ○ Enrico di Borgogna(도니체티: 오페라 세미세리아: 1818) ○ Una follia(도니체티: 파르사. 1818) ○ Il lupo d'Ostenda(니콜라 바카이: 오페라 세미세리아. 1818) ○ Le nozze in villa(도니체티: 오페라 부파. 1820-21) ○ Zoradia di Granata(도니체티. 오페라 세리아. 1822) ○ Pietro il grande 또는 Un geloso alla tortura(니콜로 바카이: 오페라 부파. 1822) ○ La pastorella feudataria(니콜로 바카이: 오페라 세미세리아. 1824) ○ Il precipzio 또는 Le fucine di Norvegia(니콜라 바카이: 멜로드라마 세미세리아. 1826) ○ Don Desiderio 또는 Il disperato per ecceso di buon cuore(프란체스코 몰라키: 오페라 부파. 1829) ○ Emma 또는 Il protettore invisible(줄리우스 베노니: 1851)

 

메렐리가 대본을 쓰고 도니체티가 음악을 붙인 오페라 '그라나타의 초라이다' 음반 커버. 메렐리와 도니체티는 친구사이였으나 나중에는 여러가지로 불편한 관계에 있게 되어 다시는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